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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피 Feb 05. 2021

07 나는 아름다운 삶을 살고 있는가?

/ 설국의 우울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로 시작하는 소설 ‘설국’. 가와바타 야스나리(1899~1972년)는 이 소설을 1937년 발표하고 인도의 시인 '타고르' 이후, 1968년 아시아에선 두 번째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도쿄에서 한 시간 정도의 거리인 니가타현 에치고유자와에 직접 머물며 <설국>을 집필하였다고 한다.

<설국>을 집필했던 '다카한 료칸' - 야후 재팬

눈과 온천의 고장 니가타를 배경으로 하는 <설국>은 무용 연구가인 시마무라가 설국(니가타)에 도착한 후 게이샤 '고마코'와 또 다른 여인 '요코'를 만나면서 시작된다. '고마코'는 몇 년간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시마무라'를 좋아하는 관능적인 게이샤로 '요코'는 병약한 '유키오'를 돌보는 순수한 미소녀로 그려진다.

<설국>은 줄거리로 읽는 소설이 아니다. 눈과 열정적인 사랑을 배경으로 한 편의 시를 읽는다는 표현이 더 옳을 수도 있다. 어쩌면 '읽는다'라기보다 '본다'라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이미지가 강한 서정성을 가지고 있다. 주인공들의 심리 표현을 위주로 '눈'이라는 자연과 삶의 '허무'에 관해 섬세하게 다루고 있다.


스웨덴 한림원은 '일본인 마음의 정수를 뛰어난 감수성으로 표현했다'며 노벨문학상 선정 이유를 밝힌다. 시상식에서의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모습도 꽤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그는 수상의 기쁨과 고마움을 뒤로한 채 '아름다운 일본의 나'라는 제목의 수상문을 발표한다. 이는 26년 후 같은 장소에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오에 겐자부로'의 수상문 '모호한 일본의 나'와 비교되며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기도 했다.

노벨상 수상 관련 기사 - 아사히 신문

가와바타는 부유한 집안의 영재였다. 하지만 5살 이전에 부모님을 여의게 되고 15살 나이에 조부모와 누이까지 잃게 된다. 그의 초년기는 암울한 터널처럼 외로움의 연속이었다. 1924년 도쿄 제국대학을 졸업한 그는 이후 본격적인 문학가의 길을 걷게 된다. 어릴 적 외로움을 글로써 표현하며 일본 특유의 감성을 그려낸다. <설국>보다 이전에 발표된 <이즈의 무희>(1926년)를 비롯해서 <천 마리 학>(1952년), <산소리>(1954년)등 수많은 명작을 집필했다.

1970년 팬클럽 회원들을 위해 한국에 방문하기도 했던 그는 1972년 4월 16일 가스를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자살에 대한 분분한 의견이 있지만 그를 스승으로 모셨던 극우파 미시마 유키오(소설 ‘금각사’의 저자)의 할복자살 영향이 컸다고 한다. 생전의 그는 정치적 색깔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80년 전 가와바타의 감성은 여전히 일본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유미주의(唯美主義)라고 평가할 수 있을 정도로 비현실적 미(美)를 추구하는 감각적 문장은 일본 특유의 미의식을 완성하였다. 이는 현대 일본의 대표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에서도 느낄 수 있다.


아름다움은 치명적 외로움을 동반하기도 한다. 깨끗함은 오래지 않아 그 순결함을 잃게 되기 쉽다. 세상은 그러한 것일지 모른다. 온전한 것을 인정하기 싫어하고 무언가를 덧씌워서 같은 무리에 넣어야 직성이 풀리듯.

일본인은 미의 추구함에 있어 병적인 집착을 보인다. 겉으로 보이는 것에 지독한 예의를 지키려 한다. 나는 이를 극단적 개인주의라 생각한다. ‘절대로 타인에게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라는 생각이 배려에 의해서가 아닌 ‘난 너의 일에 전혀 신경 쓰고 싶지 않아!’의 모습으로 보인다. 미(美)에 대한 생각 또한 지나칠 정도로 겉모습을 의식하는 사회적 유전자가 배어 있어서 그런 건 아닌가 생각한다.  


혼네(本音)와 다테마에(建前), 이는 일본인의 성격을 대표하는 단어이다. 속마음과 겉모습이 다름을 표현한 말이다. 엄숙함 속에서 자유롭지 못한 그들의 삶은 한편으로 안쓰럽기까지 한다. 그들의 아름다움에는 욕망에 대한 절제와 고독이 동반되어 있는 듯하다.

지나친 절제는 개인주의로 전환되었고 타인의 일상은 구경거리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이웃이 사라진 것이다. 사라진 건 이웃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대화의 상대가 사라졌고 홀로인 것에 익숙해져야 했다. 안타까운 것은 요즘 한국 사회도 그 길로 접어들고 있지 않은가 라는 생각이다. 친구는 많지만 대화는 부족해졌다. 풍요로워지는 물질보다 공허해지는 마음 더 커져만 간다. 어떻게 보면 우리나라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문명화된 현대 사회의 부작용인 듯도 하다.


한국이든 일본이든 다양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기에 단정 지어 그 사회를 규정지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자살률은 OECD 국가 중 최악이다. 행복한 사회가 아니라는 방증일 것이다. 활력 넘치는 한국 사회를 암울하게 하는 지표이다. 코로나 19는 백신으로 잡을 수 있지만 '마음'에 관한 치료약은 그 사회 구성원의 관심과 애정이 필요할 것이다.

정제된 아름다움은 산뜻한 느낌을 준다. 잘 가꿔진 정원이나 조각품을 보듯 보는 눈을 즐겁게 한다. 그러나, 오래가지는 못하는 것 같다. 인위적 아름다움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퇴색되어 버린다. 아름다움은 진정성을 담보로 해야만 한다. 쭈글쭈글한 할머니의 얼굴에도 거친 아빠의 손등에도 아름다움이 보이는 건 그들 삶 속에 스며든 '진심'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삶이 아름답기 위해서는 이러한 '진심'이 필요하다. 연인과의 사랑도, 타인에 대한 배려에도, 특히 자신에 대한 애착에서도 투명한 마음이 필요하다. 그래야 오래간다.

그런데, 나는 그런 아름다운 삶을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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