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틴 베크 시리즈 <사라진 소방차> 리뷰
올 여름에는 정신이 없었다. 일이 너무 많았다. 마르틴 베크 시리즈 서평 청탁 메일을 받았을 때도 나는 갓 이직한 새 회사의 사무실에 있었다. 아무리 바빠도 마르틴 베크 시리즈의 서평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나는 몇 가지 이유로 마르틴 베크 시리즈를 무척 좋아한다. 게다가 이 서평을 쓴다면 아직 출판되지 않은 마르틴 베크 시리즈의 5번째 책 <사라진 소방차> 원고까지 미리 볼 수 있었다. 한국어판 마르틴 베크 시리즈는 <로재나> <연기처럼 사라진 남자> <발코니에 선 남자> <웃는 경관> 그리고 곧 나올 <사라진 소방차>다. 나는 <로재나>와 <연기처럼 사라진 남자>를 읽었다. <사라진 소방차>는 내가 읽은 세 번째 마르틴 베크 시리즈다.
마르틴 베크 시리즈에서 가장 먼저 말하고 싶은 건 특유의 문체다. 마르틴 베크 시리즈의 문체는 아름다운 문장이라기보다는 회로도에 가깝다. 이 소설 안의 사건과 인물을 설명하는 문장들은 하나같이 기교가 없다(사실 이건 아주 숙련된 기교의 결과다). 일부 미스터리 소설에서 보이는 비현실적인 설정(이게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도 없다. 그리고 이런 문체를 택한 데에는 확실한 이유가 있다. 그 이유를 말하려면 미스테리 소설의 일반론을 잠깐은 말해야 한다.
미스터리 소설은 비슷한 구조를 취할 수밖에 없다. 미스테리라는 까다로운 매듭이 있다. 그 매듭은 맑은 날의 산처럼 처음부터 드러나 있을 수도, 아니면 주인공의 움직임에 따라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낼 때도 있다. 미스터리 소설 속의 모든 매듭은 주인공의 역량으로 풀려나갈 운명이다. 그 과정을 묘사하는 게 작가의 색깔인 동시에 능력이다. 거칠지만 이렇게 정리할 수도 있다. 미스테리 소설이 매듭이라면 작가의 능력은 크게 둘로 나뉜다. 하나. 매듭을 만들고 그 매듭을 보여주는 능력. 둘. 그 매듭이 풀리는 과정을 보여주는 능력.
마르틴 베크 시리즈에도 아주 멋진 미스테리라는 매듭이 있다. 마르틴 베크 시리즈의 매듭 역시 이들의 문장과도 비슷하다. 필요한 만큼의 사실만 있는 문장들이 미스테리라는 기판 안에서 작은 회로같은 역할을 한다. 그 작은 회로를 좇다 보면 미스테리라는 매듭이 조금씩 그 큰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주인공 마르틴 베크 씨를 비롯한 사람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특징을 발휘해서 각자의 회로를 찾아낸다. 그 사람들의 행동과 발견이 각자의 문장이 되고, 그 문장이 미스테리라는 정밀기계 안에서 각자의 역할을 해낸다. 마이 셰발과 페르 발뢰는 이 부분에서 명인에 가까운 솜씨를 보인다. 작아 보이는 사건들이 어느새 조금씩 덩치를 키우고, 그 안에서 스웨덴 사람들은 현실적으로 각자의 일을 하며 그 사건을 따라다닌다. 독서라는 형태로 그 과정을 지켜보는 건 무척 즐거운 일이다.
미스테리라는 매듭에서 또 하나 중요한 게 있다. 매듭의 모양과 매듭이 풀려나가는 모양도 중요하지만 '그 매듭이 왜 거기에 그 모습으로 있어야 하느냐'도 중요하다. 왜 독자는 셜록과 왓슨이 타고 다니는 런던의 마차를 따라다녀야 하는가? 왜 독자는 루 아처가 캘리포니아를 떠돌며 나누는 대화와 그의 상념을 지켜봐야 하는가? 대부분의 미스테리 작가는 이야기 자체를 매력적으로 만들어서 이 문제를 해결한다. 베이커 스트리트에서 시작한 셜록의 모험이 아직까지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이유도, 루 아처의 위험한 모험이 가치 있는 이유도 그것이다. 코난 도일과 로스 맥도날드를 비롯해 세상에는 미스테리와 그 해결 과정 자체를 매력적으로 묘사한 작가가 아주 많다. 그런데 마이 셰발과 페르 발뢰는 여기서 한발 더 나간다.
마르틴 베크 시리즈와 다른 미스테리 명작들과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목적이다. 여러 다른 미스테리 소설가와 달리 마이 셰발과 페르 발뢰가 마르틴 베크 시리즈를 만든 목적은 현대 스웨덴이라는 사회를 보여주기 위해서다. 채도가 높아서 경쾌한 파란색과 노란색 국기 이미지와는 달리 스웨덴에서도 여러 가지 인간을 절망하게 하는 구조적 문제가 있다. 원래 기자였던 마이 셰발과 페르 발뢰는 이런 문제의식을 깔아두고 스웨덴 사회를 표현하고 싶어했다.
보통 이럴 때 분노의 고발이라는 형식을 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분노의 고발은 이야기의 재미라는 면에서 보면 재미있기가 어렵고 이야기의 지속성에서 보면 수명이 길지 않다. 마이 셰발과 페르 발뢰는 스웨덴 사회의 문제를 보여주기 위해 미스테리 소설이라는 이야기 형식을 가져왔다. 꽤 세련된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마르틴 베크 시리즈가 특별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마르틴 베크 시리즈에는 스웨덴의 사회 묘사가 꼭 나온다. 스웨덴의 늦은 범죄처리, 스웨덴의 각 지역 사람들이 서로를 생각하는 방식, 스웨덴 사람들의 마음과 정신상태, 스웨덴의 질 나쁜 공기까지. 특히 주요 등장인물의 퇴근 후 생활이 굉장히 생생하다. 사실 범죄 현장 묘사보다 퇴근 후 생활 묘사가 더 생생할 때도 있다. 그러다 보면 가끔 '이건 지금까지 하던 이야기 회로와 어울리는 일들이 아닌데' 싶은 이야기가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그 요소들이야말로 두 작가가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였을지도, 그런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 아주 흥미로운 미스테리 소설을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우연이겠지만 목적이 달라서 결과가 달라진 스웨덴산이 또 있다. 자동차 볼보다. 다른 자동차들이 재빠른 움직임이나 과시적인 생김새를 내세울 때 볼보는 안전과 실용성이 중요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볼보 왜건은 짐이 많이 들어가고 내부 수납공간이 효율적이며 차를 몇 대씩 쌓아도 찌그러지지 않을 만큼 튼튼하다. 그렇다고 운전의 재미가 없지도 않다. 볼보 특유의 간결하면서도 풍성한 운전 감각은 튀지는 않아도 다른 브랜드와 확연히 다르다. 볼보 역시 다른 차처럼 4개의 바퀴와 멋진 디자인을 가진 차다. 그런데 타 보면 '이 차는 뭔가 출발선부터 달랐구나'싶은 게 느껴진다. 내게는 마르틴 베크 시리즈도 그렇다.
<고장난 소방차>에는 실제로 소방차가 나온다. 이야기 속의 소방차는 거대한 기판 안에서 작지만 중요한 역할을 하는 부품이다. 어느 날 어떤 건물에 불이 난다. 스웨덴 경찰들은 관료 특유의 경직성과 직업 특유의 관찰력을 이용해 천천히 사건을 따라간다. 느리지만 끝없이 이어지고, 사소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계속 뒤를 궁금하게 만드는 마르틴 베크 시리즈 특유의 리듬은 여기서도 여전하다.
소방차는 이 이야기 안에서 아주 작고 귀엽지만 결정적인 상징물이 된다. 그게 무엇인지, 어떻게 작고 귀여울 수도 있는데 결정적인 요소가 되는지는 읽어 봐야 알 수 있다. 여러분도 그걸 느꼈으면 좋겠다. 나 역시 피로와 업무에 시달리면서도 원고 파일을 스크롤하는 걸 멈출 수 없었다. 원고를 마무리하면 당장 <발코니에 선 남자>와 <웃는 경감>을 주문할 생각이다.
이 원고를 보낸지도 1년이 지났네요. 미스테리 전문 잡지 <미스테리아>에 보낸 글입니다. 추리소설을 좋아하기 때문에 이런 잡지에 글이 실리면 무척 기쁩니다. 물론 어디에든 실리는 건 기쁜 일입니다만, 기쁨의 종류가 조금은 다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