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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찬용 Dec 20. 2020

(코비드-19 시대의)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

04- 장례식

*영화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다.




영화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에서는 세 번째 결혼식이 후 장례식이 이어진다. 우연히 내게도 그런 일이 일어났다. 올해의 세 번째 결혼식 다음 관혼상제는 장례식이었다. 


상주는 몇 년 전 알게 되어 친해진 지인이었다. 15명이 모인 모임에서 서너명과 연락처를 주고받고, 그 중 한두명과 친해지는 게 30대의 인간관계다. 지인 역시 그런 식으로 친해진 사람이었다. 생각과 견해가 비슷하고 농담이 잘 통했다. 종종 만나 차를 마시거나 밥을 먹었다. 


조금 친해졌다 싶은 어느 날 그가 "사실은…" 이라고 이야기를 꺼냈다. 아버지께서 오랫동안 아프셨고, 차도가 있는 병이 아니며, 본인은 여러 가지를 이미 예상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할 때의 지인에게는 슬픔이 일상이 되어 담담해진 기운이 있었다. 지인은 "보통 이런 이야기를 꺼내면 분위기가 애매해지기 때문에 하지 않는데 어쩌다 보니 하게 됐네요." 라고 웃으며 이야기를 끝낼 줄 아는 품위와 존엄도 있었다. 


우리도 그런 나이가 됐다. 나이가 조금씩 들다 보면 어느새 장례라는 이벤트가 일상 속으로 들어온다. 우리는 늘어가는 주름과 삐걱거리는 관절에 익숙해지며 노화라는 걸 느끼고, 장례식에 초대받을 수록 죽음이라는 게 조금씩 마음에 스며들게 된다. 


나는 평생 성실하지 못했지만 왠지는 몰라도 장례에는 최대한 성실히 다녀오려 했다. 20대 때는 가서 며칠씩 일손을 돕기도 했다. 2002년 월드컵 8강전 한국:스페인 전에서도 나는 어딘가의 빈소에서 부침개를 구우며 20인치 TV로 한국이 월드컵 4강에 가는 걸 지켜보았다. 


재택근무가 일상이 된 어느날 지인에게 긴 메시지가 왔다. 농담을 자주 주고받던 평소와 달리 정중한 메시지였다. 메시지는 예상대로였다. 생각보다 조금 일찍 부친께서 세상을 떠나셨다고. 본인과 내가 이런 소식을 전할 만큼 친한 사이인지 잠깐 생각했는데 그냥 소식을 전한다고. 나도 곧 답을 보냈다. 소식 알려주셔서 감사하다고. 곧 뵙자고. 메시지를 보내고 관혼상제용 정장을 꺼냈다. 


서울에서 어른이 되는 건 이 도시의 주요 대형 병원 장례식장 구조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송파 아산병원, 수서 삼성병원, 반포 성모병원, 한남동 순천향병원같은 곳들에서 향을 피우고 육개장을 먹어보는 것이다. 그날 식장 역시 서대문구의 큰 종합병원 장례식장이었다. 몇 번 가봐서 익숙했다. 


코비드-19는 장례식장도 바꿔 놓았다. 나는 평소처럼 지하주차장 맨 아래층에 차를 댔다. 엘리베이터를 타니 평소와 달리 지하 2층으로 바로 갈 수 없었다. 보통 지하주차장과 바로 연결된 장례식장은 주차장에서 바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빈소까지 갈 수 있다. 반면 이때는 어디서 내리든 1층을 거쳐야 했다. 1층으로 올라가자 동선을 통제하며 체온을 재고 연락처를 적는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체온을 재고 주소를 적자 소매에 스마일 스티커를 붙여주었고, 그 스티커가 있어야 빈소로 들어갈 수 있었다. 


스티커는 샛노란 스마일 스티커였다. 그러고 보니 엘리베이터 벽에도 똑같은 스마일 스티커가 수십 개 붙어 있었다. 조문을 끝낸 사람들이 엘리베이터에 붙여 두고 나갔던 모양이었다. 추모의 공간에 스마일 스티커라니 대단한 센스인지 대단한 무신경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지. 나 역시 코비드-19 시대의 분위기에 맞추고 싶어서 마침 그곳에 있던 첨단 장치를 활용했다. 부의금 카드납부기였다. 


나는 이미 꽤 늦게 갔기 때문에 빈소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큰 예외를 빼면 발인 전날 밤 빈소 풍경은 어느 정도 비슷하다. 사람은 별로 없다. 장례식장에 나를 부른 사람과 닮은 친척들이 유전자의 힘을 증명하는 증거처럼 몇 명씩 앉아 있다. 그날 분위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평화로운 빈소에서 유달리 눈에 띄던 게 하나 있었다. 지인의 회사가 사원 복지 차원에서 보내준 일회용 식기였다. 보통 그런 일회용 식기에는 회사 로고가 인쇄되어 있다. 지인의 회사 로고는 유독 역동적인 편이다. 가라앉은 분위기 속 비닐을 깔아둔 밥상 위로 지인 회사의 역동적인 로고만 무대 조명처럼 도드라져 보였다. 


지인은 그 사이에 검은 옷을 입고 앉아 있었다. 장례식의 상주는 슬퍼할 틈이 없다. 슬퍼하고만 있기에는 해야 할 실무들이 너무 많다. 실무로의 장례식 역시 보통 일이 아니다. 누구에게 연락을 할 것이며, 반찬의 종류부터 망자의 관 소재까지에 이르는 여러 가지 의사결정들을 어떤 기준으로 선택할 것이며, 식장에 찾아온 사람들을 또 어떻게 인사할 것이며 등등. 지인은 여러 모로 큰 일을 치른 듯한 기운과 표정으로 앉아 있다 나를 맞았다. 마침 사람이 별로 없던 때라 한두시간쯤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아주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었던 것 같다. 본인의 친구 누가 왔다 갔고, 생각보다 조문객이 많이 와 주셔서 마음이 놓였고, 그런 이야기. 우리 모두 지금 무슨 마음인지같은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았다. 


어차피 그런 이야기는 굳이 말로 꺼내지 않아도 되었다. 어느 정도 살아 보면 세상에는 피할 수 없는 슬픔과 고통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때 해줄 수 있는 건 잠깐 찾아가서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를 나누는 것일지도 모른다. 특정한 단어나 문장으로 위로를 해주는 게 아니라 적당히 다른 이야기를 건네며 슬픔으로부터 잠시나마 고개를 돌릴 수 있게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다만 슬픔과 불가항력적인 무력감은 그 다음날 아침에 일어난 내게도 미묘한 근육통처럼 남아 있었다. 그럴 때 나도 가끔씩 내 부모님께 연락을 한다. 우리 집은 가족끼리 친근한 분위기가 아니라 연락을 하면 혹시 '뭔가 나쁜 일이 있나' 라는 긴장된 분위기가 있다. 나는 그런 게 아니고 그냥 안부라고 말했다. 평소에 친하지 않으면 가족이라도 딱히 할 이야기는 없다. 실패한 소개팅의 침묵같은 순간을 두어번쯤 맞고 나서 나는 이번에도 약간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 끊고 나서 생각했다. 잘 지내 줘서 다행이라고. 


"아주 신기한 일이 있었어요." 이 이야기를 올려도 되겠냐고 지인에게 물었을 때 지인이 말했다. 다른 결혼식 이야기는 본인의 허락 없이 그냥 올렸지만 아무래도 이 일은 본인에게 미리 공지를 해야 할 것 같아서 물어보았을 때였다. 지인은 감사하게도 허락을 해주며 이런 말을 남겼다. "아버지께서 새벽에 돌아가셨어요. 저는 당연히 이런 일이 처음이고요. 그런데 그때 마치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에 나올 법한 네 명의 중년 남자들이 오신 거에요.아무 말도 없이. 그 분들이 모든 절차를 아주 원활하게 처리해 주셨어요." 


알고 보니 그 분들은 성당에서 나오신 봉사자들이었다고 지인은 말했다. 지인의 모친께서 성당에 오래 다니셨는데, 그럴 때 활약하시는 봉사자들이 계신다고 했다. 직장 생활을 오래 하시다 은퇴하신 분들이라 장례같은 행정 절차와 의사결정에도 밝으시다는 것이었다. 


"정말 로만 카톨릭이 인류 최고의 브랜드인지도 모르겠어요." "그러게요. 인생의 중요한 순간에 대체 불가능한 호스피털리티 서비스를 제공하잖아요." "그렇네요. 이런 고객 경험을 한번 하고 나면 절대로 이탈하지 못할 텐데." 우리는 일견 신성 모독적인 방식으로 특정 종교에 찬사를 보냈다. 


영화 <네 번의~>에 나오는 장례식의 망자는 주인공의 친구다. 주인공과 함께 늘 결혼식에 초대받는 무리고, 늘 친구 무리 중 가장 화려한 옷을 입고 온다. 그 친구는 세 번째 결혼식에 초대받은 날도 아주 즐겁게 놀다가 심장마비로 급사한다. 장례식 추도문을 맡은 그의 연인은 가벼운 인사말을 한 후  W.H. 오든의 시 '장례식 블루스' 를 읽으며 추모를 대신한다. 


시계를 다 멈추고, 전화선을 끊고, 

개가 짖지 못하도록 기름진 뼈를 주고, 

피아노 연주를 끝내고 조문의 북을 두드려

관을 들이고, 조문객을 들어오게 하라.


머리 위로 비행기가 한탄하듯 선회하게 해서

하늘에 '그는 죽었다'는 메시지를 새겨라.    

동네 비둘기들의 흰 목에 검은 보타이를 감고,

교통경찰에게 검은 면 장갑을 끼게 하라.


그는 나의 북쪽, 나의 남쪽, 나의 동쪽과 서쪽이었고,

나의 일하는 평일과 나의 일요일 휴식이었고,

나의 정오, 나의 자정, 나의 이야기, 나의 노래였다; 

나는 사랑이 영원할 줄 알았다: 내가 틀렸다.


이제 별들은 필요없으니; 모두 다 꺼버리고,

달을 접어놓고 해는 해체하고,

바다를 쏟고 숲은 쓸어라; 

이제 어떤 것도 좋아지지 않을 테니까.


이런 영화를 보거나 시를 읽거나 살다 보면 깨닫게 된다. 삶과 죽음, 기쁨과 슬픔, 웃음과 눈물같은 건 뺨을 맞대듯 가까이 있다는 걸. 신성 모독과 찬사도 마찬가지겠지.




또 며칠 늦어졌다. 이것참 이 험한 세상에 이 정도 약속도 못 지켜서야. 면목 없다. 너른 양해 부탁드린다. 다음 주 게시물은 차질 없이 올리려 한다. 


시인 최영미가 W.H. 오든의 '장례식 블루스'에 대해 적은 이 있다. 이 글은 그의 책 <시를 읽는 오후>에도 실렸다. 게시물의 시는 원문을 참고해 내가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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