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면 초록은 더 짙어져
비가 오는 날이면 나는 창가에 선다
창문에 귀를 가만히 기울이면
세상의 가장 낮은 소리들이 들려온다
젖은 나뭇잎 위로
꿈의 파편들이 천천히 흩어내리고
밤새 말 없이 견뎌온 이름 모를 마음이
조금씩 물을 머금는다
거리의 초록은 어제보다 짙어지고
나는 잠시 그 초록을 바라보다 문득 멈춘다
이 많은 여름을 지나며
한 번이라도 이 짙음을 받아들인 적 있었던가
빛과 물과 숨결이 뒤섞인
이 다정한 무성함을, 정면으로 마주한 적
겨울의 어느 밤, 우리는 손을 잡고 있었다
숨결 말고는 의지할 것이 없던 밤
한숨만으로 이어지던 대화
뜨거운 계절엔 체온조차 견디기 어려워
햇살 아래 서로를 밀어내다 멈추던 발걸음
그러나 끝내 놓지 않았던 손
미움 속에서도 스미던 무언가를
나는 오늘의 초록 앞에서 되짚는다
마음이라는 건
계절처럼 달아오르다 식는 것이 아니라
한없이 미루다 마침내 도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조용히 감사한다
이만큼의 무더위를 견뎌준 기억에게
한때 우리의 것이었던 계절에게
그리고 기도한다
여름이 다 지나면
좀 더 준비된 겨울이 오기를
그때 다시 누군가의 손을 잡을 수 있기를
놓친 것은 많았지만
돌아오는 길 또한 있다는 것을
우리의 마음은 알고 있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