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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마흔앓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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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망별 Jan 22. 2021

퇴사의 미학

회사가 내 삶의 부품일 뿐

"아니, 마흔이면 한창 일할 나이잖아. 쉬고 싶으면 휴가를 좀 길게 쓰던지. 아무튼 다시 생각해봐!"


퇴사를 하고 좀 쉬고 싶다는 나에게 상사가 했던 말이다.


"저 10년 동안 단 한 달도 쉬어 본적 없이 열심히 일했어요. 마흔이니까 잠깐 쉬어가고 싶어요. 앞으로 20년은 더 일해야 할 것 같으니까요."


라는 나의 대답에 상사는 한번 더 미끼를 던진다.


"그래... 알겠어. 그래 고생했어. 이 조직에서 여자 팀장이 얼마나 어려워. 그 어려운 걸 했는데, 이제 임원 돼야 하지 않겠어? 자, 보자.... (2초간의 고뇌) 그래. 당신 13년만 더 있으면 그래 임원 되겠네! 이 기회를 버릴 건가?"


어랏. 이게 미끼야, 엿이야.


13년은  뭐지? 5, 10, 15, 20 아니고, 13이라는 구체적 숫자는 어디에서 가져온 것이냐. 13일의 금요일밖에 생각이  나는데. 그렇다면 이것은 저주...?


"아하하하하하..... 네에.......?? , 괜찮습니다.

저는 이제 퇴사를....."


나의 반응은 전.혀. 예상할 수 없던 것이라는 듯한 묘한 표정의 상사는 마지막 진실의 카드를 꺼냈다.


"거참. 그럼 당장 돌아가는 A프로젝트는 어떻게 하라고. 나가더라도 그건 끝내고 가."


그제야 나는 안도했다. 그래. 회사란 이런 것이지.

기계 돌아가고 있는 도중에 부품은 못 바꾸는 거니까.


그리하여 A프로젝트를 다 마치고 퇴사 이야기를 꺼낸 지 6개월 후,


2020년 12월 31일 나는 퇴사를 했다.


내 나이 마흔의 마지막 날이었다.






필자는 전문직 여성이고, 기혼이고, 무자녀(향후 계획도 없다)다. 그렇다 보니 흔히들 말하는 '일중독'에 가까운 삶을 살아왔다. 내가 주도했든 주도하지 않았든 현상은 분명 그러했다. 당연한 것 같았고, 아무렇지 않았다.


10년 정도 조직 생활을 하면서, 그 안에서 '일중독' 여자로 살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인지 회사가 나를 필요로 하면 보람이 있었고, 회사가 나를 챙겨주지 않으면 결핍이 생겨 불안했으며, 회사 구성원들의 말과 행동이 내 신경들을 모두 장악해 버려서 내 판단보다 그들의 판단이 나를 규명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매일 회사 욕을 하면서도 매일 출근을 하고, 월급이니 복지니 불만 투성이지만 외부 사람들이 회사 욕하면 "저기요, 잠깐 만여!! 설명 좀 듣고 가실게요!!" 하는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이고, 상사의 뒷담화를 꽃피우기 일쑤지만, 그 상사가 칭찬해주면 '어우야~ 뭘 또'하며 헤벌쭉해졌다. 무서울 정도로 자연스럽게 스스로를 회사라는 세상의 하나의 부품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 같았다.


이제 퇴사한 지 대충 한 달쯤이다.

한창 좋을 때여서 조금 들떠있는 생각일 수는 있으나, 어쨌건 퇴사는 필자에게 미학이 되었다.


<가치로서의 美>


퇴사하자, 나의 삶이 온전히 나에게 돌아왔다.


조직 안에 존재하는 내가 아닌, 내 안에 어떤 조직들이 존재하고 있던 것이고, 내 삶의 일부 부품으로 그 조직들이 존재한다는 당연한 사실을 강풍에 밀려온 파도가 바위에 사정없이 부딪쳐 깨지듯이 번뜩 깨달았다. 내 삶은 너무 넓고, 너무 깊고, 너무 다양하다는 것을 10년의 '일중독'을 끊자 느낄 수 있게 된 것이다.


<현상으로서의 美>


물 멍, 불멍, 온갖 '멍'들이 판을 치고 있지만, '퇴사멍-'이야 말로 진정한 '멍 때리기'다. 


내일 처리할 일을 고민하지 않고 잠드는 밤의 그 안도감이란 청심환 같아서 가족들에게 그렇게 나긋해질 수가 없다. 내 맘 같지 않은 사람들의 다양한 험담을 듣지 않아도 되고, 오롯이 내 편인 가족들과 친구들에게만 둘러 싸여 있으니 심장에서 혈액과 함께 피톤치드가 샘솟아 마음의 해충들을 다 박멸시키고 있다.





"그래서 이제부터 쉬면 뭐할 건가?"


퇴사 당일 상사가 물었다.


"가정주부요!! 남편 내조 좀 해주고 싶어요."


라는 여유 넘치는(아니, 넘쳐 보이는) 대답을 했다.


"뭐? 워킹우먼은 원래 가정주부가 겸직 아니었어?"


13년에 이은 빅엿인가?


에이 설마 농담이겠지.... 아닐 수도.

이 자.. 설마 진심인가?


"아하. 그렇다면, 전.업.주.부."


"?..... 그래..."

.

.

.


훗. 좋았어. 괜찮았어.


내 나이 마흔의 마지막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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