위치에너지와 운동에너지의 관점으로 바라본 사랑
높이 '위치'할수록
물체가 갖는 위치에너지가 커지며
빠르게 '운동'할수록
물체가 갖는 운동에너지가 커진다.
또한 이들은 서로 에너지의 전환이 가능한데, 보존력이 작용할 때에 두 에너지의 합은 언제나 일정하다! 이를 '역학적 에너지 보존 법칙'이라 한다.
가령 높이 위치한 물체가 낮은 곳으로 떨어지면 위치에너지가 감소하게 되는데
감소한 위치에너지는 점차 빠르게 떨어짐으로 운동에너지의 증가로 이어지게 된다.
하지만 감소하는 위치에너지와 증가하는 운동에너지의 합은 어느 지점에서나 일정하다.
아래 롤러코스터 그림을 통해 다시 한번 알아보자. (확대해서 보세요)
(1) 높이 위치하고 있었던 열차가 가진 위치에너지는, (2) 중력에 이끌려 내려가는 열차의 운동에너지로 전환되면서 점차 감소하게 된다. (3) 이후 가장 낮은 곳에 도달한 열차의 위치에너지는 대부분 운동에너지로 전환되었다. (4) 그리고 이어서 다시 오르막을 오르는 열차의 운동에너지는 위치에너지로 전환되고 있다. 하지만 이 두 에너지의 합은 언제나 동일하다. (단, 보존력이 작용할 때)
이것이 '역학적 에너지 보존 법칙'이다.
위의 원리로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폭포수도 힘차게 아래로 흘러 흘러 여러 줄기의 실개천으로 흩어지게 된다.
나는 사랑이야말로 위의 '역학적 에너지 보존 법칙'으로 제대로 고찰해볼 수 있는 좋은 철학 주제라고 생각한다. 특히 우뚝 선 '자아 (自我)'를 포기하고 낮아짐으로 인해 생기는 '섬김'과 '사랑'은 위치에너지와 운동에너지의 전환과 똑 닮아 있다고 생각한다.
이 글에서는 여러 종류의 사랑 (에로스, 아가페, 필리아 등) 중에서 특별히 아가페적 사랑을 위 물리법칙을 통해 간단히 생각해보겠다.
아가페적 사랑은 '무조건적 사랑'이라고도 하는데 성서 속 신이 인간을 사랑하는 절대적인 사랑과 부모의 자식을 향한 사랑이 이에 해당된다.
아가페적 사랑은 다른 종류의 사랑과는 별개로 '자기희생', '자기 부인 (自己 否認, 자신이 죽었다 생각하며 이타적으로 행동하고 생각하는 것)' 이 중요한 요소가 되는 희생적 사랑이다.
이는 그야말로 '완전한 사랑'인 것인데, 성서 속 '신이 인간의 사랑하는 절대적인 사랑의 모본(模本)'을 '피조물인 인간이 부모와 자식 사이의 관계에서 (비록 불완전하게나마) 실천할 수 있고 나눌 수 있다는 것'은 기독교적 관점에서 바라보았을 때 정말이지 엄청난 기적이라고 생각한다.
헌데 인간뿐 아니라 자연에서도 동물들, 특히 어미가 새끼를 생명을 걸고서라도 보호하고 지키는 모습. 식물이 화려한 꽃을 피운 후에 이내 곧 시들어 떨구게 된 수많은 씨앗들이 다시 새로운 꽃으로 피어나는 모습 등. 희생적 사랑의 단편들과 그림자들을 자연 곳곳에서도 충분히 우린 볼 수 있다.
이제 위에서 알아본 '역학적 에너지 보존 법칙'을 통해 아가페적 사랑을 한번 바라보자.
나는 "이 세상 만물 중에서 가장 높아질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있다면 그 대답 중 하나로 '높아진 자아 (自我)'를 꼽고 싶다. ('자아'는 그것 하나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데도 무수한 지면을 필요로 하는 방대한 주제이기 때문에, 이 글 속에서만큼은 '높아진 자아, 자기만을 위하는 마음'에 대한 의미로 특별히 한정 지어 사용하고자 한다.)
자기 자아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것은 의식을 가진 존재로서 본능적으로 가지게 되는 특성이다. 또한 이것이야말로 인간에게 더할 나위 없는 동기부여이고 에너지일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 자아가 무섭도록 높아진다는 데에서 발생한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아가페적 사랑'의 변질이 시작된다.
위에서도 설명했지만, 아가페적 사랑은 희생을 중요한 요소로 갖고 있는 사랑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가페적 사랑'을 위해서 희생과 포기는 절대적으로 피할 수 없다. 하지만 지나치게 높아진 자아는, 운동에너지가 0인 상태의, 높이 위치한 롤러코스터처럼 아래로 흘러야 하는 사랑을 꽁꽁 묶어 흐르지 못하게 한다. 아무리 가진 것이 많고 내어줄 것이 많다한들, 낮아질 수 없는 자아에게서 희생과 헌신을 통한 아가페적 사랑은 흐를 수 없다.
이것이 특별히 무서운 이유는, 희생과 헌신이 '높아진 자아'에 의해 언제든 거짓으로 가장 (假裝) 되고 꾸며질 수 있는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희생과 헌신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속은 그 어떤 것보다 높아진 자아로 곪아갈 수 있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그래서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일수록 오히려 더 위험하고 파괴적으로 변질될 수 있다. 그 사랑이 흘러서 생명을 틔우고 있는가, 죽음을 잉태하는가는 그 일의 결과를 통해서 판별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나는 기독교인이다.
역학적 에너지 보존법칙으로 보았을 때, 성서 속 신이 인간의 모습으로 내려와 인류의 구원을 위해 죽음을 택한 '십자가의 사랑' 만큼 위력적이고 무지막지한 '낮아짐'은 본 적이 없다. 지극히 높은 하늘에서 땅으로, 힘껏 떨어져 흐르는 사랑의 '위치에너지에서 운동에너지로의 전환'은 십자가 사건이 있고 난 후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향기를 그대로 간직한채 주변에 흐르도록 한다.
그러나 기독교를 믿지만, 예수님의 행보와는 너무도 다른 행보를 걷는 사람들이 있다. 적지 않다.
그들은 그것이 자신들의 사랑을 흘려보내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가득 채워진 욕심의 그릇에서 자아의 낮아짐과 이웃을 사랑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나 또한 연약한 인간이고 매번 변질된 사랑으로 골머리를 앓지만, 사랑의 참 의미가 점점 말도 안 되게 퇴색되어가고 있는 지금의 시대가 가끔 답답하고 슬플 때가 있다.
사랑은 언제나 변질되기 쉽다.
흐르고 있는가. 고여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