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 옴니버스 VOL. 1 (2)
"여기가 인간의 소장 (小腸)이 맞나요?"
본격! 기생충학 전공자가 들려주는 기생충 이야기
기생충에게 숙주는 알맞은 서식처를 제공해줄 뿐 아니라, 생존에 필요한 영양물 또한 얻을 수 있는 안락한 보금자리(?)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집의 주인 격인 숙주에게 아무런 동의도 구하지 않은 채 기생충은 숙주의 체표, 혹은 체내로 들어간다.
하지만 이런 요긴한 생활방식을 전략으로 삼고 있는 기생충에게도 생존을 위해 거쳐야만 하는 무지막지한 난관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기생충에게 ’적합한 숙주를 찾아야만 하는 것’이다. 기생충에게도 사람과 같이 '집 구하기', 즉 '숙주 구하기'가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과정인 셈이다.
기생충에게 적합한 숙주가 아니면, 기생충 스스로가 필요로 하는 영양분을 얻을 수 없음과 동시에 유충으로부터 성충으로까지 발육하는 데에도 큰 걸림돌이 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기생충에게 적합한 생존환경이 조성되지 않으면, 그들의 최종 목표가 되는 ‘자손을 증식하는 일 (생식, 번식, reproduction)’ 에도 차질을 빚게 된다. 자손과 유전정보를 후대로 남겨야만 하는 기생충들에게 있어 부적합한 숙주로의 이동은 가히 파국이라 할 수 있겠다. 그렇기에 기생충 제국의 존립과 번영을 위해서는 가장 먼저 성공적으로 기생할 수 있는 적합한 숙주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톡소포자충 이라는 기생충의 경우에, 고양잇과의 동물에서만 자손을 번식할 수 있다. 또 ‘말라리아’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열대열원충 이라는 기생충의 경우에도 모기의 장 내에서만 자손을 번식할 수 있다. 이들은 각각 고양잇과 동물 혹은 모기가 아닌 다른 숙주에서 결코 자손 번식 (유성 생식)을 성공적으로 이룰 수 없다.
하지만 기생충에 따라서도 이 '숙주 특이성'이 엄격하게 적용되는 기생충이 있고 또 그렇지 않은 기생충이 있다. 쉽게 말해 사람으로 비유하면 특정한 장소에 있어야만 안정감을 느끼고 삶의 질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데 반해, 어떤 장소나 환경에 놓이더라도 별다른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기생충의 종류 중에서 '요충', '무구조충'이라 이름하는 기생충의 경우에는 오로지 사람에서만 (유충에서) 성충으로 발육할 수 있는 한편, '선모충', '간흡충' 등과 같은 기생충의 경우엔 사람을 제외한 다른 여러 동물에서도 성충으로 발육할 수 있다.
위와 같이 기생충에 따라서도 하나만의 숙주를 원하는 경우가 있고, 또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는데 이같은 상황이 발생하는 이유는 기생충의 감염력과 숙주의 감수성 (susceptibility), 그리고 습성 등 다양하고 복잡한 요인에 따라 ‘숙주 특이성’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럼 대망의, 오늘 제목의 주인공이기도 한 회충의 이야기로 한번 들어가 보자.
회충은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대표적이고 보편적인 기생충으로 전 세계에 걸쳐 널리 분포하고 있다. 우리가 흔히 떠올리게되는 기생충의 이미지도, 바로 이 회충의 모습으로부터 온 것이다. (전 세계 12억 명의 인구가 회충에 감염되어 있다고 보고됨 [2])
나중에 회충에 관한 스토리로만 하나의 섹션을 다룬다고 해도 내용이 부족할 정도로, 회충은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하고 또 가까운 대표적인 기생충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회충의 종류만 해도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일반적인 '회충'이라고 불리는) 사람회충부터 해서 개회충, 고양이회충, 돼지회충 등이 있다.
그런데 '숙주 특이성'을 다루는 이야기에서 특별히 '회충'을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모신 것에는 다 이유가 있다. 회충이야말로 숙주 특이성이 강한 기생충이기 때문이다. [3]
앞서 언급했던 '사람회충'은 '사람'에서만 성충으로 발육하고 생식할 수 있으며, '돼지회충'은 '돼지'에서만 성충으로 발육하고 생식할 수 있다. 또한 '개회충'도 '개'에서만 성충으로 발육할 수 있다. 너무 신기하고 놀랍지 않은가? 생김새도 비슷하고 기생충 내부의 구조도 비슷하여 (유전적으로도) 가까운 근연관계를 하고 있지만 이들은 저마다 다른 숙주에서 특이적으로 발육하고 생식할 수 있다.
특히 이들은 숙주 특이성이 강한만큼 각자에게 딱 맞는 숙주에 대해서는, 감염의 정도가 크지 않을때 숙주에게 별다른 피해를 끼치지 않는다. 마치 도둑이 큰 피해를 주지 않고 커다란 집에 조용히 숨어 사는 것처럼, 회충은 그렇게 숙주에게 높은 특이성을 갖고서 기생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다수의 회충이 심하게 감염되어 있을 경우 숙주에게 큰 피해를 입힐 수 있다.)
이들 회충은 숙주의 장 (腸)을 기생 부위로 삼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소장 부위에 기생하며 살아간다. 회충이 어떤식으로 사람에게 감염되고 유충부터 시작하여 성충까지 자라나는지에 대해서는 나중에 한번 더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다.
결론적으로 회충은 각자에게 딱 맞는 숙주에 들어가, 성충으로 발육한 뒤에 숙주의 장에서 영양분을 섭취하며 숙주의 면역체계를 피해 조용히 그리고 오손도손(?) 살아가게 된다.
이제 위의 내용을 간단하게 정리해보겠다. 기생충은 저마다 고유한 '숙주 특이성'을 갖고 있으며 그들의 발육과 성장에 적합한 숙주 안에서만 자라갈 수 있다. 특히 회충은 여러 기생충 중에서도 '숙주 특이성'이 강한 기생충에 속하며 다양한 회충이 각자의 특이적인 숙주에서 발육하고 성장하게 된다. 그중 (일반적으로) '회충'이라 불리우는 '사람회충'의 경우엔 오로지 사람에서만 성충으로 자라갈 수 있으며, 숙주인 사람 내에서도 소장을 기생부위로 영양을 섭취하며 살아간다.
어떤가? 하찮게 보이는 기생충도,
각 기생충 마다 입맛이 다르고
까다로운 취향을 갖고 있음이
신기하지 않은가?
어쩌면 변하는 환경에 쉽게 적응할 수 있는 사람보다 훨씬 고집스럽고 독특한 취향을 가진 생물이 바로 기생충일 것이다.
다음 이야기에서는 '기생충의 생활사'에 대해 알아볼텐데, 이번 글에서 배운 '숙주 특이성' 이라는 개념을 기억하고 생활사를 바라본다면 훨씬 이해가 쉬울 것이다.
그럼 이만 다음편에서 만나보도록 하자.
참고문헌
[1] 이순형, 채종일, & 홍성태. (1996). 임상기생충학 개요. 서울, 고려의학, p.15
[2] Crompton, D. W. T. (2001). Ascaris and ascariasis.
[3] 이순형, 채종일, & 홍성태. (1996). 임상기생충학 개요. 서울, 고려의학, p.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