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짙은 초록을 지나며

비가 오면 초록은 더 짙어져

by 박 스테파노

비가 오는 날이면 나는 창가에 선다

창문에 귀를 가만히 기울이면

세상의 가장 낮은 소리들이 들려온다


젖은 나뭇잎 위로

꿈의 파편들이 천천히 흩어내리고

밤새 말 없이 견뎌온 이름 모를 마음이

조금씩 물을 머금는다


거리의 초록은 어제보다 짙어지고

나는 잠시 그 초록을 바라보다 문득 멈춘다


이 많은 여름을 지나며

한 번이라도 이 짙음을 받아들인 적 있었던가

빛과 물과 숨결이 뒤섞인

이 다정한 무성함을, 정면으로 마주한 적


겨울의 어느 밤, 우리는 손을 잡고 있었다

숨결 말고는 의지할 것이 없던 밤

한숨만으로 이어지던 대화

뜨거운 계절엔 체온조차 견디기 어려워

햇살 아래 서로를 밀어내다 멈추던 발걸음


그러나 끝내 놓지 않았던 손

미움 속에서도 스미던 무언가를

나는 오늘의 초록 앞에서 되짚는다


마음이라는 건

계절처럼 달아오르다 식는 것이 아니라

한없이 미루다 마침내 도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조용히 감사한다

이만큼의 무더위를 견뎌준 기억에게

한때 우리의 것이었던 계절에게


그리고 기도한다

여름이 다 지나면

좀 더 준비된 겨울이 오기를

그때 다시 누군가의 손을 잡을 수 있기를


놓친 것은 많았지만

돌아오는 길 또한 있다는 것을

우리의 마음은 알고 있었기를


비 오는 날이면. Sora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글쎄, 라는 대답의 끝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