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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쥰 Sep 29. 2020

숙주를 알면 생활사가 보인다 - 기생충의 생활사

 기생충 옴니버스 VOL. 1 (3)

본격! 기생충학 전공자가 들려주는 기생충 이야기


숙주를 알면 생활사(?)가 보인다


‘기생충에 대한 모든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는 인터넷 사이트가 있는데 바로 미국 질병통제센터 (Centers for disease control and prevention, CDC)의 홈페이지이다. 이곳에 들어가면 알파벳 순으로 정렬된 각각의 기생충에 대한 설명을 관람(?)할 수 있는데, 읽기 시작하자마자 첫 단락에 낯선 단어 하나가 등장한다! 바로 ‘생활사 (Life cycle)’이다.


CDC의 홈페이지에서 각 기생충별 정보를 확인하면 먼저 나타나는 LIFE CYCLE [1]


기생충들은 각기 경이로울 정도로 체계화된 생활사를 갖고 있다. 내가 처음 기생충학에 흥미를 갖게 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도 기생충들 저마다 갖고 있는 기가 막히고 아름다운 생활사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생활사란 무엇인가?”


정확한 정의로써 생활사 (Parasite Life cycle)의 의미는 '기생충이 하나의 숙주에서 또 다른 숙주에 도달 (감염)하며 겪는 성장과 발육 그리고 번식에 대한 일련의 과정 또는 순환’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기생충에 따라서는 간결한 생활사를 가진 것들부터 복잡한 생활사를 가진 것들까지, 생활사는 각 기생충들의 생존전략에 맞게 변화무쌍하다.


생활사는 기생충이 하나의 숙주에서 또 다른 숙주에 도달 (감염)하며 겪는 일련의 순환


기생충은 생활사의 단계 단계마다, 징검다리를 건너듯이 다양한 숙주로 이동 및 도달하게 된다. 각 숙주에서 기생충은 (곤충과 같이) 유충기에서 성충기로의 발육과 이행을 보이기도 하고, 외계 환경으로부터 저항성이 강한 모습으로 탈바꿈을 하기도 한다. 이를 위해 기생충들은 숙주의 입을 통해 장(腸)에 들어가기도 하고, 피부를 뚫고 숙주 안으로 들어가기도 하며, 흡혈하는 매개체 (vector)를 통해 숙주의 혈관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그렇다면, 작은 지도처럼 생긴 기생충의 생활사를 한눈에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은 간단하다! 숙주에 대한 개념만 제대로 알고 있으면 당신은 이제 기생충의 생활사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독도법 (讀圖法)을 통해 지도의 표시 기호들을 배운 후 지도를 읽을 수 있게 되는 것처럼, 숙주에 대한 개념만 제대로 안다면 당신도 '기생충 생활사'라는 지도를 손쉽게 읽을 수 있다.


그렇다면 오늘은 먼저, 생활사를 이해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개념인 중간숙주와 종숙주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중간숙주와 종숙주


숙주에도 각 역할에 따라 여러 종류의 숙주 (중간숙주, 종숙주, 보유숙주, 운반숙주) 가 있는데 그중에서도 중간숙주종숙주는 기생충의 생활사에 있어서 근간을 이루는 숙주이다. 그렇다면 바로 중간숙주와 종숙주의 개념에 대해 알아보자!


중간숙주 (中間宿主, intermediate host) 란?

기생충 생활사의 중간에 위치하며, 기생충 발육과 성장의 중간 단계에 해당하는 숙주를 일컬어 중간숙주라 한다. 기생충이 최종 목적지 (종숙주)에 가기 위해 거쳐야만 하는 전초기지라 보면 이해가 쉽다. 중간숙주는 아직 다 자라지 못한 유충 (larva) 상태의 기생충을 보유하며, 유충기 기생충의 증식과 분열을 위한 장소 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기생충은 개체를 늘리고 발육함으로써 다음 숙주로의 이동을 준비한다. *(기생충마다 중간숙주가 필요한 경우가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다)

생활사의 중간에 위치하며, 발육과 성장을 위한 중간 단계에 위치하는 중간숙주


종숙주 (終宿主, definitive host) 란?

 '마칠 종 終'이라는 한자어가 가진 의미 그대로 종숙주는 기생충 생활사의 맨 끝에 위치하는 숙주이다. 자손의 번식과 전파가 일어나는 기생충의 최종 목적지이다. 종숙주는, 유충의 마지막 성숙이 이루어짐과 동시에 성충기 (adult)의 기생충을 보유하며, 이들을 통해 자손을 번식하는 유성생식 (sexual reproduction)이 일어나게 되는 숙주이다. 최종적으로 종숙주에 도달한 기생충은 완전한 성숙을 이루고, 마침내 번식을 통해 바깥 환경으로 자손들을 전파할 수 있다

기생충의 완전한 성숙, 유성생식 (번식)과 자손의 전파가 일어나는 종숙주


쉽게 생각해도 종숙주는 번식을 통해 불어난 기생충 자손들을 가능한 한 넓은 반경, 그리고 높은 생존확률로 전파를 할 수 있어야 하는 특명 (?)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기생충의 입장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것이 바로 이 '종숙주'이다. (많은 경우 기생충은 종숙주를 통해 물속에서 육지로, 육지에서 물속으로, 심지어는 바다에서 공중으로 운반되며 효율적으로 자손을 전파한다)




중간숙주에 머물러 있는 기생충은 종숙주에게 전달되어야만 자손들의 계보를 이어나갈 수 있는데, 마치 기생충이 생태계의 먹이사슬을 알고서 그들의 숙주를 선택하기라도 한 것처럼 종숙주와 중간숙주의 관계는 대개 '포식자 (천적)-먹이'의 관계가 많다.  


다시 말하면, 중간숙주에 기생 중인 기생충은 번식과 전파라는 최종적인 특명을 위해 종숙주에 도달해야만 하는데, 중간숙주를 먹이로 삼는 천적종숙주일 경우 (ex. 중간숙주-쥐, 종숙주-고양이) 훨씬 쉽고 효율적으로 생활사를 이어나갈 수 있게 된다. 누군가는 이것이 적응과 진화의 산물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으나, 기생충의 '숙주 특이성'을 깊이 고찰해본 나로서는 이것이 결코 '신 (God)의 섭리'가 아니고서는 설명될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이것은 기생충을 위한 '신의 배려' 이기도 하다.


자 이제 중간숙주와 종숙주의 개념을 알았다면, 처음에 있었던 생활사 그림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자.


복잡하기로 악명 높은 흡충의 생활사, 하지만 중간숙주와 종숙주만 기억한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위 생활사는 기생충인 '간흡충'의 생활사인데, 숙주가 두 종류나 있어서 기생충 생활사 중에서도 나름 복잡한 축에 속한다. 하지만 중간숙주와 종숙주만 기억한다면 위 생활사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아래 노란별 (☆)로 표시된 것이 중간숙주, 빨간별 (★)로 표시된 것이 종숙주 그리고 동그라미 (●)로 표시된 것들이 각 숙주 안에서 기생충의 발육 단계 (유충부터 성충까지)이다.


위 그림의 1번부터 천천히 생활사를 읽어나가기 시작해보자. (중간숙주-유충, 종숙주-성충, 충란. 만 기억하자)


1번: 인간의 분변과 함께 충란 (egg)의 상태로 외계에 배출된 기생충은


2번: 첫 번째 중간숙주인 담수산 패류에 의해 섭취된다. 이때 섭취된 충란은 패류의 체 내에서 유충 (larva)으로 깨어 나와 몇 가지 발육 단계를 거쳐


3번: 다시 물속 (외계)으로 배출되고,


4번: 두 번째 중간숙주인 민물고기의 비늘 속으로 뚫고 들어가 (피부 밑에 잠복기생하는 형태인) 피낭유충이 된다.


5번: 그리고 마지막으로 종숙주인 사람에게 섭취된 유충은,


6번: 사람의 체내에서 성충으로 발육한 뒤, 생식으로 만든 충란 (egg)을 대변과 함께 바깥 외계로 배출함으로 자손을 전파하고 마침내 생활사를 완성하게 된다.


단계 사이마다 여러 가지 복잡한 유충의 발육 단계들이 있지만 중간숙주와 종숙주의 역할만 제대로  파악한다면, 간흡충이 어떤 식의 생활사를 경유하는지 충분히 이해하며 생활사를 볼 수 있다.


(마치 내가 수능강사라도 된 양 뿌듯하다. 기생충학이 수능과목으로 있다면 1타 강사가 될 자신이 있다)




기생충의 생활사를 통해 얻은 한 가지 교훈


중간숙주에서 발육과 성장이 있은 후, 종숙주로 도달하는 기생충의 경우에, 중간숙주 없이 곧장 종숙주로 가는 것은 그들에게 무의미한 일이다.


각 중간숙주 별로 기생충의 단계에 맞는 성장이 있고, 그 성장이 다 한 후에야 다음 숙주로 이동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있어서도 '성숙'과 '성장'이 어쩌면 기생충의 중간숙주와 종숙주와도 같은 것이 아닐까?


우리가 엄마의 뱃속에서부터, 세상 밖으로 나와 (영아기), 유아기를 거쳐 청소년기, 성인기 그리고 노년기에 이르기까지. 어떤 단계를 생략하거나 거치지 않고서 우린 결코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없다. 각 단계에 맞는 성장통을 겪으며 우린 성장하고 성숙한다. 그리고 그렇게 겪고 난 후에야 다음 단계로 발을 뗄 수 있다.


어떤 한순간도 우리에게 필요 없는 순간이 없고, 모든 실패는 다음의 걸음을 위한 양분이 되는 것처럼.


나에게도 매일 살아내고 걷는 ‘오늘’ 이 ‘내일’을 위해 너무나도 중요하고 소중하다.



참고문헌

[1] https://www.cdc.gov/dpdx/clonorchiasis/index.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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