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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찬용 Oct 07. 2020

소년의 여름과 희미한 그림자

요네자와 호노부의 <책과 열쇠의 계절> 평

책과 열쇠의 계절 일본판 프로모션 이미지.


‘고등학교 도서부 남자 부원 둘이 이런저런 일들을 추리로 해결한다.' 요네자와 호노부의 2018년작 <책과 열쇠의 계절>을 요약하면 이 정도가 될 것 같다. 나는 면구스럽게도 서평 의뢰를 받고서야 요네자와 선생의 이름을 알았다. 서평을 적기 전에 전작 목록을 찾아보았다. 이런, 발표된 소설이 21권이나 되는데 전부 다 한국어 번역본까지 나온 수퍼스타 작가님이다. 이런 작가의 책을 한 권만 읽어보고 서평을 적으면 비웃음을 살 게 확실하다. 다행히 작가의 전작을 몇 권 읽어볼 말미가 있었다.


요네자와 호노부는 <빙과>로 시작되는 ‘고전부 시리즈’로 스타가 되었다. 고전부 시리즈와 <책과~>에는 비슷한 부분이 있다. 책 관련 동아리 고등학생 이야기다. 고전부와 도서부. 동아리의 친구들은 각자의 특기로 사건을 해결한다. <책과~>의 두 주인공 마쓰쿠라 군과 호리카와 군 역시 각자의 명석함으로 미스테리를 푼다. <책과~>는 각 요소가 조금씩 맞물린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단편들이 지나갈수록 큰 줄거리가 보인다. 일본 드라마와 비슷한 구성이랄까, 고전부 시리즈 중에도 <멀리 돌아가는 히나><이제 와서 날개라 해도>와 비슷하다.


<책과~>의 수수께끼 풀이는 아주 고전적이다. 단서는 이미 이야기 곳곳에 모두 흩어져 있다. 주의 깊은 독자라면 소설 속 단서만으로 이야기 속 탐정들의 수수께끼를 함께 풀 수 있다. 공정한 머리싸움, 엘러리 퀸이나 해리 케멜먼 같은 사람들이 생각나는 추리소설이다. 뭐든 레퍼런스에 아주 집착하는 일본 특유의 성향이 드러난다고 생각한다면 너무 큰 비약일까.


고전적인 것만 답습하면 잘 해봐야 레트로다. 요네자와 호노부가 지금 훌륭한 작가인 이유는 고전 미스터리의 수수께끼와 청소년의 성장담을 함께 집어넣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요네자와 호노부는 고전부 시리즈에서 서양의 고전 미스테리풍 수수께끼 풀이와 일본 청소년의 감수성 가득한 성장담을 버무렸다. 얼핏 보기엔 잘 달라붙지 않는 두 장르의 이야기를 짜맞춰 굴리는 게 요네자와 호노부의 원천기술이다. 이 시리즈의 일정 부분은 고교 시절의 '모에화' 같은 면이 있다. <빙과>를 비롯한 고전부 시리즈가 괜히 애니메이션으로 다시 만들어진 게 아니다.


다만 <책과~>와 고전부 시리즈는 공통점은 구조 일부에 머문다. 둘은 세부적으로는 전혀 다르다. 고전부 시리즈는 미스테리물인데도 진짜 범죄는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다. 세상에는 범죄가 아닌 수수께끼도 있으니까. 그 세계 안에서는 '이게 무슨 일이지?' 싶은 느낌의 신나는 수수께끼만 이어진다. 고전부의 학생들은 앞날 고민도 하고 연애 감정도 느끼고 교우관계도 생각하며 자기 앞의 미스테리를 풀어나간다.


고전부 시리즈가 '명문고 중산층 로맨스 미스테리' 시리즈라면 <책과~>는 '일반고 서민 하드보일드 미스테리'다. <책과~>속 학생들에게는 풋풋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 책의 모든 일들은 옅은 회색처럼 티 안 나게 우울한 현실이다. 그래서인지 <책과~> 에서는 정말 범죄가 일어난다. 스포일러가 될 테니 다 말할 수는 없지만 이 이야기 속 아이들의 고민은 지금 짊어지기엔 너무 무겁다. 그 면에서 <책과~>는 대한해협 건너의 어딘가 도시에서 교복을 입고 학교를 다녔던 우리에게 더 와닿는 면이 있다.


수수께끼가 없으면 미스테리가 아니지만 수수께끼만 있으면 싱거운 미스테리가 된다. <책과 열쇠의 계절>은 그 면에서 멋진 소설이었다. 요네자와 호노부 특유의 일상적이면서도 현란한 트릭이 있다. 그 사이로 지금 일본의 보통 청소년들이 겪을 법한 문제가 지나간다. 아이들은, 아이들이 그렇듯이 어느 부분에서는 어른스러우면서도 어느 면에서는 아이같은 태도로 수수께끼를 하나씩 풀어 나가며 조금씩 어른이 된다. 고전부 시리즈에는 분명히 애니메이션 원작 느낌이 있었다. <책과 열쇠의 계절>이 영상화된다면 왠지 실사 영화가 되어야 할 것 같다.




미스테리 전문지 <미스테리아> 20호에 실린 원고입니다. 서평 적는 건 늘 어렵습니다만 늘 즐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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