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리가 완벽하면 모두를 쉽게 이끌 수 있을까?
편입 준비를 하는 학생이 있다. 그의 제 1의 목표는 무엇일까? 대학에 가서 학문을 하는 것? 대기업 취직? 목표들이 엮여있는 중심에는 '학교 순위'가 있을 것이다. 혹자는 이렇게 자신의 비교에서 나오는 열등감을 고상한 포장지로 감춰보고는 한다. ‘원하는 학문을 배우기 위해...’ 과연 선택의 순간 오로지 학문만을 생각해 선택을 할까? 그것이 아니라면 학교의 설립 배경과 교육이념에 감명을 받아 특별히 그 학교에 가고 싶어진 걸까? 그들의 마음 최밑단 본성은 무엇을 위해 에너지를 내어줄까? 스스로는 답을 내렸지만 나 역시 고상한 태도를 유지하기 위해 이 질문의 결말을 짓지 않겠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인간 본성을 포기하는 것, 포크로 허벅지를 찔러 잠을 억누르고 생커피를 씹어 먹는 행동은 마치 액션 영화 주인공이 '인간병기'가 되기 위 한 수련 장면처럼 비치고는 했다. 그리고 나는 그 모습을 동경해 버렸다. 수련을 위해 핸드폰 번호를 바꾸고 칩거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내가 속한 사회에서 홀연히 사라져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한정된 시간이 인간관계로 소모되지 않고 오로지 나에대한 투자만 이루어지니 사회 속 유흥을 절제하지 않는 그들보다 한 수 앞설수 있는 진리를 터득했다고 생각하며 수험생활을 시간을 합리화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격리를 마치고 대학 사회로 돌아오게 된 나는 돌연 동아리에 들어가게 된다. 성이 차지 않았는지 동아리를 만든 후 운영을 위해 시간을 기꺼이 쓰게 된다. 이전 논리였다면 비효율적이며 기민하지 못해 남들보다 더 많은 일을 하는 '손실'을 스스로 입는 일이다. 또한 결국 주변 몇 명만 남게 된다는 순리를 아직 몰라 일을 떠맡는 '어리숙함'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여러 동아리를 거치며 관계들이 어떻게 이어지는지 봐온터라 모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대체 무슨 생각인 것일까?
2년간의 수험생활로 외로웠던 걸까?
아니라면 인내심이 바닥나 인간 본성을 통제하지 못하는 나약한 사람이 된 것일까? 고루한 공부에 비해 사람을 만나고 노는 일이 그저 쉽고 재미있어서? 자기가 한 말을 지키지 못하고 상황에 굴복해 태도를 바꾸는 것이 비겁함으로 취급받는 '힙합씬'에서 일컷는 아무 철학이나 신념이 없는 사람 '노바뱀'(노선 바꾼 뱀)이라 불릴만한 발자취를 남기게 된다.
내가 변한 이유는 나만 알고, 나만이 버틸 수 있다고 믿 은 성공 알고리즘에 오류를 발견하면서 시작되었다.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 심지어 가소성으로 인해 뇌까지 진화한다고 취급되는 인간의 메커니즘을 믿었지만 예 상보다 내가 할 수 있는 총량은 정해져 있었다. 물론, 커 피콩을 씹어 먹으면서 공부를 하는 사람도 있는데 의지력의 패배 아니냐? 라고 묻는다면 공부를 정복한 사람이 아니기에 할말은 없다. 한 가지 실마리를 대자면 사법고시를 합격한 유휘운 변호사님의 유튜브에 나와있다. 지금은 16시간을 공부하는 사람이 차고 넘치지만 2007년 당시 공스타그램이 없었을 때에는 고시 합격자 들의 평균 공부시간이 8시간 내외였다고 한다. 즉, 사회에 속해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이 목표 달성과 상충관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나약함으로 비칠 일이었지만 유튜브가 발달 된 시대를 살아 유휘운 변호사님의 통찰을 전해 들어 변하게 되었다. 인간의 복잡한 메커니즘을 x값(책상 앞 시간)만 조정하면 되는 이차방정식의 규모로 생각했던것이 오히려 볼품없는 생각이 아닐까?
'사람이 논리적으로 설득이 돼?' 누군가에겐 답변을 고민할 것도 없는 당연한 질문일 수 있다.
이 말은 방시혁 의장이 가수 박진영에게 한 말인데 그는 이 질문을 듣고 20년의 생각 끝에 '사람은 논리적으로 설득이 안된다' 라는 답을 찾았다고 한다. 논리를 맹신하던 나는 비로소 어떤 말을 하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겨우 감으로만 느낀 그 세계가 불가지론처럼 실제 한다는 것을 확인받았다. 동아리를 이끌 리더십이란 퍼즐을 완성시키려 계속해서 다른 논리 조각만을 찾아 조급하게 대입한 내 행동이 본질을 찾지 못했던 이유를 마주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