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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마흔에게, 지금의 쉰이

마흔의 자기애, 고독하고 위험한 사랑

by 박 스테파노

최근 들어 타인의 글들을 자주 읽는다. 전문적 비평이나 논문 속에서는 화자의 흔적이 빠르게 지워진다. 논리와 논거가 전면에 서고, 사유의 문장이 서로 부딪치며 스스로 의미를 구축한다. 필자 개인의 삶이나 정체성은 배경으로 밀려나고, 오직 ‘글’ 그 자체가 발화의 중심이 된다. 이런 익명성의 글쓰기야말로 순수 문학이 지향하는 한 형태의 품격일지도 모른다. 글쓴이가 아니라 문장이, 말하는 주체가 아니라 사유가 남는 상태.


그에 비해, 자기 중심의 이야기들은 훨씬 더 노골적인 질감을 지닌다. 그중에서도 인상 깊게 다가오는 두 가지 양상이 있다. 하나는 이른바 ‘마흔 전지전능병’이라 부를 만한 현상이다. 나이 마흔 즈음이 주는 묘한 도취가 있다. 그것은 생물학적 이행기의 문제라기보다, 인생의 절반을 돌파했다는 자각에서 비롯된 감정이다. 군대식 표현으로 치면 ‘꺾인 짬밥’의 시기. 경험한 날들이 앞으로 남은 날들보다 적어지는 시점이다. 이 경계에서 사람은 자신의 경험을 일종의 통찰로 착각하기 쉽다. 마흔이 되면 세상이 보인다고, 젊음의 어리석음을 이제는 초월했다고 말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나이 마흔을 그렇게 단정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인간은 미성숙의 시간, 자아 미발현의 시간을 지구상 그 어떤 종보다 길게 지닌 존재다. 반려견은 두 살이면 젊잖은 기색을 조금 남긴 채 이미 성체가 되지만, 인간은 스무 해가 지나도 여전히 미완의 세계를 헤맨다. 시대가 흐르고 기대수명이 길어지며, 자본 격차로 독립의 시점이 점점 늦춰진 지금, 성숙의 시간은 더 뒤로 밀려나고 있다. 그럼에도 마흔 언저리의 어떤 이들은 마치 세상의 이치를 꿰뚫은 듯한 스승의 언어로로 말한다. “마흔까지 살아보니 젊음이란 이렇더라”는 식으로, 때로는 인생 전체를 규정하고 품평한다. 나 또한 그랬다. 십여 년 전, 그 허세의 나날 한가운데에 있었다.


어른이 된다는 착각. AI Sora


또 다른 양상은 자기애와 현실의 괴리가 벌어질 때 나타난다. ‘등장인물 가득한 일상의 나열’이 그것이다. 그런 글에서 타인은 언제나 수식어와 함께 등장한다. “유명한”, “성공한”, “평가받는”, “한 자리하는” 사람들. 그 화려한 이름들을 지워내면, 글에는 남는 것이 거의 없다. 타인의 명성과 평판을 자신의 거울로 삼아 후광을 얻으려는 심리, 그것은 애처롭고 동시에 낯설게 공명한다.


내가 마흔이던 시절, 나를 포함한 많은 친구들이 그 병에 깊이 빠져 있었다. 명함의 무게와 잔고의 숫자가 자존감의 단위가 되던 때였다. 친구의 개업식에서 그가 우리를 소개하던 장면이 아직도 선명하다. 은사나 업계의 인사들을 거쳐, 초등학교 친구였던 우리에게까지 수식어가 붙었다. “서울대 법대 출신 변호사”, “의대 나온 성형외과 원장”, “대기업 임원.” 어느 이름에도 ‘친구’라는 단어는 없었다.


그때 느꼈던 묘한 감정은 오래도록 내 안에 가라앉아 있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그 자리의 나 역시 그 소개를 탐탁지 않아 하면서도 은근히 즐기고 있었다. 그 빛이 내게까지 비추는 듯한 착각. 내가 속한 이름과 직책으로 내 존재를 부풀리던 시절. 그리고 저물어가던 선배들을 향해 은근히 연민 섞인 우월감을 품었던 기억. 잠깐의 반짝임을 마치 전능함인 양 착각했던 그 시절의 나.


돌이켜보면 그것은 모두 ‘자기애’의 다른 얼굴이었다. 타인을 통해 나를 확인하고, 관계를 통해 스스로의 존재를 확증하려는 욕망. 그 욕망이 너무도 인간적이라 변명하고 싶지만, 동시에 그것이 얼마나 공허한 반사광이었는지도 이제는 안다. 사랑과 존중, 헌신의 이름으로 포장된 자기애는 결국 자신을 증명하려는 몸짓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 허상의 열기는 식은 뒤, 남은 것은 부끄럽지만 한결 선명해진 자화상 한 장뿐이었다.



자기애는 고독하고 위험한 사랑


‘자기애’라는 말에는 미묘한 함정이 있다. 겉으로는 자존감의 다른 이름처럼 들리지만, 그 안에는 스스로를 둘러싼 환상의 막이 얇게 깔려 있다. 오토 컨버그가 말했듯, 자기애적 인격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도 끊임없이 자신을 중심에 세운다. 스스로를 과도하게 확장된 존재로 느끼며, 동시에 타인의 찬사를 갈망한다. 그 모순된 욕망 속에서 이들은 자신만의 완벽함을 믿고 싶어 하며, 그 믿음이 흔들릴 때는 분노와 절망이 교차한다. 자기 혹은 이상화된 대상에 대한 환상은 그들의 정신이 견딜 수 있는 만큼의 병리적 강도를 띤다. 그때 나타나는 감정의 스펙트럼은 의기양양함에서 실망, 우울, 그리고 ‘자기애적 격노’(narcissistic rage)라 불리는 파괴적 분노에까지 이른다.


이 정서의 결은 단순한 자존감의 문제와는 다르다. 자기애는 종종 헌신과 희생의 얼굴을 쓴다. 사랑의 이름으로, 혹은 돌봄의 이름으로 타인을 향하지만, 그 시선의 초점은 언제나 ‘나’에게 머문다. 중요한 것은 상대가 아니라, 그러한 나의 모습이다. 내가 얼마나 주는 사람인지, 얼마나 순수한 마음으로 헌신하는지, 그것을 통해 내가 얼마나 특별해지는지가 문제의 본질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자기애적 사랑은 가장 위험한 형태의 사랑일지 모른다. 사랑의 제스처로 포장된 자기 연민, 혹은 자기 증명의 서사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언어를 빌려 자기 자신을 숭배하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타인을 향하는 듯하지만, 실상은 자기 감정의 반사면 속에서만 움직인다. 상대는 나의 선의를 비추는 거울로만 기능하고, 그 거울이 금이 가는 순간 사랑은 곧바로 분노로 뒤바뀐다. 그 거울이 깨지는 순간 사랑은 증오로 바뀐다. 결국 자기애는 타자를 향한 시선으로 가장한 자기 응시이고, 헌신의 얼굴을 한 자기 도취다.자기애의 그림자는 언제나 깊고, 그 속에는 타인을 향한 시선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향한 집착이 잠들어 있다.


결국 자기애란, 사랑의 탈을 쓴 고독이다. 타인에게 닿는 듯하지만 결코 닿지 못하는 손, 그 손끝에 남는 것은 ‘너’가 아닌 ‘나’의 흔적이다. 그래서 가장 위험한 사랑은, 언제나 가장 고독한 사랑이기도 하다. 이 사랑은 따뜻해 보이지만, 그 속에는 냉기가 흐른다. 타인을 품으려는 듯하지만, 끝내 품지 못한 채 스스로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손짓으로 남는다. 자기애는 사랑의 언어를 흉내 내면서, 사랑의 본질을 비껴간다. 그래서 그것은 가장 화려한 형태의 고독이며, 가장 위험한 방식의 자기 위안이다.


카라바조의 나르키소스. 나르키소스가 호수 위에 비친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위키백과


정신분석학적으로 볼 때, 자기애는 단순히 ‘자기를 사랑하는 성향’이 아니라, ‘자기를 유지하기 위한 필사적 구조’에 가깝다. 프로이트는 초기 논문 「자기애 서설」(1914)에서 자기애를 ‘자기 보존적 본능과 성적 본능이 교차하는 지점’으로 규정하며, 인간의 자아 형성이 타인과의 동일시 과정을 통해 이뤄진다고 보았다. 즉, 자기애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구성되는 일종의 ‘정신적 거울’이다. 그러나 이 거울이 지나치게 자기 중심적으로 기울어질 때, 타자는 주체의 내면적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한다. 오토 컨버그와 하인즈 코헛이 각각 ‘병리적 자기애’와 ‘자기심리학’을 통해 설명했듯, 자기애적 구조는 사랑받기 위한 욕망이 아니라 ‘자기존재를 유지하기 위한 방어기제’로 작동한다.


코헛에 따르면 자기애적 인격은 근본적으로 ‘자기대상’의 상실에서 비롯된다. 자기대상은 유년기의 자아가 자신을 거울삼아 세우는 대상이며, 충분히 공감받고 반영되지 못할 경우, 성인은 그 결핍을 타인을 통해 보상하려 한다. 이때 타인은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자기의 결핍을 메워줄 ‘거울’로 기능한다. 스스로의 자아상을 반사해주는 관계만이 견딜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타인은 언제나 불완전하고, 현실은 언제나 깨진 거울처럼 자신을 비춘다. 이 지점에서 자기애는 사랑으로 가장된 결핍의 순환을 낳는다. 사랑은 타자를 향해 있지만, 실상은 결핍된 자기를 수선하려는 무의식적 의례가 된다.


이론적으로 요약하면, 자기애는 자아의 안정과 관계의 불안을 동시에 품은 역설적 구조다. 그것은 자기보존의 방어체계이자, 타자와의 진정한 만남을 가로막는 투명한 벽이다. 결국 자기애의 문제는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의 결핍과 맞닿아 있다. 타자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기보다, 타인을 통해 ‘나’를 유지하려는 사랑. 그래서 자기애는 사랑의 실패가 아니라, 사랑을 통한 자기 구조의 마지막 저항으로 읽힌다.



마흔은 어른의 증명일까


물론 마흔이라는 나이를 그렇게 단정해도 될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그러나 인간은 미성숙의 시간을 유난히 오래 끌고 가는 존재다. 반려견이 두 살이면 이미 성체가 되어 생을 단단히 살아가지만, 인간은 스무 해가 지나도 여전히 자아의 미발현 속을 맴돈다. 성장의 완결이란 애초부터 허상에 가까운 일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오늘의 시간은 과거보다 훨씬 느리게 성숙을 허락한다. 기대수명의 연장은 삶의 속도를 늦추었고, 자본의 격차는 독립의 시점을 한없이 뒤로 미뤄 놓았다. 그 결과, 우리는 과거보다 훨씬 늦은 나이에야 비로소 자신을 ‘어른’이라 부를 용기를 얻게 된다.


그럼에도 마흔 언저리의 사람들 중에는 마치 세상의 이치를 다 헤아린 듯한 태도로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마흔까지 살아보니 젊음은 이렇더라, 사랑은 저렇더라, 인생이란 결국 이런 것이더라—그들은 경험의 결을 통찰의 언어로 바꾸어 말한다. 그러나 그 말들 속에서 삶은 종종 하나의 완결된 교훈처럼 봉합되고, 모호함은 사라진다.


나 역시 그랬다. 십여 년 전, 세상과 자신을 동시에 깨달은 듯한 그 허세의 시절 한가운데 서 있었다. 이제 돌아보면, 그것은 지혜가 아니라 조급함이었고, 통찰이 아니라 두려움의 다른 이름이었다. 미완의 시간을 견디지 못해 완성된 척했던 나날들. 마흔이라는 숫자가 준 착각은, 삶의 중턱이 아니라 오히려 또 다른 유년기의 문턱이었는지도 모른다.


결국 ‘마흔’이라는 나이는 하나의 상징에 불과하다. 인간의 성숙은 시간의 누적이 아니라, 결핍의 자각에서 비롯된다. 나이의 수만큼 쌓이는 것은 지혜가 아니라 상처의 결이고, 그 결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바로 성숙의 깊이다. 우리는 종종 그것을 ‘깨달음’이라 부르지만, 실상은 자신이 모르는 것을 인정하는 일에 가깝다. 안다는 것은 아는 척을 그만두는 일이다.


그렇기에 진정한 어른이 된다는 것은 세상의 이치를 설파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조차 설명할 수 없는 모호함을 품을 수 있게 되는 일이다. 완결된 문장보다 미완의 침묵을 견디는 능력, 그것이 나이의 진정한 무게를 만들어 간다. 젊음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믿음 속에 있고, 마흔은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는 착각 속에 있다면, 노년은 비로소 아무것도 단정할 수 없다는 지점에 닿아 있다. 그 지점에서야 비로소 인간은 타자에게로 향한다.


속도가 아니라 깊이는 시간의 몫이다. AI Sora


자기애의 시대라 불리는 지금, 우리는 끊임없이 ‘나’라는 이름으로 살아간다. SNS의 언어는 고백의 형식을 띠지만, 그 속에서 타인은 늘 조연으로만 존재한다. ‘나는 느꼈다’, ‘나는 깨달았다’, ‘나는 사랑했다’—이 고백들은 타인에게 말을 거는 듯하지만, 실은 거울을 향한 독백이다. 우리는 서로를 통해 자신을 비추고, 관계를 통해 자기 존재의 윤곽을 확인한다. 그러나 반사된 빛은 언제나 왜곡된다. 자기애의 구조가 그렇듯, 타자를 향한 시선은 언제나 자신에게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타인을 통해서만 자신에게 도달할 수 있다. 자기애가 위험한 이유는 그것이 타자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타인을 통해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미숙한 사랑을 통과하지 않고는 진정한 사랑에도 도달할 수 없다. 모든 사랑은 처음엔 자기애에서 출발한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말 속에는 “내가 너를 통해 나를 완성하고 싶다”는 욕망이 숨어 있다. 그 욕망을 자각하는 순간, 사랑은 비로소 타자를 향한 길 위로 나아간다.


마흔이라는 경계에서 내가 배운 것은, 인간의 사랑과 자기애는 단절된 두 감정이 아니라, 서로를 통과해야 하는 순환의 관계라는 사실이다. 자기애를 부정한다고 타인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기애의 그림자를 끝까지 직면할 때에야, 우리는 비로소 타자의 얼굴을 본다. 사랑은 자기 자신을 거쳐야만 타자에게 도달하는 길이다. 그것이 인간의 구조적 비극이자, 동시에 구원의 가능성이다.


이제 나는 안다. 마흔의 허세는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지나야 하는 통과의례 같은 것이라는 것을. 그 시절의 자기애가 없었다면 지금의 성찰도 없었을 것이다. 미숙했던 나날이 있었기에, 성숙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 셈이다.


그러니 결국 중요한 것은 ‘얼마나 늦게 깨닫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진실하게 부끄러워하는가’에 달려 있다. 자기애의 그림자를 인정하는 일, 그 어두움을 견디는 일, 그리고 그 속에서 타인을 다시 바라보는 일. 그것이 인간이 성숙으로 나아가는 유일한 경로다.


삶은 언제나 미완의 형태로 남는다. 완성은 신에게나 가능한 일이고, 인간은 끝내 부서지며 배워가는 존재다. 마흔이든 쉰이든, 그 나이마다 우리는 여전히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동시에 그 사랑을 타인에게 건네는 법을 익힌다. 그 배움이 곧 인간의 시간이며, 자기애와 사랑이 교차하는 자리에서 비로소 우리는 살아 있음의 깊이를 실감한다.


그리고 그때 깨닫는다. 자기애란 결코 버려야 할 결함이 아니라, 타인을 사랑하기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할 첫 번째 벽이라는 것을. 그 벽을 통과한 뒤에야 비로소, 우리는 사랑을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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