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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찬용 Aug 31. 2017

잡지에는 왜 비싼 물건만 나올까

어디에나 사정이란 건 있으니까

몇 년째 일해도 새로 나온 잡지를 보면 조금은 기분이 좋다. 잘 구워진 올리브 치아바타같은 걸 보는 기분이다. 내가 저 빵을 다 만들지는 않았어도 2번 우유 납품업자 정도는 되지 않을까. 아무튼 구운 빵을 한 쪽 떼어 맛을 보는 기분으로 페이지를 넘겨 본다. 내가 만드는 거야 몇 번이나 봤으니까 지긋지긋하다. 팀의 다른 분들이 만든 걸 본다. 멋있는 물건이 있다. 오, 좋아 보인다. 사볼까? 얼마지? 사진 구석에 있는 좁쌀만한 캡션을 찾는다. 183만원. 아 못 사 못 사. 비싸서 살 수가 없다. 


많은 분들이 물건을 보고 좋아했다 가격을 보고 마음이 식은 적이 있지 않을까? 축복 수준으로 돈이 많은 몇몇을 뺀 대부분이 이런 경험을 하는 것 같다. 잡지사에서 일한다고 하면 가장 많이 들은 이야기 5위 안에 드는 게 "왜 다 비싼 것만 나와요?" 다. 사실이 그렇다. 비싼 게 많이 나온다. 왜일까. 잡지에 가격이 별로 안 비싸면서도 좋은 물건이 나올 수는 없을까? 꼭 그렇지는 않지만 이쪽에도 사정은 있다. 불가피한 이유도, 어쩔 수 없는 이유도, 우리 쪽에서 반성해야 할 이유도 있다. 


우선 불가피한 것부터. 기본적으로 <에스콰이어>를 비롯한 라이프스타일 잡지는 라이프스타일 업계라는 사치품 시장의 최전선에 대해 이야기한다. 라이프스타일이라고 포함될 시장과 제품에 사치품만 있는 건 아니겠지만 사치품이 많다고 봐도 큰 무리는 없으리라. 사치품으로의 라이프스타일을 말할 때 이쪽 잡지가 다루는 영역은 자동차 경주로 치면 F1같은 세계다. <사이언스>같은 잡지에 최신 논문이 나오는 것과 엄밀히 말해 큰 차이가 없다. 가장 먼저 상용화된 기술, 런웨이에서 봤는데 한국에 막 들어온 물건, 업계의 맨 앞에 있는 뉴스가 라이프스타일 잡지를 통해 소개된다. 그게 뭐든 상용화되자마자 시장에 나온 건 어쩔 수 없이 비싸고 접하기 어렵다. 하이 패션 잡지에서 아무데서나 볼 수 있는 옷이 나온다면 그것도 그것대로 곤란한 일이다. 독자들도 아무데서나 볼 수 있는 옷을 보기 위해 하이 패션 잡지를 고르지는 않는다. 


대부분의 잡지에 나오는 좋은 물건의 가격이 미정인 이유도 그 때문이다. 잡지에 나온 물건 중에는 미국이나 서유럽의 본사에서 DHL로 날아와서 촬영하고 다음 날에 다시 본국으로 돌려보내는 것도 많다. 그런 물건이 세관에 걸려서 촬영 담당 에디터가 난처해지기도 하는 게 한창 일하는 잡지사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가격 미정이라는 야속한 캡션 뒤에는 이렇게 기술적인 사정이 있다. 이해해주신다면 감사하겠다. 


잡지에 나오는 모든 가격미정이 정말 가격이 안 정해진 건 아니다. 이해해주신다니까 하는 말인데 있는 가격을 가리기도 한다. 종종 물건을 빌려주는 브랜드 측에서 가격을 알리지 말아 달라는 요청이 들어온다.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 너무 비싸서 괜히 가격을 공개해봤자 사람들에게 비난만 들을 것 같은 경우. 어차피 아는 사람은 사는 물건인데 "이 시계는 뭔데 1억 4천8백만원이나 하는 거야?" 같은 비난을 들을 필요는 없다. 둘째 이유는 조금 더 미묘하다. 가격을 미정으로 표시하면 잠재 고객이 묻는 경우가 있다. "<에스콰이어>에 나온 그 금 시계 얼마에요?" 라고 묻는 사람들이 있기를 기대하는 마음에 어떤 브랜드는 가격 미정 표시를 요청하기도 한다. 가격 미정의 세계는 심오하다.


잡지 에디터들끼리도 가끔 말한다. 왜 비싼 물건만 나오는지. 답은 한 군데로 모인다. "비싼 게 예쁘잖아." 부인하기 어렵다. 세상의 비싼 물건은 대부분 비쌀 만한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훌륭한 디자인이기도 하고 누구나 아는 브랜드 가치이기도 하며 한번 손을 대면 잊을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촉감을 주는 고급 소재이기도 하다. 그리고 보통 좋은 물건은 이 셋을 다 가지고 있다. 디자인, 브랜드 가치, 좋은 소재. 그리고 한 물건 안에 이 셋이 모인다면 그 물건의 가격은 1+1+1=3을 넘어선다. 한 20 정도는 되는 것 같다. 물건 보다 보면 예쁜 게 더 비싸진다는 건 쇼핑을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어느 정도 공감해주실 거라 생각한다. 


여기까지 이야기하면 당신은 궁금해질 수도 있다. 다른 나라에는 좀 덜 비싸고 예쁜 것도 많던데? 다른 나라 잡지엔 적당한 물건도 많이 나오던데? 왜 한국 잡지에는 그런 물건이 안 나오지? 


이건 한국의 제품 시장에 투덜거리고 싶은 부분이다. 실제로 유럽이나 미국, 일본 같은 경우는 가격이 아주 비싸지 않아도 좋은 물건이 많이 나온다. 꼭 패션뿐 아니라 일상생활에 관련이 있는 제품이면 그게 뭐든 종류가 많고 선택의 폭이 넓다. 꼭 초고가 수준이 아니어도 조금 더 돈을 쓰면 충분히 만족스러운 물건들이 많이 있다. 한국은 반면 유명 브랜드가 아닌 이상 웬만한 물건을 통틀어도 영감을 얻거나(많이 따라하거나) 덜 좋은 재료를 쓴(싼 티가 나는) 물건이 많은 게 현실이다. 그렇지 않다면 한국 잡지에도 질 좋고 상대적으로 덜 비싼 한국 제품이 많이 나온다. 패션의 준지나 김서룡 옴므, 아이리버의 아스텔 앤 컨이나 에이프릴뮤직의 오라 노트 같은 것들. 


여기까지 이야기하며 아직 꺼내보지 않은 가능성이 있다. 나를 비롯한 에디터들이 좋은 물건을 찾아 소개할 만큼 부지런하지 못했던 것 아닐까? 그렇기도 하다. 잡지에 안 나오는 좋은 물건이 많으니까. 이러니 저러니 해도 세상에는, 아니 한국 시장에는 아주 많은 물건이 있다. 어떤 물건은 덜 비싸도 굉장히 멋있다. 대신 그런 물건은 잡지 에디터가 쉽게 찾아서 소개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전담 홍보팀이 있거나 홍보대행사를 운영해 촬영하는 물건을 바로바로 빌려주는 회사의 물건에 아무래도 손이 가게 마련이다. 정말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좋은 물건을 빌리려면 조금 더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에서 나오는 에스콰이어라는 잡지인데요. 아니요 구두 만드는 거기랑은 이름만 같고 다른 데구요. 홈페이지에서 파시는 그 물건 좀 빌리려면...네? 공문 보내라구요?" 같은 과정을. 


일본 잡지 <뽀빠이>의 초기 멤버들은 잡지에 소개하기 위해 매달 미국에 가서 거기에만 있는 물건을 사서 일본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지금 한국 잡지 시장이 그럴 만한 분위기가 아닌 건 사실이다. 한국의 잡지 에디터들은 바쁘고 일이 많으며 과로한다. 광고주가 단독으로 나오는 화보나 콘텐츠를 만드는 데 들이는 시간과 과정은 길고 고되고 복잡하다. 변명으로 볼 수도 있지만 우리에게도 사정은 있다.


이런저런 끝에 한국은 결과적으로 접하기 쉬운 가격대의 물건을 출판 매체에서 보기 힘든 나라가 되었다. 미국의 <컨슈머 리포트>같은 잡지나 일본의 <비긴>같은 충실한 제품 카탈로그성 잡지는 한국에 나오지 않는다. 분명 그게 더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정보일 텐데, 사람들이 원하는 정보가 (잡지라는 형태로)상품화되지 못하고 있다. 이야기하자면 아주 길지만 거칠게 축약하면 수요와 공급 측에서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해 지금의 결과까지 이른 것 같다.


자본주의 문명이 굴러가는 한 사람들은 물건을 사고 그 물건의 정보를 원한다. 그래서 으레 잡지에 있었어야 할 콘텐츠들이 한국에서는 다른 곳에 가 있다. 파워블로거의 블로그, 대형 인터넷 카페, 그리고 온라인 셀렉트 숍이다. 우리가 물건을 사고 뭐가 좋은지 찾아볼 때 결국 찾아보는 건 이 셋 중의 하나일 가능성이 높다. 네이버에서 한국어로 검색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저 세 채널의 정보를 참고해 물건을 산다. 


이건 좋거나 나쁘다고 단정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해당 분야에 대한 전문 저널리스트/에디터가 만드는 게 아니라 블로그가 만드는 콘텐츠가 나쁠까? 솔직히 나는 모르겠다. '안녕하세요 이웃님들~'이라는 말과 함께 정보를 주는 블로거에게 저널리스트적 직업윤리가 없을 수는 있다. 대신 훨씬 보기 쉬운 정보가 무료로 올라온다. 제대로 된 정보에 제대로 된 값을 지불하는 소비자층이 얕기 때문에 정보를 편집하고 가공해서 판매하는 매체가 사라졌다고 볼 수도 있다. 그렇다고 소비자를 탓할 일일까? 이것도 모르겠다. 검색만 하면 품질은 조금 미심쩍더라도 공짜로 볼 수 있는 정보가 쏟아지는데? 고민 끝에 난 그냥 이 상황을 한국적인 현상이라고 여기기로 했다. 대륙성 기후나 해양성 기후처럼. 내 몸에 안 맞는다고 기후를 비난할 수는 없지 않을까. 


내가 존경하며 모셨던 어떤 편집장도 잡지에 비싼 물건만 나오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나는 <노멀>이라는 잡지를 만들고 싶어. 정말 나같은 사람이 살 수 있는 물건과 라이프스타일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잡지야. 어디 할인 매장이 좋다더라. 국산 신차 중형 세단과 수입 중고차 중에서 뭐가 더 좋을까, 여행도 호화 리조트가 아니라 남도 여행 같은 거 있잖아." 그의 꿈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런 이야기는 네이버 블로그와 보배드림에 다 있기 때문인 걸까. 언젠가는 <노멀>같은 잡지가 나올 수 있으려나. 그런 잡지가 나오면 당신은 볼 생각이 있으신지? 사서 볼 정도이신지? 얼마까지 내실 수 있으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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