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리사 가니에바의 <상처받은 영혼들> 평
<상처받은 영혼들>에 빠져들려면 한국어판 기준 두 페이지로 충분하다. 비 오는 밤. 멍하게 운전하던 남자의 차를 누군가 격하게 두드린다. 모르는 중년 남자가 밑도끝도없이 태워달라고 한다. 뉘신 줄 알고. 운전하는 남자가 거절하려 한다. 그 순간 남자가 차 속으로 지폐를 던져 넣는다. 남자는 얼떨결에 모르는 남자를 태운다. 뒷좌석에 탄 남자가 말한다. "드라이브 좀 합시다."
이 도입부로부터 시작한 <상처받은 영혼들>은 러시아의 어느 작은 도시 곳곳을 핀볼처럼 튀어간다. 구간마다 쇠 공의 리듬과 속력이 다른 핀볼처럼, 이 소설 역시 이야기라는 핀볼이 도시의 사람들과 장소를 오가며 말 그대로 공처럼 튄다. 잠깐 멈췄다가, 굴러가다가, 갑자기 세차게 움직인다. 리듬이 있는 듯 없는 듯하면서도 다음 페이지에 무슨 이야기가 나오려나 싶은 마음에 페이지를 넘기게 된다.
제목과 달리 <상처받은 영혼들>의 초반부에는 상처받은 영혼이 잘 보이지 않는다. 상처를 받기는커녕 모두가 모두에게 일상적인 상처를 주고 있다. 하나같이 자기 할 말만 하고 자기 생각만 한다. 간선도로 방음벽의 먼지처럼 두껍고 끈적이는 짜증 사이로 모두의 관심을 끄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그 사건으로부터 이야기가 핀볼처럼 온 도시를 튀어다니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가 흐르다 보니 미스터리만 있고 탐정은 없다. <상처받은 영혼들>은 한 명의 주인공이 사건을 풀거나 한 명의 화자가 이야기를 이끄는 미스테리 소설의 평균을 따르지 않는다. 작가는 모두를 감시하듯 멀리 떨어져서 다큐멘터리 카메라처럼 상황을 보여준다. 그 상황들이 맞물리면서 수수께끼가 조금씩 벗겨져 나간다.
<상처받은 영혼들>의 수수께끼 사이로 현대 러시아라는 것이 촘촘히 들어가 있다. 이 소설에서 묘사되는 현대 러시아는 굉장하다. 온갖 것들이 부정하게 굴러가고 온 세상에 미신이 백내장처럼 끼어 있다. 다양한 종류의 부정이 있고, 그 부정을 덮기 위한 또다른 부정이 나타나고, 그 과정에서 부정을 무마하는 부정도 발휘된다. 부정한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서로를 오해하거나 미워한다. 누군가는 부정하게 힘을 얻어 부정하게 그 힘을 휘두른다. 그 사람들 역시 순식간에 다른 사람의 부정 때문에 몰락한다. 그런 일들이 지나갈수록 전통적 개념의 선악이 사라지고 딱 하나의 사실만 남는다. '모두가 공범'이라는 사실이.
이 이야기에서는 모두가 죄인이다. 그 사실은 <상처받은 영혼들>이 구조적으로 탐정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탐정이 없는 이 소설의 미스터리가 작동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소설 속 사람들은 자기의 상황에 맞춰서 못된 일을 하고 있다. 내 자신을 위해 못된 일을 한다는 명제 앞에서는 사회적 강자도 약자도, 직업윤리나 인간의 존엄도 없다.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부정과 죄를 저지른다. 알고 보면 못됐기 때문에 그 사실을 보여주기만 해도 이야기가 흘러간다. 명석한 방식이다.
이 두 요소를 합치면 '모두가 공범인 현대 러시아'라는 가설이 만들어진다. 러시아에 가거나 살아보지 않았으니 책 속에 묘사된 러시아를 전부 믿을 수는 없다(이 소설이 정말이라면 별로 안 가고 싶다). 다만 이 소설에서 표현되는 사람들의 모습엔 러시아를 넘어 현대 사회의 보편성이 있다. 늘 쉬운 방법을 찾고, 이기적으로 행동하고, 자신의 즉각적 욕망에 충실하고, 이기적인 즉각적 욕망을 위해 남에게 서슴없이 피해를 준다.
모두 이기적으로 쉽게 살기 위해 다투는 세상을 따라가다 보면 현대 사회의 더 깊은 불안을 만나게 된다. 이 소설에서는 전부가 공범이기 때문에 모두가 서로를 의심한다. 모두 죄를 지었고 그 죄가 알려지면 몰락하니까 서로를 의심할 수밖에. 작가 알리사 가니에바는 대담하게도 책의 말미에 이 책을 끌고 나간 부정적 에너지의 정체를 대놓고 써 뒀다. '중상모략과 밀고 바이러스는 집요하게 도시를 지켜보고 있었다.' 라고.
우리 모두가 각자의 죄를 짓고 죄를 지은 우리가 서로를 의심한다. 그 무한 공범과 무한 의심이 21세기의 정보기술과 결합되면 별로 생각하기 싫은 일들이 일어난다. <상처받은 영혼들> 곳곳에 일상적인 IT 기술이 만들어낸 악몽같은 사건들이 지뢰처럼 터져서 도시를 뒤흔들고 인간을 미치게 만든다. 이런 걸 보면 샌프란시스코 근교의 날씨 좋은 곳에 사는 IT 고소득자들이 '기술로 세상을 더 좋게 만든다'는 말이 새삼 허무해 보인다.
한국의 음향학 박사 이신렬은 '기술은 진화하는 것이고 세상은 변화하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상처받은 영혼들>은 그 말의 완벽한 예시처럼 보인다. 개별 인간이 성숙하지 않는 이상 기술 진화와 사회 진화는 아무 상관이 없다. 성숙하지 않은 사람들이 진화된 기술로 하는 일들이란 결국 감시와 의심과 헛소문 돌리기 뿐이다. 적당히 웃기는 상황들이 쿠션처럼 충격을 낮춰 주지만 <상처받은 영혼들>이 묘사하는 현대 사회는 슬프고 무시무시한 곳이다. 그러니 마지막 페이지의 마지막 문단까지 읽고 나면 정말로 이해하게 된다. 책 속의 가상 도시든, 진짜 사람이 머무르는 실제 도시든, 21세기의 도시를 사는 우리 모두 상처받은 영혼들이라는 걸.
<상처받은 영혼들>을 다 읽자 작가가 궁금해졌다. 어떤 분이시길래 이렇게 훌륭한 소설을 썼을까. 후기 엘러리 퀸 풍의 사회 관찰이 가미된 미스터리에 스콧 피츠제럴드 수준의 관찰과 묘사를 얹은 후 러시아풍의 엽기적 장면을 끼워 넣은 작가는 누구일까. 작가 알리사 가니에바는 1985년생 여성이다. 20세에 쓴 소설 <시조새의 비행>으로 바로 '문학 러시아상이 수여하는 가장 흥미로운 데뷔상'을 받았다. <가디언>은 2015년 '러시아의 30세 이하 파워 리스트 30명'을 뽑으며 알리사 가니에바를 9위에 놓았다. 기사에는 그를 두고 "지금 러시아에서 가장 흥미로운 작가 중 하나." 라고 했다. <상처받은 영혼들>만 봐도 그럴 법하다 싶다.
미스테리 전문지 <미스테리아> 26호에 실었던 서평입니다. 이 책 정말 재미있습니다. 작은 출판사의 러시아 서적이기 때문에 알려지기가 어렵습니다만, 한번 보면 멈추기 어려울 정도로 흥미롭습니다. 이런 책을 내는 출판사의 용단 때문에라도 더 많이 알려졌으면 좋겠습니다. 안 팔릴 걸 알면서도 좋은 걸 만드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깊은 존경이 있습니다.
알리사 가니에바의 소설은 '최고의 현대 러시아 소설 10'중 하나로 가디언에 한번 더 소개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