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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찬용 May 17. 2016

살아가는 것, 살아남는 것

아주 오래 산 생물의 책

스웨덴의 올드 치코. 1만 살에 가까운 나무.


칠레의 파슬리는 3천 살, 호주의 소나무는 1만 살, 유타 주의 사시나무는 8만 살, 그리스의 올리브나무는 3천살, 막내인 나미비아의 바오밥나무가 2천 살. 세상에는 사람의 시간 개념을 초월한 생명체들이 살고 있다. 거길 굳이 찾아가는 사람도 있다.


뉴욕의 레이첼 서스만은 나이가 2,000살 이상인 생명체를 찾아 전세계를 돌며 사진을 찍고 글을 쓴 걸 묶어서 책을 냈다. 제목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 산 생물(The oldest living things in the world)’. 2015년 6월에 [위대한 생존]이라는 제목의 한국어판도 나왔다. 나는 이 책은 크게 두 가지 부분에서 인상적인 요소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나는 당대적인 것, 하나는 시간을 초월한 것이다.


[위대한 생존]은 현대 창작물의 가장 큰 특징인 장르 통합의 한 예다. 서스만은 다양한 학문 영역을 적극적으로 결합시킨 후 사진으로 표현했다. 2천년 이상 살아온 생물을 찾아 사진을 찍는다는 건 멋진 이미지를 만드는 것 이전에 생물의 나이를 연구하는 다양한 방면의 학자와 과학적으로 교류해야 한다는 걸 뜻한다. 그 밖에도 귀한 생태학적 표본을 취재했다는 점에서 이 책의 저널리즘의 요소를 찾아낼 수도 있다. 텍스트로 한정하면 자신의 프로젝트를 찾아서 구체화시킨 기록 문학이자 자전적인 성장기이기도 하다. 예술과 과학과 저널리즘은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이 책처럼 아주 멋지게 합쳐질 수 있다.


이 작업의 기저에 21세기가 있다. 서스만은 우연한 계기로 오래된 생물에 관심을 갖긴 했는데 미술사를 석사까지 한 터라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식물과 생물학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대신 그녀에게는 구글이 있었다. 그녀는 대부분의 정보를 인터넷으로 찾았다. 검색으로 정보를 찾아 식물학자에게 이메일을 보내 인터넷에서 논문을 찾아 읽으며 지식을 습득했다. 칠레에 3,000년 된 파슬리가 있다는 사실은 플리커의 댓글로 알게 됐다. 지난 시대에 이런 프로젝트를 하려면 지금보다 훨씬 많은 노력과 예산과 시행착오가 필요했을 것이다. 전보다 효율적으로 전에는 할 수 없었던 융합을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위대한 생존]은 동시대적이다.


그녀가 찾아낸 생물의 종류와 모습은 우리 생각보다 더 다양하다. 흔히 생각하는 큰 나무 같은 건 고령 생물의 일부일 뿐이다. 남극의 이끼도 5천 살이 넘었고 유타 주의 허벅지만한 사시나무는 사실 8만 살이다. 젊은이들이 몸을 흔드는 이비자 섬 근처 해저에는 10만 년 된 해초들이 지금도 조류에 따라 흔들리고 있다. 


이 책의 사진도 멋있다. 한참 기억나는 사진들이 몇 장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 단위를 넘어 사는 생물이 사진에 담겨서인 것 같다. 그녀는 일부러 기원전에 태어난 생물, 즉 나이가 2천 살이 넘은 고령 생물만을 카메라에 담기로 했다. 인류의 문명보다 오래 되었기 때문이다. 서스만은 자신이 찍은 사진에 “인간의 통상적인 시간 개념을 훨씬 넘어선 시간 영역으로 우리를 연결시켜주는 생물들의 초상화”라는 표현을 붙였다. 조금 멋부린 느낌이 나지만 정확한 표현이다. 이 사진들을 찍겠다고 지구를 다 돌아다녔을 텐데 멋 좀 부리면 그것도 어떠냐 싶다.


우리가 식물은 아니지만 책에 나온 고령 생물을 보며 살아남는 법을 배울 수도 있다. 오래 살아남은 생물은 비슷하다. 구조가 단순하고 외진 곳에 살며 운이 좋다. 3천 살 된 호주의 스트로마톨라이트는 35억년 전이나 지금이나 구조적 차이가 거의 없다. 스트로마톨라이트는 호주 원주민과 대영제국이 어떤 충돌을 겪든 말든 돌과 생명체 사이 어딘가의 상태로 그 자리에서 살고 있다. 2천 살쯤 된  야레타가 사는 칠레의 아타카마 사막은 기상 관측을 시작한 이래 강수량이 0이었던 곳도 있다. 야레타는 그렇게 혹독한 오지에서 바다에서 오는 안개의 수분을 먹고 살아간다. 캘리포니아의 3,000m급 고산지대에 사는 브리슬콘 파인 군락지는 네바다 주의 핵 실험장과 고작 150km만 떨어져 있다. 바람이 반대 방향으로 불었다면 이 나무들의 5천 년 생명도 거기까지였을 것이다.


3천살 된 이끼 야레타.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되는 겁니다.


미국의 브리슬콘 파인. 바람이 반대로 분 덕분에 살아남았다.


이 책에는 미술 비평가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의 추천사 겸 에세이가 실려있다. 그 글에 의하면 서스만은 “예술가로서 내 역할은 답을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많은 질문들을 하는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녀는 이 프로젝트를 통해 무슨 답을 했을까? 서문에서 답의 요약본이라 할 만한 것을 찾을 수 있다.


“유기 생명체가 ‘지질학적’ 시간 단위를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러한 생명체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심원한 시간과 일상의 시간 사이를 자연스럽게 넘나들게 된다. (…)심원한 시간의 틀로 이 생명체들을 바라보면 큰 그림이 떠오른다. 우리는 이들이 층층이 품고 있는 이야기들을 생각해보게 되고, 그 이야기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되며, 그것들이 다시 우리와도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서스만의 말처럼 이 책은 하나의 거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죽는다. 그러므로 인류 문명보다 오래 살아온 이들을 마주했을 때 아무 생각도 들지 않기는 힘든 일이다. 우리가 문명을 쌓아 올리기 전 이 별의 모습은 어땠을까.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일까, 살아남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살아남았다는 것은 무엇일까. 사진 속 고령 생물이 건네는 존재론적인 질문이다.


남성지 <루엘>에 실렸던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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