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의 바깥)

2021.11.22

by 파끄 parc

청계천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나는 원색의 빨강과 파랑이 회오리치는 청계광장의 거대한 다슬기가 생각난다. 혹은 연말, 샛노랗거나 새빨갛거나 새파란 등불이 띄워져 빛이 일렁이는 야경이 떠오른다. 나는 그 네온사인 같은 청계천에는 별로 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었다. 굳이 그 시각적 과잉을 감상하기 위해 회색 콘크리트 속 물길을 걷는다고? 생각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춥고 지치는 일이었다.

6ffb70ad-81b8-4de0-8804-91a09ef078f4.JPG 출처: 한국관광공사


타의로 청계천을 걷게 되었다. 출발점은 용답역. 내가 가진 청계천의 이미지는 청계광장, 종로, 을지로 사이 어딘가 였는데, 이번에 내가 가는 청계천은 그 '청계천'의 바깥이었다.


늦가을 오후 세시 반. 청계천의 하류인 용답역에서 내가 알던 '청계천'으로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각인된 이미지로서 '청계천'보다 훨씬 넓은 유역에 서쪽에서 비친 오후의 햇살이 반짝거리고 있었고, 터줏대감 버드나무들도 품을 충분히 가진 채 녹색 머리카락을 흔들고 있었다. 상류의 숨막히게 가파른 회색 옹벽 대신 푸릇푸릇한 덩굴이 빼곡하게 채색하는 동쪽 옹벽이 있었고, 그 너머 2호선 철도를 가려주었다. 포장된 길과 물 사이의 충분한 들판이 공간을 급하지 않게 전이시켜주고 있었다. 물가 바로 위에는 포장된 길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오솔길이 있었는데, 이 흙길에서 내 발이 점유하는 공간은 아주 작았지만 내가 경험할 수 있는 범위는 아주 넓었다. 나는 노랗게 반짝이는 산벚나무의 손바닥만한 잎을 만져도 보고, 버드나무의 머릿결 사이를 지나도 보고, 물가의 징검다리를 건너며 돌을 덮은 이끼를 기웃거려도 보고, 멀리 고가도로와 철도가 향하는 경로를 눈으로 좇아도 보고, 발 밑에 납작하게 포복한 잡추와 갈색으로 부시시한 줄기들을 밟아도 보고, 잎은 다 떨구고 무거운 감을 아슬아슬히 달고 있는 감나무를 보고, 커나라 플라타너스 낙엽을 맞아 기뻐하는 동행을 축하하고, 하늘을 보고, 하늘에 비치는 물을 보았다.


IMG_8357.jpg 출처: 본인

나는 청계천 바깥의 청계천을 걸었다. 이 청계천은 그 '청계천'처럼 좁지도 춥지도 번잡스럽지도 않았다. gif 이미지처럼 틀 속에서만 왕복운동을 하던 흐름은, 이제 틀 너머 현실로 흐르고 있었다. 바로 여기에서 물은 해의 움직임, 살아 있는 다른 존재들의 움직임, 그리고 나의 움직임과 함께 시시각각 일렁이며 흐른다. 내가 걸은 청계천은 산세와 대화하며 한양의 북에서 남으로, 서에서 동으로 흘러내려온 커다란 물줄기로서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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