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좋은 사람으로 향하는 작은 성공
언젠가 인연을 맺었던 누군가가 나에 대해 평가를 하고 다닌다는 이야기를 건너 들은 적이 있다. 그 말 속에서 내가 지나온 시간과 경험들은 하나의 삶이 아니라, 아주 협소한 개인의 얇은 인사이트로 축소되어 있었다. 직접 마주한 적은 없었지만, 세상의 말이라는 것은 이상하게도 돌아 돌아 제 주인에게 닿는다. 없던 일은 있었던 일이 되고, 정성껏 가꿔 온 시간들은 어느새 거짓이 되어 있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것은 곤궁과 결핍을 솔직히 고백했던 시간의 반향이었는지도 모른다. 드러낸 약함은 쉽게 읽히고, 종종 우습게 소비된다. 그 사람은 아마도 자신의 세계 안에서 ‘정답놀이’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삶과 사유만이 반드시 존중받아야 할 모범답안이라는 믿음, 그 억지스러운 확신 속에서 말이다. 그들이 쓰는 글과 말은 어쩌면 그들만의 우주, 그 안에 떠 있는 하나의 멀티버스였을지도 모른다.
“모든 사람이 당신의 치어리더가 되어야 할 의무는 없다. 타인의 비난에 흔들리지 않는 것은 재능만큼 중요하다.”
― 류시화, 『두 개의 주머니』 ―
류시화 선생의 이 문장을 마음에 두고, 근거 없는 비난은 그 사람의 우주에 남겨 두기로 했다. 대신 나는 나의 세계에서 조금 더 겸손하고, 조금 더 듬성듬성한 사람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애써 빽빽해지지 않아도 괜찮은 삶, 숨 쉴 틈이 있는 태도를 연습하며 길을 나선 지도 어느덧 시간이 제법 흘렀다. 그 무렵, 류 선생이 책에서 소개한 한 우화가 다시 떠올랐다.
실제와 똑같이 조각을 만들어 내는 것으로 명성이 자자한 조각가가 있었다. 그의 작품은 지나치게 정교해서, 살아 있는 인간과 다를 바 없다는 찬사를 받았다. 조각가 자신 또한 스스로를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재능의 소유자라 믿고 있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그를 잠식했다. 그는 이 세상과 도무지 작별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한 가지 꾀를 냈다. 저승사자를 속이기로 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얼굴과 몸, 표정까지 완벽하게 닮은 조각상을 백 개나 만들었다. 움직이지 않는다면, 누가 조각가이고 누가 조각상인지 신조차 구분하지 못할 만큼 치밀한 작업이었다.
마침내 그날이 왔다. 저승사자가 조각가를 데리러 나타났다. 그러나 그의 눈앞에는 똑같은 모습의 조각상 백한 개만이 놓여 있었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차이를 찾을 수 없었다. 그대로 돌아간다면 염라대왕에게 크게 꾸중을 들을 판이었다. 분명 조각가는 그 안에 숨어 있었다. 저승사자는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조각가 선생, 당신의 재주와 능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소. 그러나 딱 하나, 아쉽게도 형편없이 부족한 점이 있구려. 삼류 조각쟁이와 다를 바 없는 부분이 말이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조각가는 참지 못하고 부동의 자세를 풀었다. 그리고 저승사자에게 항의했다.
“내 작품이 어디가 부족하다는 거야?
어느 조각상이 삼류라는 거지?”
그 순간, 모든 것은 끝나 있었다. 저승사자의 말은 아무 근거도 없는 비난에 불과했지만, 백 개의 조각상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직 그 완벽한 작품을 만든 조각가의 마음만이 크게 흔들렸을 뿐이다.
저승사자를 포함해, 세상의 모든 사람이 나의 응원자나 지지자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타인의 비난에 흔들리지 않는 일은, 재능 못지않은 능력이며 긴 수련의 결과다. 타인이 나에게 던지는 말과 평가는 그들의 업으로 남는다. 그 말에 내가 어떻게 반응하느냐는, 고스란히 나의 업이 된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마음을 조금 낮추고, 걸음을 조금 느리게 옮긴다. 흔들리지 않는 조각처럼, 조용히 제 자리에 서 있기 위해.
두 개의 주머니, 성공의 다른 이름
누구에게나 두 개의 주머니가 있다고 한다. 하나는 단단히 꿰매어져 있어 쉽게 찢어질 염려가 없는 주머니이고, 다른 하나는 바람이 잘 통하도록 크게 구멍이 난 주머니다. 누군가 나를 북돋고 힘을 보태는 말을 건넨다면, 그 말은 튼튼한 주머니에 넣어 두면 된다. 밤이 깊어 잠자리에 들기 전, 그 말들을 하나씩 꺼내어 바라보며 하루를 감사하고,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을 조용히 기대하면 충분하다.
반대로 누군가 나를 향해 비난과 험담을 던진다면, 그 말들은 구멍 난 주머니에 넣으면 된다. 상처를 주고 마음을 움츠러들게 하는 말들은 그 구멍을 통해 빠져나가, 더 이상 나라는 존재를 붙잡고 괴롭히지 못한다. 특히 ‘성공’이라는 이름으로 내려지는 판단 앞에서는 더욱 그렇다. 누군가에게 삶의 목표를 묻는 질문만큼 조심스럽고 어리석은 물음도 드물다. 겉으로는 각기 다른 색으로 포장된 대답이 돌아오겠지만, 그 속살을 들여다보면 대개 하나의 단어로 수렴되기 때문이다. 바로 ‘성공’이다.
오늘의 세계를 살아가는 우리는 크고 작게 성공을 삶의 목적에 두고 살아간다. 올해 안에 국가고시를 통과하겠다는 결심, 분기 매출 목표를 넘기겠다는 구체적인 계획 역시 성공의 이름을 달고 있다. 유튜브를 보며 사둔 주식이 크게 오르기를 기다리는 마음, 영혼을 끌어모아 마련한 집값이 두 배로 뛰기를 바라는 세속의 기대 또한 성공의 다른 얼굴이다. 그뿐일까. 오늘은 저녁 7시 이후에 아무것도 먹지 않겠다는 다짐, 아침 7시 이전에 일어나 하루를 조금 더 길게 쓰겠다는 약속, 매일 물을 2리터 이상 마시겠다는 사소한 결심까지도 모두 성공을 향한 작은 노력이다. 우리는 그렇게, 의식하든 그렇지 않든 성공에 목마른 존재로 하루를 건넌다.
54년을 살아오며 얼마나 많은 성공과 좌절을 겪었을지 조용히 되뇌어 본다. 유치원 시절 사생대회에서 급한 배앓이 탓에 그림을 끝내지 못하고 겨우 장려상을 받아, 돌아오는 길에 모친에게 등짝 스매싱을 맞던 날이 떠오른다. 초등학교 2학년, 처음 나간 태권도 전국대회에서 6학년 형을 만나 손 한 번, 발차기 한 번 제대로 내보지도 못한 채 수건이 날아오던 순간도 있다. 온갖 정보와 묘안을 짜내어 제안했지만, 결국 고객사 최고위층의 친지에게 돌아가 버린 수백억 대의 수주 건 역시 잊히지 않는다. 성공보다 실패가 먼저 떠오르는 이유는, 어쩌면 아직도 성공이 고프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성공’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면, 우리는 으레 이런 큼직한 사건들을 먼저 떠올린다. 그래서 나이를 먹을수록 패배의 기억이 더 선명해지고, 열패감에 잠기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뒤편에 숨어 있는 수많은 성공들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제법 긴 시간이 필요했다.
어릴 적 천식 때문에 체육 시간마다 열외되던 아이가 태권도를 배우고 학급 달리기 대표가 되었던 일, 성당 문학지에서 김동리의 단편을 만화로 옮겨 그리며 즐기던 중학생 시절, 그 그림을 보고 선배에게서 건네받은 한마디 칭찬. 그 선배의 이름이 ‘봉준호’였다는 사실까지 함께 떠오른다. 자신을 돌보지 못해 불어난 몸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한 운동이, 어느새 피트니스 클럽 주최 최다 감량자가 되어 공짜 회원권을 받게 되었던 기억도 있다. 그리고 33세에 담배를 끊고, 45세에 술을 내려놓았던 작지만 단단한 의지. 이 모든 순간들은 조용히 지나갔지만, 분명히 ‘작은 성공’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이제는 안다. 성공은 늘 박수와 조명을 동반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떤 성공은 그저 나 자신만 알고 지나가도 충분하다는 것을. 그래서 오늘도 나는 두 개의 주머니를 가만히 들여다본다. 무엇을 간직하고, 무엇을 흘려보낼지 스스로에게 묻기 위해서. 그렇게 남은 말들로, 내일을 다시 살아가기 위해서.
작은 성공의 활자들
이전의 비교적 안정적인 환경에서 살던 시절, 내게는 하나의 습관이 있었다. 글을 쓰고 나면 그 결과물을 여러 판본으로 프린트해 읽고, 차곡차곡 쌓아 두는 일이었다. 돌이켜 보면 이 버릇은 수많은 프로젝트 제안서를 작성하던 시절에 몸에 밴 습관의 연장이었다. 처음에는 퇴고와 편집의 결과를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는 단순한 욕심에서 시작했지만, 어느새 그 과정 자체가 소중한 루틴이 되어 있었다.
그 일에는 묘한 성취감이 따랐다. 엉덩이를 무겁게 붙이고 버틴 시간의 결과가, 비록 하찮은 종이 몇 장일지라도 손에 잡히는 순간이 있었다. 그때의 뿌듯함은 생각보다 깊었다. “내가 이만큼이나 활자를 쏟아냈구나” 하는 생각이 스치면, 화장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조차 조금은 달라 보이곤 했다. 글을 쓴다는 일은 그렇게 내 일상 속에서 분명한 ‘작은 성공’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한때 제법 소란스러웠던 ‘글값’에 대한 논쟁을 지켜보며, 나 역시 의견을 보탠 적이 있다. 글쓰기 플랫폼 운영을 둘러싼 ‘공정시비’가 어느 순간 ‘글값에 대한 푸념’처럼 읽히는 상황은 불편했다. 그러나 다시 찬찬히 읽어 보니, 그렇게 오해받을 여지도 없지는 않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던 중, 편성준 작가의 연재 칼럼 [글쓰기로 먹고살기]가 다시 눈에 들어왔다.
https://n.news.naver.com/article/005/0001584465?sid=110
“어쩌면 우리를 가장 가슴 뛰게 하는 건 ‘창조의 불꽃’을 경험하는 순간인지도 모른다. 자신에게 숨어 있던 창조의 불꽃을 잡아내는 것, 그래서 생애 처음 마음에 드는 글을 쓰고 그걸 소리 내어 읽어본 뒤 ‘내가 정말 이 글을 썼단 말이야?’ 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 글쓰기 강의를 하면서 가장 좋았던 건 그런 순간을 목격하는 쾌감이었다.
(중략)
베스트셀러 작가 채사장은 “인생을 산다는 것은 내적으로 성장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 내적 성장을 가장 손쉽게 경험할 수 있는 게 바로 글쓰기다. 내 직업이 글쓰기라서 하는 얘기는 절대 아니니 한 번 믿어 보시기 바란다”.
― 편성준, [글쓰기로 먹고살기] 칼럼 본문 중 ―
솔직히 말해 ‘창조의 불꽃’이라는 말에 이르기에는 내 글솜씨가 아직도 많이 비루하다. 그러나 글을 쓰며 작은 성공을 경험한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다. 이전에 나는 글쓰기를 두고 “굉장한 일”, “즐거운 일”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고백하자면, 그것은 이미 이뤄낸 성취의 후기라기보다는 언젠가 이루고 싶은 찜 목록에 가까운 말이었다.
그 무렵, 생계를 살아가는 문제 위에 ‘글값’이라는 정제되지 않은 희망이 덧붙여지면서, 글쓰기의 가치와 목적은 조금씩 흐려졌다. 작은 성공조차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 되어 버린 것이다. 비싼 글로 인정받는다면 좋을 것이다. 당장의 곤궁을 잠시나마 뒤로 미룰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비싼 글’이 반드시 ‘좋은 글’은 아니라는 생각도 점점 분명해졌다.
한때는 글쓰기 플랫폼의 기업 운영 방향에 맞추고, 그들이 의도한 바를 충실히 따르면 보상이 따른다고 열심히 이야기한 적도 있었다. 실제로 한 번에 4~70만 원의 보상을 받고 기뻐한 적도 있었다. 그렇다면 그때의 글들은 과연 좋은 글이었을까. 다시 열어 본 그 시절의 글들은 차마 끝까지 읽기 힘든, 스스로 보기에도 구린 문장들로 가득했다. 그 순간 문득 자문하게 되었다. 나는 과연 그때 ‘작은 성공’을 거둔 것이었을까.
이 작은 성공에 대해 생각을 거듭 정리하던 어느날,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을 마주하였다. 한림원의 선정평,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 인간의 나약한 일상을 드러내는 강렬한 시적 문장(산문)’이라는 문구도 인상 깊었지만, 그보다 먼저 한강 작가의 오래전 인터뷰 한 대목이 떠올랐다.
“어쩔 때는 독자도 신경 쓰지 않고 글을 써요. 그저 내가 이 소설을 끝낼 수 있을까만 걱정 가득한 마음으로 글을 썼어요.”
이 말을 떠올리며 다시 생각하게 된다. 글을 쓴다는 일은 누군가의 채점을 기다리는 행위가 아니다. 상이나 베스트셀러라는 보상을 향해 앞다투어 달려가는 일도 아닐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내 안에서 조용히 ‘작은 성공’을 발견하는 과정에 가깝다. 그 작은 성공의 끝에는, 어쩌면 ‘좋은 글’이 아니라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놓여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글을 쓴다. 값으로 환산되지 않아도, 박수로 돌아오지 않아도 괜찮다. 활자 몇 줄을 남기며, 다시 한 번 작은 성공을 손에 쥐어 보기 위해서.
젊게 사는 법, 쓰는 사람의 시간
https://v.daum.net/v/20221210040419140
“나는 이 칼럼을 읽는 분들에게 글쓰기의 즐거움을 전파하고 싶다. 글을 써서 먹고사는 것까지는 모르겠지만 평소 글을 쓰면서 사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삶은 확실히 다르다. 사이토 다카시 교수의 ‘내가 공부하는 이유’엔 ‘책 읽는 사람은 늙지 않는다’는 말이 나오는데 글쓰기도 그렇다. 자신의 글을 쓰는 사람은 언제나 젊다. 현재를 살기 때문이다.”
― 편성준, [글쓰기로 먹고살기] 칼럼 본문 중 ―
글을 쓴다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대단한 일이다. 특별한 재능이 증명되어야만 허락되는 일이 아니라, 쓰는 순간 이미 성립되는 하나의 성취에 가깝다. 글을 쓴다는 행위 자체가 이미 멋지고, 충분히 존중받아야 할 일이다. 그리고 그 보상은 대개 즉각적인 돈이나 명예가 아니라, 더 오래 남는 내적 성장의 형태로 돌아온다.
글을 쓰는 사람은 글을 쓰는 순간마다 ‘작은 성공’을 경험한다. 그 성공의 기준은 외부에 있지 않다. 플랫폼이 지급하는 보상도 아니고, 숫자로 찍히는 좋아요나 댓글의 반응도 아니다. 곁에 있는 누군가의 칭찬조차, 그 기준이 될 수는 없다. 판단의 기준은 오직 스스로의 만족감이어야 한다.
“내가 이런 문장을 썼어!” 하고 혼자서 은근히 기뻐해도 되는 순간, 어쩌면 글쓰기에서 유일하게 허락된 자뻑의 시간이다. 그 자기만족이 부끄럽지 않을 때, 글은 비로소 멈추지 않고 이어진다. 억지로 끌고 가는 노동이 아니라, 다시 돌아오고 싶은 자리로 남기 때문이다.
그렇게 쌓인 작은 성공들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하루의 문장, 한 편의 글, 몇 줄의 기록이 시간이 지나며 서로 기대어 선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것들은 인생을 돌아볼 수 있는 하나의 풍경이 된다.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무엇을 붙들고 버텨왔는지를 조용히 증언하는 흔적이 된다.
글은 사람을 서서히 바꾼다. 빠르게 증명하지 않고, 요란하게 주장하지 않으면서도, 쓰는 이를 안쪽에서 조금씩 성장시킨다. 그 성장의 방향은 대개 비슷하다. 더 섬세해지고, 더 조심스러워지고, 조금은 덜 단정적인 사람이 되는 쪽이다. 결국 글쓰기는 ‘좋은 글’을 쓰기 이전에, ‘좋은 사람’이 되는 연습에 가깝다.
나는 믿고 싶다. 그렇게 단단해진 사람이 쓰는 글은, 설령 비싸지 않더라도 쉽게 낡지 않는다는 것을. 당장 환산되지 않아도, 누군가의 현재에 닿을 수 있는 문장이 된다는 것을. 글을 쓰는 사람은 그래서 언제나 현재를 산다. 지금의 생각을 붙잡고, 지금의 마음을 기록하며, 오늘의 자신과 정직하게 마주하기 때문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젊게 사는 한 가지 방식이다. 나이를 잊고, 시간을 견디며, 오늘을 살아내는 방법이다. 그리고 그 하루하루가 모여, 결국 한 사람의 삶을 말해 주게 될 것이라 조용히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