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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찬용 Dec 04. 2020

(코비드-19시대의)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

전염병 시대의 관혼상제- 2편

<네 번의~> 출연 당시의 휴 그랜트. 이분도 코비드-19에 걸렸다가 금방 회복되었다. 본문과는 아무 상관 없다. 하긴 이 글도 영화와 아무 상관이 없다.


코비드-19의 확산세가 길어지고 있었다. 당시 내가 다니던 회사도 재택근무에 들어가 일주일에 이틀만 출근하게 되었다. 주중의 5일 중 3일을 집에서 보내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전자레인지를 사고 인터넷을 설치했다. 이 집에 사는 동안 영영 하지 않을 것 같던 일이었다. 그러는 동안 오랜 친구가 집 앞으로 오기로 했다. 청첩장을 전하러.


그 친구는 뭘 하든 열심이었다. 같은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기억에 굉장히 가깝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도 꾸준히 만났던 그런 친구였다. 그 친구는 자기 마음같지 않은 일이 일어났을 때 늘 과감히 판단하고 빠르게 노력해서 상황을 벗어났다. 대학 전공이 마음에 들지 않자 전과했다. 전과한 전공도 어딘가 안 맞았는지 바짝 공부해서 다른 직군으로 넘어갔다.


10년 전 쯤 일이다. 어느 날 친구가 불쑥 메시지를 보냈다. "너 싱가포르 가봤어?" 마침 가봤다. 여행잡지에서 일할 때 몰디브에 가기 위해 3박4일 정도 머물렀다. 적어도 그만큼 본 싱가포르는 기분좋은 곳이었다. 본 대로만 말했다. 잠깐 가 봤는데 좋더라. 그 친구는 그 말을 듣고 싱가포르로 건너가 5년쯤 일하며 좋은 경력을 쌓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내 말 때문에 결심한 건 아니었을 거라 믿고 싶다.


한국에서 다시 만난 친구는 내심 걱정하는 듯 보였다. 친구는 여자고 나는 남자고 우리에게는 각자 다른 삶의 무게와 조건이 있었지만 적어도 그때 고민의 종류는 비슷했다. 결혼이었다. 내용도 깉았다. 결혼을 못하는 건 아닐까. 결혼이야 개인의 자유다. 다만 결혼을 못하는 건 아닐까 고민하는 것도 개인의 자유다. 우리의 작고 자유로운 걱정은 헌 집 콘크리트의 작은 균열처럼 조금씩 커지고 있었다. 친구와 나는 나이드는 틈틈이 한번씩 만나 신림동의 백순대같은 걸 먹으며 서로를 위로했다. 둘 다 술을 즐기지 않아 사이다나 미란다 오렌지같은 걸 곁들였다.


어느 날 이 친구가 여느 때처럼 불쑥 결혼을 한다는 사실을 알렸다. 한참 결혼을 못할 것 같다고 생각하던 때에 친구는 '결혼도 못하는데 내가 보고 싶은 거나 보자' 라는 생각으로 아프리카 대륙의 모 사막을 찾았다. 그 사막에 마침 한국 남자가 와 있었고, 몇 달 지나 그 남자와 결혼하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이번에도 너답구나 싶은 대단한 이야기였다.


우리는 그 이야기를 동네 근처의 사람 없는 어느 언덕에서 나눴다. 코비드-19 시대의 실내 카페가 내키지 않았고, 마침 그때는 밖에 앉아 있기에 덥지도 춥지도 않은 봄이기도 했다. 언덕에는 몇 그루의 큰 벚나무에 꽃이 가득 피어 있었다. 아주 옅은 분홍색 벚꽃을 바라보고, 친구 이야기를 들으며, 한 계절이 가는구나, 라고 생각했다.


지난번 결혼식에 이어 이번 결혼식 장소도 서초구였다. 올해는 서초구 결혼식이 많구나 싶었다. 질병의 긴장감이 조금 줄었는지 이때는 집에서 서초동까지 가는 길이 조금 더 막혔다. 평소와 비슷하게 한시간 쯤 걸렸던 것 같다. 지금 돌아보면 코비드-19가 그렇게 조금씩 일상이 되어가고 있었나 싶다.


지난 결혼식은 3월, 이번 결혼식은 4월이었다. 그 한달 사이에 방역 시스템이라는 게 만들어졌다는 걸 결혼식장 입구에서 실감했다. 동선은 하나로 통제됐고, 엘리베이터 앞에 열화상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려면 꼭 열화상 카메라를 지나쳐야 했다. 이제 마스크는 필수를 넘어선 상식이 됐고, 식장에 올라가서도 아무도 악수를 나누지 않았다.


결혼식장은 일반 결혼식장이 아니라 강당을 결혼식장으로 쓴 것이었다. 큰 무대 뒤로 그 주변을 관중석이 둘러싼 형태였다. 보통 결혼식장은 신랑측과 신부측의 자리를 알아보고 들어간다. 내가 아는 신랑, 신부측의 자리배치는 (하객이 식장에 들어갔을 때 시야 기준으로)왼쪽이 신랑, 오른쪽이 신부다. 매번 그렇지는 않기 때문에 헷갈리면 양측 자리에서 아는 얼굴을 찾아 그리로 간다. 그런데 그 결혼식장은 강당이었으니 좌우가 확실히 나뉘지 않았고, 다들 마스크를 쓰고 있으니까 얼굴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조금 머뭇거리다 적당히 중간쯤에 앉았다.


중간에 앉아 결혼식을 보고 있는데 앞 줄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마스크에 가려진 채 눈만 보이는 얼굴이 나를 돌아보았다. "너 박찬용이야?" 알고 보니 고등학교 졸업한 이후 처음 만난 친구였다. 거의 20년 만이다. 그러고 보니 그 옆에 앉아 계시던 분도 고등학교 친구였다.


원수가 아닐 바에야, 아니 원수라도, 20년만에 만난 친구라면 그간 안부를 묻고 서로 아는 사람들 근황만 이야기해도 20분쯤은 지나가는 게 결혼식의 재미 중 하나다. 다행히 나를 알아본 친구는 원수도 아니었다. 잠시 반가워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어디에 살고, 무슨 직장을 다니고, 결혼을 언제 해서 아이가 벌써 몇 살이고, 그런 이야기. 본의 아니게 내 나이를 한번 더 실감했다. '나와 같은 나이인데 그런 게 가능하구나' 같은 기분이랄까. 아무튼 친구는 좋아 보였다.


요즘 나는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잘 산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무척 기분이 좋다. 내가 여기저기 부딪히고 털리고 낡은 집에 돌아와 혼자 눈물을 흘리(지는 않지만 비슷한 기분이 들 때가 아주 가끔은 있다)는 동안 누군가는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린다고 생각하면 내 세계와는 상관없는 다른 곳에서 실체를 가진 안정과 평화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실감이 난다. 이렇게 말하면 어른인 척 좋아하는 사람들은 “정말 평화로운지는 알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 말도 맞다. 하지만 나는 남 보기에 평화롭게 꾸밀 수 있는 것도 아주 큰 성취라고 생각한다.


그날 식당에는 피로연장이 없었다. 비말 교환의 가능성을 막아버렸다는 점에서 합리적이면서도 과감한 선택이었다. 더 놀라운 건 식당을 마련하지 못했다며 건넨 답례품과 봉투였다. 답례품은 그렇다 쳐도 봉투엔 뭐가 들었을까, 아무 생각 없이 열었다가 흠칫 놀랐다. 봉투 안에는 약간의 현금과 함께 '식사를 못 대접해 죄송하니 이걸로 사드시라'는 종류의 문구가 적혀 있었다. 이거야말로 코비드-19 시대의 결혼이구나 싶었다.


그날 밥을 먹었다면 우리는 결혼식장에서 하는 이야기를 좀 더 많이 했을 것이다. 전화번호를 교환하거나 다 같이 있는 메신저 채팅방에 초대를 받았을지도 모른다. 그날은 그럴 일이 없었다. 20년만에 만난 우리는 그날따라 아주 날씨가 맑았던 서초동에서 서로 손을 흔들고 서로의 세계로 돌아갔다. 지금도 기억날 정도로 날씨가 맑은 날이었다.


다음 결혼식은 바로 그 다음 주말이었다.




앞서 해야 하는 일과 컨디션 관리의 난조로 연재가 며칠 늦었습니다. 몇 분이나 보실지는 모르겠지만 한 분이라도 기다리셨다면 죄송합니다. 강제성이 없으니 속절없이 늦어지네요. 이슬아 선생님같은 분들 정말 대단합니다. 돈을 받고 마감을 하면 그렇게 될 수 있겠다 싶지만 이걸로 돈을 받을 수도 없고, 저도 스스로에게 더 엄격해질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다음주부터는 화요일에 문제 없이 올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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