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엘피 Feb 04. 2021

06 눈을 뜬다는 것이 공포 그 자체다

/ 아침의 우울

침대에서...    


밑 둥에 가라앉은 시간의 파편들, 날마다 일어서는 불안의 기억은 그것에 찔리고 피를 내어도 삶의 공간 안으로 끌려가고 만다. 반복된 일상이 똬리를 틀기 시작했다. 안개도 접었다 피기를 반복하고 축축한 햇빛은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배열된다.

굳게 지쳐간 어제의 게으름을 이기지 못한 채, 반쯤 감은 눈에 과거는 재생되고 무던히 기다린 자명종을 누르며 무쇠 같은 홑이불에서 빠져나온다. 침침한 세상에 눈을 뜨며 흙빛의 아침이 다가서는 때이다.

언제 끓였을지 모를 탁한 보리차 한 모금으로 숨을 토하며 습관 된 리모컨은 제 채널을 틀어놓는다. 웅얼거리는 뉴스는 별 귀 기울임과 편식 없이 주절이 내 귀에 담아 둔다. 모르는 이에게 들킬지 모르는 무지를 잠재우려 매시간 재단된 정보를 흡입하며 텅 빈 뇌 안을 채우곤 한다.   

비스듬히 가린 선명한 커튼, 밖은 분주함에 익숙한 자전의 공간이다. 타인의 도움 없이 자생의 힘으로 움직이는. 나태함이 두려운 나는 그들과 엮이기 위해 침대를 벗어 세면대를 향한다. 밤새 인내했을 우울을 벗겨내듯 닦고 또 닦는다. 잠시라도 가면을 써야 하루를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온전히 내 것으로 나가기엔 하루가 너무 길다. 양면으로 접은 나와 같은 또 다른 나는 한편으로 타협도 하고 그들을 따라가기도 할 것이다. 아마 그것이 생의 9할은 될 것이다. 마치 진짜의 나인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나머지 1할은 알고 있다. 진지하게 그건 내가 아님을. 그래서 나는 나를 부정하게 된다.         


욕실에서...  


벗겨낸 것이 살갗인지 허물인지 모르겠다. 옳고 그름 또한 잊은 지 오래다. 규칙적인 순서에 맞게 어제와 오늘, 내일도 벗겨낼 것이다. 거품은 더러움을 덮는 위선 같다. 비벼도 비벼도 줄지 않는 흰색의 찌꺼기.

어릴 적엔 비눗물이 눈 속으로 귀 속으로 들어오는 것이 너무 무서웠다. 금방이라도 나를 덮쳐 어둠의 지옥에 내칠 것만 같았다. 허겁지겁 물바가지를 끼얹으며 지옥 불으로부터 벗어나려 애썼다. 그때의 공포가 남은 것인지 거품 속 두 눈은 여전히 온 힘을 다해 감고 있다.

나의 약점은 거품 안에 숨겨져 있다. 한숨과 불안도 거품 안에 쓸려 보낸다. 어른이 되면서 거품의 공포는 공포스러운 거품으로 변질되어 갔다. 내 대신 거품을 핑계로 여러 불필요한 사항과 사람을 정리했다. 그때마다 샤워기로 더 큰 거품을 내어 씻어내야만 했다.

어제 아침과 똑같은 우울마저도 이 거품에 씻겨내겠지만 오늘 하루 생길 새로운 우울은 나를 또 찌들게 할 것이다. 내일 더 큰 거품을 내어 또다시 그들을 지우려 할 것이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만 가는 병은 치유하기 힘든 멍에일까? 하수구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흰 거품을 보며 의지와 상관없는 일상, 알지 못하는 누군가와 섞이는 일, 나는 두렵다.     


거울을 보며...   

명색의 이놈은 늘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터럭 하나 놓는 법 없이 나의 모두를 적나라하게 간파하고 있다. 이 녀석의 유일한 약점은 수증기이다. 그래서 난 한 여름에도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며 이 놈의 눈을 가리려 했다. 뿌연 시선 너머 그가 나를 보려 할 때마다 나는 나를 감추려 더 더운 공기를 쏟아부어야 했다.

감추려 한 것이 육체뿐 만은 아니었다. 타인에게 내내 숨겨왔던 초라한 마음들, 처음인 것에 대한 두려움과 객기에 가득 찼던 친구들과의 대화, 소심함을 숨기기 위한 당당한 목소리의 위선들... 무엇보다 스스로는 부끄러워했던 과거를 화려하게 읊어대는 자신에 관한 이야기.

적어도 나 자신에게만은 솔직해야 한다. 이를 지키지 못하는 순간 외로움을 느끼게 된다. 오직 나만의 편이 되어온 나 자신마저 속이게 되면 더 이상 지켜줄 무엇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

나를 기만하는 순간 우울은 찾아온다. 외로움과 함께 우울이 온다. 때로는 벌거벗은 마음으로  보는 연습이 필요하다. 나를 완전한 것에 머무는 상상으로 유혹하지 말아야 하고 존재하지 않는 것에 소유의 욕구 또한 없애야 한다.

욕망이야 말로 우울의 최고의 친구이다. 거울 안의 나를 지켜보며 가진 것 없는 나를 주시하라. 스스로 알게 될 때까지 매일 나를 지켜보라. 타인은 나를 가르쳐주지만 나는 나를 스스로를 알게 해 줄 수 있다.

알게 된다는 것, 이는 전부를 가질 수 있는 특권의 말이다. 나를 알게 된다면 나의 모두를 가질 수 있게 된다. 세상에서 나 전체를 오롯이 가질 수 있는 이가 몇이나 될까? 설령 완전히 알 수 없게 된다 하더라도 일정 부분 이해는 가능할 수 있다. 조금이라도 내가 나를 이해한다면 외로움도 우울도 그 안에 녹일 수 있을 법을 알게 된다.   

거울이라는 적은 친구도 될 수 있다. 어떻게 그를 대하느냐에 따라 나의 우울은 사라질 수 있다. 가끔은 거울에게 나를 보여 주며 스스로에 주문을 걸어 보자. 머지않아 수증기 없이도 샤워를 하며 그와 같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지하철에서... 

차창을 보는 내 얼굴엔 슬픔이 고인다. 검고 회색의 창, 그 너머 다음을 두려워하는 나는 서 있고 지그시 노려보는 타인도 서 있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어깨를 본받아 더는 처질 수 없는 나약한 모습으로 초점 없이 화장품 광고를 읽고 있다. 피부를 보호하는 화장품이란다.  

무관한 것들과 거리를 갖고 싶지만 어쩔 수 없는 부딪침으로 숨결에 옷깃에 살갗에 기분 나쁜 인연들이 묻어오고 있다. 툭툭, 얄팍한 눈짓으로 다가오는 것들을 털어내려 해도, 그럴수록 내 눈 안엔 외로움만 고일뿐이다. 싫음도 좋음도 다 내 마음의 탓인지라 이젠 그들과의 접촉 또한 포기하고 말았다.

접힌 옷깃 사이로 또 다른 역겨움도 복제되어 간다. 내 것이 아닌 것들에 대한 거부감으로 질식될 것만 같다. 한두 명이 아니다. 나와 같은 이들로 주위는 가득 차 있으며 모두 이 좁디좁은 차 안을 벗어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그러나 모두 목적지에 다다를 때까지 묵묵히 인내하며 새까만 차창만 바라 볼뿐이다.

어쩜 우울도 인내와의 싸움일 수 있다. 모두에게 전이된 외로움이 누군가에겐 에너지로 또 누군가에겐 우울로 발현되는 것 같다. 조울증을 둘로 나눠 분배한 듯.

끝내 인내의 한계를 넘어서게 되는 순간 우리는 병적인 집착에 이르고 만다. 지하철은 늘 어둡고 좁고 빽빽하다. 병적인 집착은 나를 긴 터널 안으로 쫓아내어 더는 헤어 나올 수 없는 지옥으로 인도하는 듯하다.

시간의 흐름으로 존재는 다른 생각을 잉태하고 만다. 어제와 오늘의 나는 변하지만 시간에 연명하는 삶의 흐름은 늘 같은 종착역에 부딪치고 마는 것도 모르고, 띄엄띄엄 그렇게 인생의 경험으로 삶은 형성되고 나는 지하철 안에서 어제와 같은 생각을 반복하고 만다.

사람을 두려워할수록 우울은 커져버린다. 컴컴한 창가 밖으로 고정하고 무관하듯 던지는 시선도 끝내 타인의 존재를 인식한 결과일 뿐 내 안엔 과거의 경험만이 추측을 대체할 뿐이다. 그래서 공감의 이웃이 필요한지 모른다. 공감에 동의하는 타인이 생기면 우울은 사라진다. 우울의 가장 큰 적이 친구이다. 말하고 듣고 동의하는 즐거움에 우울은 쇠약해진다.  

무리 안에 각기 혼자인 지하철. 그 안에도 다수는 나와 같은 편이다. 드러내지 않을 뿐, 단지 참고 있을 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05. 우울은 죽음을 대신하는 증상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