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줄의 지질학(地質學)- 비상하는 첫 문장을 위하여

늦은 아침 생각의 시창작 23

by 박 스테파노

철교를 지나는 차륜의 마찰음이 새벽의 검은 두께를 깎아내고 있었다 덜컹거리는 진동 사이로 수북이 쌓이는 낯선 이름들의 수다, 처음엔 모서리가 날카로운 소음이라 생각했다 귀를 거슬리던 소음이 잉크 냄새 가득한 연수원으로, 어느새 싱긋한 연둣빛 재잘거림으로 치환될 때 나의 낡은 이력서 속 칸칸이 잠들어 있던 '첫날'들이 부스스 눈을 뜬다


나의 첫 출발은 잿빛 외투를 입은 IMF의 계절이었다 희망보다는 생존의 보폭을 먼저 익혀야 했던 시절 그럼에도 가슴 한구석엔 식지 않은 박동이 있었으므로 이제는 제법 채웠다 지워진 경력의 빈칸들을 더듬으며 나는 다시 '걸음마'라는 생소한 단어를 발음해 본다


올해는 보이지 않는 미래를 손안의 구체로 빚어내는 시간 버려두었던 드로잉의 선들이 다시 근육을 얻고 굳어버린 지판 위로 기타 줄의 팽팽한 긴장이 돌아 오는 시간 추락의 가속도를 부상의 항력으로 바꾸는 법을 배우며 수면 위로 솟구치는 간절히 남은 마지막 장의 첫 줄을 정성껏 눌러쓴다


두려움은 밀도가 높은 공기일 뿐, 매일이 출발선이라는 일상의 투명한 진리 위에서 나는 다시 한번 '처음'이라는 힘겨운 외마디를 내딛기로 한다 긴 침묵의 끝, 비상을 준비하는 날개 끝에 새벽 지하철의 그 싱긋한 소음들이 돌고 돌아 흐려진 두 눈에 눈부신 서광으로 맺힌다


여명의 출근 길. 내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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