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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르망 Sep 11. 2022

추석을 보내는 각자의 방법

2022년 9월 10일의 기록

2021.10.28 / 경주 / sony a7r2 / sony 55mm f1.8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면 '추석이 정확히 며칠이었더라'하며 달력을 뒤적이곤 했다. 추석 연휴 날을 확인하고 나면 이상한 압박감에 사로잡혔다. 친척들과 그리 살갑게 지내지 않는 나로서는 추석마다 시골 할머니 댁에 가는 걸음이 달갑지만은 않았다. 할머니 댁이 차로 1시간 거리인 군위라 물리적인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지만 심리적인 거리만큼은 어느 지역보다 멀게 느껴졌다. 어릴 적에는 괜히 나에게 시비를 거는 사촌 형이 싫었다. 갈 때마다 학폭을 당하는 것처럼 관심 폭력을 당해야 했다. 가 잘 살아가는 꼴을 못 보는 사람처럼 약점을 발견하려 노력했고 그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결혼을 하고 나서는 구일이가 친척들의 오지랖 넓은 관심을 감당하는 걸 보기가 싫었다. 관심 폭력을 당하는 건 나 하나로 족하다.


우리 집은 소위 말하는 남성 우월주의와 꼰대 문화가 정착한 집안이다. 이름도, 족보도 모르는 고조 고조할아버지의 산소에 찾아가기 위해 1시간 동안 등산을 하고 벌초를 한다. 28년 만에 처음으로 추석에 제주도 여행 갔고 추석날 할머니 댁에 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작 5살 터울의 사촌 형에게 전화로 싫은 소리를 들어야 했다. 2022년인 지금도 끼니 준비와 정리는 여자들의 몫이고, 남자들은 거실에서 편안하게, 여자들은 부엌에 옹기종기 모여 식사를 해야만 한다. 형수인 어머니에게 '물 좀 가져다주쇼'라고 말하는 막내 삼촌을 보며 그 작고 옹졸한 입을 한 번 때려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 때도 있다. 어머니 아버지가 극혐 꼰대 문화를 배우지 못한 게 참 다행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를 코로나19더 이상 친척들이 명절 때마다 모이지 않게 된 지도 어느덧 햇수로 3년이다. 명절 때마다 양가 부모님만 찾아뵙고 간단한 식사를 하니 명절이 이렇게나 기다려질 수 없다. 명절 연휴는 드디어 연휴라는 진정한 의미를 되찾게 되었다. 추석 당일인 오늘, 청도의 한 카페에서 고구마라테를 먹으며 구일이와 함께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니 지금 풍겨오는 가을비료 냄새도 구수하게만 느껴진다.


30대 중반의 나이가 되다 보니 주변에 결혼한 커플이 많아지면서 결혼 후 명절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보내는 커플들을 볼 수 있다. 요즘은 명절을 치르는 절차가 워낙 간소화되다 보니 명절마다 문제가 되었던 고리타분한 갈등은 거의 찾아볼 수 없지만 그래도 여전히 명절은 다양한 사람이 모여 함께 지내는 행사이다 보니 갈등이 완벽히 없어질 수는 없다.


배우자가 기독교 집안이라 '명절마다 여행을 갈 수 있겠구나'속단했던 친구는 맏며느리로써 친척 어르신들의 식사를 준비하고 오랜만에 모인 어르신들의 수많은 질문에 힘겹게 대응 중이다. 명절 때마다 해외여행을 하던 한 친구는 결혼 후 해외여행은 물론 국내여행도 하지 못하고 여러 불편한 어른들 앞에서 불편한 자세로 불편한 명절을 나고 있다. '내 친구는 이번 추석에 스페인 여행을 갔다던데, 우리도 어머님 아버님께 말씀드려 해외여행 한 번 가자.'라고 말하는 아내들의 간절함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명절은 친척 어른들을 찾아뵙는 날이라고 교육받은 남편들은 관성 때문인지 그런 말을 선 듯 꺼내기가 두렵다.


명절 당일 카페에 와 글을 쓰다 보니 가족단위의 카페 이용객들이 참 많이 보인다. 이렇게 카페에서 도란도란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며 명절을 평화롭게 지내는 집안이 있는가 하면, 며느리 혹은 누군가의 희생을 갈아 넣어 조상님들의 평안만을 바라며 명절을 보내는 집안도 있다.


언제부터 명절이 누군가에게 스트레스의 대명사가 되었을까 생각해본다. 내가 명절을 아주 극혐 했던 시절을 돌이켜보면 아주 단순한 이유 때문에 명절이 그런 오명을 가지게 된 것이 아닐까 한다. 명절은 누군가에게 '싫어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일을 억지로 해야만 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시류에 따라가지 못하고 본인만 정체하다 보면 결국 시대에 역행하게 된다. 모든 세대가 행복한 명절을 보내기 위해서는 어른들부터 바뀌어가는 시대의 흐름에 맞추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내년에는 형이나 너나 한 사람은 벌초에 꼭 따라오너라'라는 아버지의 말에 대답 대신 '요즘은 돈을 주면 전문가들이 산소를 관리해 준대요'라고 동문서답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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