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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길숙 Nov 16. 2021

마.침.내

눈물 열매가 맺었네요 


몇 번 늦가을 비 오더니 마침내 스러질 것 모두 스러진 뒤 눈물 열매가 맺히네요. 벗이 보내준 '등가시 버섯' 이 내 눈물 같아서 써놓고 보니 나이 탓인지 <마침내>라는 말뜻이 가물가물합니다. 사전을 들춰 봤더니, 마침내; 어떤 경과가 있은 후 마지막에 이르러~~라고 나오네요.  올해 나는 어떤 경과를 거쳐 지금에 이르렀나 잠시 생각해 봅니다.   

촌각을 다투며 제가 선택한 길은 언제나 급행. 그래서 어떤 경과를 거쳤는지 잘 모르겠어요. 그냥 죽기 살기로 기를 쓰고 달렸을 뿐, 그래서 올해 나의 열매는 노란 '등가시 버섯'처럼 애처롭습니다. 그러고 보니 나랑 닮은 게 또 있네요.

외로움과 쓸쓸함을 저보다 더 많이 지녔을 것 같은 여주 사는 벗이 보내준 사진, 사진 속 남루한 은행잎과 열매가 '이게 너다'라고 말해줘 안심이 됩니다. 아무도 눈길 주지 않은 이 꼬랑내 나는 열매 한 알 맺기 위해 죽기 살기로 용을 썼을 나무를 생각하면, 급행 전동차를 타고 달린 나의 한 해는 분에 넘치는 호사(豪奢)였습니다. 

바람이 혼자 힘으로 새로 닦아 놓은 이 길이 저를 유혹합니다. 새해는 급행 말고 일반 전동열차도 좀 타보라고요. 보여도 잡을 수 없는 아지랑이를 쫒지 말라고요. 그래서 새해에는 말을 좀 잘 듣겠다 작심합니다. 

바람. 길. 산. 하늘. 강물. 별. 나무 말을 잘 들으면 지리산 벗이 보내 준 이 '애기 꼬막 버섯'처럼 저도 좀 예뻐지겠다 싶은 생각이 문득 듭니다. 미리 새해 결심을 세우고 나니 서둘러 숙제를 한 아이처럼 제 맘이 의젓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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