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여기에 없었다> 리뷰
"미국에선 진지하고 어둡고 무겁고 지적인 이야기는 다 TV로 나온다. 한국도 곧 그렇게 될 것이다. 그런 시대를 대비해서 영화를 준비하고, 적응해야 하느냐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늘 던지고 있다." 영화감독 박찬욱은 2017년 10월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박찬욱 본인이 이 말의 증거다. 그는 BBC1에서 제작하는 존 르 카레 원작 <리틀 드러머 걸>의 TV 드라마를 감독했다.
그러면 극장에서는 무슨 영화를 볼까? "이제는 슈퍼 히어로 영화만 영화관 가서 보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도 박찬욱은 말했다. 일부러 가야 하는 대화면 스크린에서 볼 만한 건 압도적인 시각 이미지를 주는 슈퍼 히어로 영화 정도일 거라는 이야기다. 그러니 창작자가 긴 시간동안 이야기를 끌고 나가고 싶다면 TV 시리즈를 만드는 게 더 낫다. 기술적인 발전도 영향을 미쳤다. 넷플릭스에서는 이제 10시간을 들여서 영상물 한 시즌을 통째로 볼 수 있다. TV나 빔 프로젝터 등 가정용 영상 출력기기의 성능도 예전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아졌다.
책은 어쩌지? <너는 여기에 없었다>를 이야기하기 전에 500자 정도 쓸데없는 이야기를 한 이유다. 원래 진지하고 어둡고 무겁고 지적인 이야기는 책이라는 문자 기반 매체의 영역이었다. 그런데 극장이 테마파크가 되고 TV가 예술영화 상영관이 된다면 문자열로 이루어진 책은 어떻게 되어야 할까? 나는 <너는 여기에 없었다>를 읽으면서 이런 소설이 영상시대를 맞은 소설 작가들의 대답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너는 여기에 없었다>는 짧고 읽기 쉽다. 이야기 흐름은 직선적이다. 캐릭터는 몇 명 나오지 않고 모두 간결하다. 문장도 복잡하지 않다. 대부분의 문장이 행동과 상황 묘사다. 극본으로 치면 지문에 가깝다. 지문도 모호할 수 있지만 이 소설에서의 행동 묘사 문장은 대부분 아주 깨끗하다. 세공한 듯 꾸밈말을 많이 쓴 문장도, 두번 읽어야 알 수 있을 정도로 중의적인 표현도 없다.
이 짧은 소설 안에서 작가가 이상할 정도로 길게 설명하는 부분이 있다. 주요 등장인물의 심리적 배경이다. <너는 여기에 없었다>의 분량은 한국어 기준으로 144페이지에 불과하다. 폰트 크기와 줄간과 자간도 넉넉하다. 그런데 이 짧은 이야기 안에서 주인공 조와 그의 손님인 보토의 이야기가 너무 많이 묘사되어 있다.
간결한 구조의 짧은 이야기와 너무 긴 심리적 배경. 바로 이 부조화가 <너는 여기에 없었다>만의 공감을 불러낸다. 조의 심리와 상황이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기 때문에 조가 이야기 속에서 하는 여러 가지 비현실적 행동이나 생각이 이해된다. 보토도 마찬가지다. 그의 배경과 심리 역시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으므로 보토가 하는 여러 가지 일이 이해는 된다. 보통 빠르게 치고 나가야 하는 이야기에서 등장인물의 성격 묘사가 길어지면 늘어지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이 이야기 안에서는 조와 보토의 상황 설명을 읽으면서도 이야기가 느려지는 느낌이 전혀 없다. 일종의 기술적 착시랄까.
작가 조너선 에임즈는 이런 식의 문학적 기교에 능통할 사람이다. 그는 1989년부터 스토리텔링 업계에서 일한 베테랑이다. '스토리텔링 업계'라고 말한 이유는 그가 소설만 써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서사의 리듬을 만들어내는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다. 에임즈는 네 권의 소설을 쓰고 네 권의 에세이를 썼다. 한 권의 만화책을 내고 세 개의 TV 시리즈 각본을 썼다. 스탠딩 코미디와 TV 쇼 게스트에 나간 적도 있다. 스토리텔링 업계의 감독과 플레이어 경험을 동시에, 그것도 오랫동안 해왔다. <너는 여기에 없었다>는 이런 이력을 가진 에임즈 씨의 첫 스릴러 소설이다.
<너는 여기에 없었다>는 그래서 더 흥미롭다. 이 소설은 스토리텔링 업계의 최전선에 있었던, 만화책과 에세이집과 심리 묘사 소설을 쓰던 작가가 쓴 최신작이다. 사람들이 즐기는 오락물이 점차 영상으로 넘어가는 시대에, 그 시대적인 경과와 흐름을 계속 봐온 사람이 굳이 문자로 된 서사물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런 배경까지 생각하지 않아도 <너는 여기에 없었다>는 충분히 재미있다. 주인공 조는 톱니바퀴 사이에 낀 것처럼 사건 안으로 순식간에 휘말려들어간다. 그가 첫 숙제를 성공적으로 마치자마자 바로 그 순간부터 진짜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궁금한 이야기가 생기고, 그 사건 속으로 조가 들어가서 우당탕탕 사건을 해결하면, 게임의 다음 퀘스트처럼 또 궁금한 이야기가 모습을 드러낸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또 문이 보이는 듯한 기분을 느끼다 보면 어느새 책의 마지막 페이지로 넘어가 있다. '아니 이렇게 끝난다고?' 같은 놀라움을 남기고.
생각해보면 문자 서사는 <너는 여기에 없었다>에 최적화된 방식이기도 하다. 영상 서사와 문자 서사의 가장 큰 차이는 독자의 현 위치를 알 수 있는지의 여부다. 책 형태의 이야기에서 독자는 내가 n페이지 중 어디에 있는지 바로 알 수 있다(영상도 기술적으로 그럴 수 있지만 극장에서 보는 영화같은 건 내가 현재 위치를 알기 힘들다). <너는 여기에 없었다>는 그렇기 때문에 더 신기하다. '왜 조가 사건을 해결했는데 페이지가 이만큼이나 더 남았지?' '이제 거의 다 읽어가는데 왜 아직도 이야기가 한참 남은 듯한 거야?' 같은 생각을 계속 하게 만든다. 미스테리 소설은 이런 식으로도 독자의 머리를 간지럽게 만들 수 있다. <너는 여기에 없었다>같은 책이야로 넷플릭스 시대의 소설 아닐까.
이것도 <미스테리아>에 실었던 글입니다. <너는 여기에 없었다>는 실로 훌륭한 이야기입니다. 영화화되었다고도 하는데, 이런 이야기라면 영화로 만들어져도 더 재미있을 겁니다. 어차피 문자는 이야기가 저장된 수단 중 하나일 뿐입니다. 요즘 세상의 글은 악보와 비슷한 것 아닐까라고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