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을 향한 1년의 카운트다운
교환학생을 통해 한국으로 돌아가려고 한 나의 야심 찬 계획이 좌절되고 나서는 다른 방법 없이 파리에서 3학년 과정을 보내야 했다. 피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니 더 하기 싫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냥 3학년 파리에서 할게. 그렇지만 이거하고 한국 갈게." 내 마음속에 새겨진 말이었다.
3학년쯤 되니 이제 학교를 다니는 건 어느 정도 도가 트였다. 처음에는 상상도 못 했던 전략을 발견했는데, 첫 번째 수업을 듣고 나서 과제가 어렵다 싶으면 다른 수업으로 돌리는 것이었다. 이전까지는 수업을 바꾸는 것 자체가 너무 피곤해서 좀 버텨보다가 그냥 드롭해 버렸는데, 이제 개강 후 초반 2-3주는 계속해서 수강신청 변경이 가능함을 깨닫고 좀 더 수월하게 갈 수 있는 길을 찾기 시작했다. 학교 시스템의 작은 틈새를 발견하는 순간, 파리에서의 학업은 조금 덜 버거워졌다.
그렇게 열심히 시간표를 구성했지만, 기본적으로 발표와 시험들이 깔려있는 건 피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뭐 미술사학과 내내 쭉 가지고 온 숙명이었기 때문에 받아들였다. 나는 어느 정도 '고인 물'처럼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처음부터 이 시스템에 적응이 되었으면 참 수월했을 텐데. 학기가 시작되고 모든 해야 할 일이 정해지고 나서는 리스트를 만들어서 하나씩 지워가면서 미션 클리어해 나갔다. 게임의 퀘스트를 깨나 가는 느낌이었다. 물론 게임처럼 재미있지는 않았다.
3학년은 다른 학교에서 다른 과를 공부하다가 편입한 학생들도 있어서 신선했다. 학과마다 글쓰기 방법이 조금씩 달랐는지 새로 간략하게 알려주는 교수님들도 계셨다. 미술사를 전공했던 친구들하고 아닌 친구들하고 발표 같은 데에서 특색이 다른 걸 발견하는 건 좀 재미있었다. 이런 것들을 보고 깨닫게 된 것 자체도 내가 많이 적응했다는 반증 같아서 기뻤다.
나는 남은 1년의 과정이 정말 지긋지긋했지만 이것만 하면 끝난다는 단 하나의 희망을 가지고 꿋꿋하게 헤쳐나갔다. 그리고 선경이라는 동갑내기 친구를 만나서 또 서로 의지하고 정보를 공유해 가면서 수업에 잘 참여할 수 있었다. 프랑스에서, 특히 나처럼 늦게 유학을 시작한 경우에는 동갑을 만나기 정말 쉽지 않았다. 소중한 존재였다.
내 세부 전공인 현대미술 외에 고대, 중세, 근대 미술 중에 전공 수업 하나를 선택해야 했는데, 나는 근대 시기 과목인 '프랑스의 르네상스' 과목을 선택해서 들었다. 교실에서 이루어지는 TD수업은 당시 박사생들이 강사(chargé)로서 들어와서 수업을 진행했는데, 그중 한 분이 한국인이었다. 나는 한국인의 수업을 고르는 게 이득일지 그 반대일지 알 수 없어서 선택하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선택한 수업 강사가 개인적인 일로 초반 세 번의 수업을 동료인 한국인 강사분한테 맡겼다. 운명이란 참 묘한 것이다. 그 덕에 한국인 강사의 수업을 살짝 들을 수 있었고, 인사를 하게 되고 따로 밖에서 만나면서 여러 가지 조언들을 들을 수 있었다.
그분은 우리 대학에서 학사부터 시작해서 박사까지 쭉 미술사 외길로 학업을 진행하는 사람이었다. 내가 선택한 수업의 강사와 그때부터 친구라는 얘기도 전해 들었다. 매 시간 맨 앞자리에 앉아서 수업을 들었고, 공부하다가 체력이 달려 학교에서 쓰러졌는데 조금 후에 깨어나서는 도서관에 공부하러 갔다고 했다. 당연히 집에 가서 쉬어야 하는 것 아닌가? 열정이 대단하다는 생각뿐이었다. 이런 사람이 박사를 하는 거구나. 나는 이 전공이 재미있었지만 박사까지는 할 의지를 갖고 있지 않았는데, 이런 일화들을 들으면서 점점 연구자의 길과는 더 멀어지는 느낌이었다. 학문의 세계는 때로 너무나 가파른 헌신을 요구했다.
3학년 과정이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주어진 미션을 깨나 가면서 헤쳐나갔다. 왜 이렇게 표현을 하냐면, 그때의 하루하루가 구체적으로 기억이 잘 나지는 않기 때문이다. 수업에 갔다가 집까지 산책 겸 걸어오고, 집에 와서는 과제를 하고. 자료가 필요하면 도서관에 들렀다가 오고. 선경 씨랑 같이 수업을 듣는 날이면 함께 얘기를 나누면서 걸어오고. 그 외엔 딱히 만나는 친구도 별로 없었다. 코로나가 한참 심했던 2020년, 거의 모든 친구들이 한국에 다 돌아가버렸다. 물론 나도 돌아간 사람 중 하나이지만 다시 돌아오고 나니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팬데믹은 유학생들의 커뮤니티를 흩어놓았고, 남은 이들에겐 더 큰 고립감을 안겼다.
그래도 이전에 있었던 우울감이 다시 올라오지는 않았다. 견디기 지루한 일상이었지만 곧 끝난다는 느낌이 있었고 하고 있는 과정들이 '도저히 못하겠다'는 압박감이 있지는 않았기 때문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새로 만난 인연이라든지 그때 함께했던 소수의 친구들, 그리고 내 주변을 둘러싼 모든 것들이 나를 도와주고 있었다. 학교 외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 평화로웠다. 일 년을 잘 마치고 한국에 돌아가기 위한 준비가 차곡차곡 진행되고 있었다.
단순한 생존이 아닌 작은 성장의 시간이었다. 서울대 교환학생의 좌절에서 시작된 이 3학년 과정은 당시에는 피하고 싶었던 숙제였지만, 돌이켜보면 내게 필요했던 성숙의 과정, 완성의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저 꿋꿋이 버티는 것도 때로는 의미 있는 성취가 된다. 파리의 미술사학과 3학년 과정을 마치며, 나는 그 어느 때보다 한국으로 돌아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