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08.
빗방울이 물오른 단풍을 하나씩 물고 떨어진다. 단풍이 늘어선 거리의 풍경은 가을비와 함께 계절의 저편, 우산의 저편으로 사라진다. 시선은 낮아지고 빗길에 발걸음은 조심스러워진다. 이런 날만큼은 우리는 '땅을 보고 걷는 아이'가 되고, 거리의 풍경보다 바닥의 풍경에 가까워진다.
내려다 본 바닥은 비로 인해 더 짙어져 있고, 역시 비로 인해 더 빛나는 나뭇잎이 어린 아이가 찍은 스탬프처럼 소란하게 찍혀있다. 경의선숲길에는 가을과 겨울에도 고집스레 나뭇잎을 붙들고 있는 대왕참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는데, 비는 대왕참나무 단풍들도 가차없이 데리고 내려왔다. 바닥의 삐쭉삐쭉한 붉은 대왕참나무 나뭇잎 사이로 완만한 곡선을 가진 노란 은행나무와 갈색의 느릅나무 잎이 섞이며 식생의 변주를 알려준다. 공룡과 새의 발자국이 뒤섞인 화석지같아 보이기도 한다.
빗방울에 몸을 쉽게 내맡기는 나무들이 심어진 곳에서 바닥의 풍경은 푹신푹신하다. 수북히 쌓인 낙엽으로 인해 바닥은 볼륨감을 가진다. 효창공원앞역과 공덕역의 가운데에 있는 벤치에서 헐벗은 느릅나무에서 떨어진 잎들은 사각거리며 서로 치대는 마사돌들을 진정시킨다. 벚나무길의 거리의 풍경은 얌전하게 나란한 나무들이 안정감을 주지만, 바닥에는 노란색부터 빨간색까지 다양한 그라데이션을 가진 벚나무잎들이 광채를 내며 어지러이 흩어져 있다.
오늘의 종착지, 홍대입구역에서 걸음을 마무리할 때, 고래 꼬리지느러미같기도 하고 고양이의 앉은 모습같기도 한 거대한 튤립나무 잎이 경의선숲길의 마지막 스탬프를 찍는다.
일년에 하루, 가을비가 단풍들을 물어 떨어뜨리는 날에 우리는 바닥의 풍경을 걷는다. 멀리 나아갈 수 없는 시선은 발밑에 닿고 발은 다양한 잎과 포장재들의 물성을 뚜벅거리며 느껴나간다. 이따금 고개를 들어 본 거리의 풍경은 이전보다 축축하고 매끈하고 까끌까끌하고 무엇보다 생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