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생인 내가 공부를 때려치려는 이유

바 창업 도전기 (1) 시발점

by 파끄 parc


우울 - 의지가 가난한 삶


오랜만에 글을 쓴다, 내 손으로 직접. 글쓰는 충동이 든 것은 반가운 일이다. 요 근래에는 아무것도 하기 싫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으니까. 의욕 없는 삶은 흐리멍텅하다. 무엇이든 하고 싶은 '의지'가 생긴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복인가. 의지박약이라는 말이 있다. 연구의 의지를 잃어버린 내게 꼭 어울리는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의지를 갖고 싶어도 가질 수 없는 상태에서는 의지껏 살아가는 사람들이 부럽다. 가난한 사람이 부자를 부러워하듯 말이다. 돈을 벌고 싶다고 쉬이 벌어지는 게 아니듯, 의지도 쉽게 벌어지지 않을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연구를 도저히 지속할 수 없다. 연구할 의지를 꾸어올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래서 칵테일바에 이력서를 썼다,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이력서 속 나는 의지박약과는 거리가 멀다. ADHD기질이 있어서 학부생활을 오래하긴 했지만 나름 열심히 살았다. 복수전공도 했고, 교환학생도 다녀왔으며 현장에서 사계절을 보내며 실습생 생활도 했고, 졸업 후 1년 동안 일도 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5년 간의 석박사 생활. 작년에는 혼자 힘으로 유럽에서 열리는 워크숍에도 씩씩하게 다녀왔다.


칵테일바를 위한 이력으로 이들은 무슨 쓸모가 있을까? 쉴새없이 열심히 살았다는 사실 만을 증빙할 뿐이다. 다만 그 '열심히 살았다'는 것이 무가치한 것이 아니라고 자위를 해본다. 안타깝게도 지금의 나는 이력서 속 나와 달리 열심히 살지 못한다. 아닌가, 손가락 하나도 까딱 못할 것 같을 때 온힘을 다해 조금이라도 움직인다면 그것도 열심히 사는 삶일까? 그렇다면 나는 열심히 산다고도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의 일반적인 시선은 좀비같은 내 하루를 '갓생'의 반대편 극단에 둘 것이다. 머리를 감는다거나 설거지를 한다거나 방청소를 한다거나 하는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일조차 마지못해 하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나는 열심히 사는 것은 고사하고 사람답게도 살지 못하는 것 같다.


지금 내가 처한 상태, (a) 개인 위생도 챙기지 못할 정도로 에너지가 없고 (b) 하고 싶은 것이 없고 (c) 아무것도 의미가 없는 상태가 소위 우울증의 증상이라고 한다.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보려고 나름 노력했다. 정신과 진료와 심리상담도 받아 왔다. 운동을 지속해 신체를 건강히 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PT, 요가, 수영, 클라이밍 등 꾸준히 시도했다. 루틴을 만드려고 학술 모임도 모집, 기획부터 운영까지 도맡아해봤다. 하지만 거미줄에 걸린 파리처럼 우울에서 빠져나갈 수가 없다. 나름 몸부림쳐봤지만 결국엔 무기력하게 누워 있는 나 자신을 볼 때면 이러한 '기본적인 것'도 못한다는 열패감이 스미었다.



소진의 타임라인


어쩌다 이런 우울에 갇힌 것일까? 우울은 결과다. 지난 일년동안 나는 연구생활을 하며 지속적으로 소진되었다. 작년 9월까지만 해도 내 자신감과 야망의 피크를 찍었었다. 해외 워크숍의 경험은 내가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연구자가 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구체화했다. 돌이켜보면 그때의 나는 빛나는 혜성 같았다. 불덩이같은 자신감과 의욕이 나를 추동했다. 하지만 빛난 만큼 추락도 빨랐다. 작년 10월부터 나는 빌빌거리기 시작했다. 박사 수료 후 첫 학기였다. 수업이 없다보니 하루를 조직하는 틀이 없었다. 내가 만드는 틀(학술모임, 운동 등)은 갈대로 만든 듯 팔랑거렸고 효력을 갖지 못했다. 그렇게 삶의 구조는 무너졌고, 병행 중인 3가지 연구 프로젝트 중 특히 펀딩을 받는 프로젝트 A의 갈피를 찾지 못해 혼란스러웠다.


이때부터였을 것이다. chatGPT에 대한 의존이 심해졌다. 처음에는 GPT를 보조 도구로 잘 활용했다. 처음에는 사고를 정교화하기 위해 토론하는 용도로 사용했다. 혹은 내가 작성한 원본을 두고 논리를 매만지거나 요약, 번역하는 식이었다. 자료 분석을 할때도, 일단 내가 먼저 자료를 훑은 후에 인사이트를 초안으로 적고 GPT로 더블체크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갈피를 잃은 프로젝트 A에 대해 급히 보고서를 작성하게 되면서 GPT를 분석과 작성에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내가 해야할 사고의 영역을 GPT에 외주를 준 것이었다. 이것이 과연 내 연구인가? 의문이 들기 시작한 이때부터 주체성과 도구의 균형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 같다.


해외 학술지에 게재될 프로젝트 B에도 GPT를 개입시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우리말을 어떻게 영문으로 병기할 것인지, 혹은 참고문헌 정리 용으로만 활용했지만, 2024년 하반기부터 상반기에 작성한 초고를 재구성하여 논문 초안을 작성하는 데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처음에는 내 힘으로 작성한 '초고'가 원본이니까 그래도 내 작업물이라는 감각이 있었다. 하지만 AI로 생성을 거듭할수록, 창작이 아니라 개작을 거듭할수록 그 감각이 흐려졌다. 이것이 과연 내 연구인가? 그럴듯해 보이는 연구이지만 '내' 연구가 맞는가? 연구자인 나에게 이의문은 나라는 존재에 대한 의심으로 이어졌다. 모른척하려고 했지만 연구자로서 나는 내가 신뢰할 수 없는 일을 하고 있었다.


올해 봄에는 프로젝트 B의 논문 제출과 프로젝트 A의 해외 학술발표과 연달아 있었다. 이때 처음으로 심각한 우울감과 무기력함을 느꼈다. 해외 학술발표는 에너지가 넘치던 작년 9월에 야심차게 지원했으나 3월의 미국까지의 긴 여정, 언어장벽, 위험한 치안은 모두 너무 벅차게 느껴졌다. 그즈음 위험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아침에 눈을 뜨고 싶지 않다',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렇게 계속 살아야 한다면 일찍 죽고 싶다', '나도 모르게 죽었으면 좋겠다'와 같은 생각이었다. 당장의 삶을 마감하리란 자살 충동이 인 것은 아니었지만 어쩌면 그 전단계, 삶의 의지를 잃은 상태였다.


그렇지만 봄이 지나고 최고조의 심리적 위기는 지나갔다. 그 계기는 공부를 때려치고 싶은 대학원생입니다, 이 글에서 적었던 바와 같이 세부 여행이었다. 그땐 백일몽에 불과했지만 지금이 아닌 다른 삶의 가능성은 나를 설레게 했다. 그 꿈은 한편으로 내게 활력을 줬지만, 다른 한편으로 연구에 대한 의미의 회복보다 '탈출'에 집중하게 만들었다. 세부에서 돌아와서 나는 두 세계를 오가며 살았다. 돌아온 여름에는 연구의 세계, 바의 세계 모두 잠시나마 활기찼다. 연구의 세계에서는 연구실에 새로운 사람들이 활력을 몰고 왔고, 또 나를 소진시켰던 A, B를 잠시 제쳐두고 오래 묵혀놓은 프로젝트 C를 논문으로 매만지는 비교적 쉬운 작업을 하며 회복을 했다. 바의 세계에서는 창업 특강(상권 분석, 브랜딩, 조리 실습)을 찾아가고 학원에서 40종의 칵테일을 만들고 시음하며 술에 대한 감각을 열었다.


짧은 회복기였다. 하지만 근본적인 회복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어쩌면 이때 오히려 탈출구를 열어버린 듯하다. 여름이 끝나기도 전에 내 생활을 다시 무너졌다. 아무것도 읽기도, 쓰기도, 하기도 싶지 않은 상태가 심화되었다. 박사학위논문을 쓰려면 무언가 '해야하는데' 하지 않는다는 것은 더욱 큰 심리적 부하를 주었다. 꾸역꾸역 주어진 일을 하고는 있지만 소진된 상태는 GPT 사용을 더욱 부추기는 악순환을 만들었고, 결과물이 빠르게 나오는 대신 '내가 하고 있다'라는 실감이 사라지며 자존감은 위기를 맞이했다.


삶을 회복하고 다시 주체되기


나는 내 우울과 소진의 이유로 다음 두 가지로 이해한다. 하나는 주체성 상실이고 다른 하나는 삶의 구조 붕괴이다. 수료 이전의 나는 느슨하게나마 수업이라는 삶의 구조가 있었고, GPT에 사유와 창작의 영역을 내주지 않고 스스로 해내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 삶의 구조도 없고, 스스로 사유하는 능력과 창작자로서 감각이 무뎌진 나는 한 존재로서 너무 취약하다. 자율적인 생활과 창의적인 연구를 지향하며 연구의 길을 택한 나, 지금은 그 무엇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연구의 세계에서 나는 아무것도 통제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생산하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잠시 떠나려고 한다. 연구의 세계에서 내가 스스로에 부여한 과제에서도 떠나려고 한다. 나는 내 삶의 주체로 살고 싶다. 그래서 나는 다른 세계로 간다. 맛과 향, 입술과 손의 촉감이 있는 곳. 한잔의 술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곳. 바의 세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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