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물엔 죄가 없다
용산 철도병원이 박물관으로 새단장을 했다는 뉴스 큐레이션을 보고,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었습니다. 구관은 보존 등록문화재라 박물관으로 새장단을 하였고, 신관은 이미 철거되었다는 이야기에 묘한 의문이 들었습니다. 얼핏 기억하는 두 건물의 모습을 사진으로 보고서야, 일면 납득이 갔고, 다른 면에서는 씁쓸했기 때문입니다.
청산의 대상이 되었던 "적산(敵産)"
적산(敵産, enemy property)은 말 그대로, '적의 재산'이지요. 일제 강점기 당시 일본인이나 기업이 소유했던 부동산, 반입했다가 가져가지 않은 동산 등을 총칭합니다. 이는 미군정이 "전리품"인 적의 재산을 처리하기 위하여 지정한 공식 명칭이었다고 합니다.
미군정 조력자나 기타 이재에 밝은 이들에게 불하되기도 하고, 일본인이 재판을 통해 소유권을 보존하기도 했고, 일부는 한국 대리인이 관리하기도 하였던 적산은 한때 "청산"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토지와 같은 영구 가치재는 국고로 환수하고, 강점기의 제국주의 상징물은 과감히 파괴ㆍ철거하자는 주장이 해방 이후 지속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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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 중앙청 건물을 완전히 헐어내 경복궁을 복원하고 중앙박물관은 제3의 장소에 새로 건립해야 한다는 「신축 이전론」이 나와 정부가 현재 추진 중인 박물관 이전 계획이 종합적으로 재검토될 것 같다. -1982.7.12 중앙일보-
그 상징적인 건물이 지금의 광화문 자리에 떡허니 버티고 있던 "중앙박물관", 즉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본부'였던 "중앙청"의 철거에 대한 공론이었습니다. 군사독재 시절부터 시작된 철거의 논의는 1993년이 되어서야 일제의 잔재 건물로 해체를 결정하였습니다. 1995년 8·15 광복 50주년을 맞이하여 철거가 시작되어 1996년 11월 정말 철거되었고, 지붕의 첨탑은 천안 독립기념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 어두운 역사의 유산(Negative heritage)에 대한 보존과 활용에 대한 편익이 철거보다 크다는 주장들이 대두됩니다.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군사독재 시기의 역사를 담은 유산, 건축물 등에 대한 재조명이 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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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일본의 군함도와 사도 광산의 무리한 유네스코 유산 등재로 인하여 다시 부정적 시각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 시대를 지운다고 해서 역사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기에, 어두웠던 과거의 기억을 고스란히 남기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역사라는 게 강자와 승자의 기록이라 하지만, 역사를 받혀 주는 유산은 결국 가장 약한 민초들 삶의 흔적일 테니까요.
그래서, 국가 기반에 위해가 되거나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등록문화재나 보존구역 지정을 통해, 그 역사의 시간을 기억합니다. 특히, 일제 강점기는 세계적으로 산업화의 태동기라 "철도"와 관련된 시설과 부속물은 한국의 근대화를 설명할 사료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철도 관사나 기차역, 부속 건물 등의 보존이 요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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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곡동은 근대의 상징인 철도와 기차의 운행 등에 대한 숨은 얘기들이 많고, 철도관사는 현재까지 온전한 상태로 보존돼 있는 상황이다. -기사 본문 중-
청산되지 않는 "토건(土建)"의 위용
그럼 구 철도박물관은 어떤 기준의 처분이 있었을까요? 아주 선의적이고 정상적인 행정의 작용이라고 치면 "건물의 외형"때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구관은 적벽돌 조적 건물이고, 신관은 전형적인 일본의 "문화주택"의 모습을 띕니다. 일본이 근대화되면서 주택 양식의 변화도 추구하는데, 특히 식민지에 점령자의 우월함을 보이기 위해 당시로서는 신식의 주거 양식을 보급하는데, 이것을 "문화주택"이라고 합니다.
이마, "식민 점령"의 양식으로 판단해서 구관은 살리고, 신관을 헐어 냈을지도 모른다는 순진한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문화주택"으로 의식의 흐름이 1970년대로 점프가 되었는데요. 1970년대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던 시절에 지방의 낙후된 취락구조 개선 사업의 성공적인 사례를 소개하는 경향신문 기사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옵니다.
“우람한 철대문에 초인종이 달렸고 상수도가 부엌까지 들어오는... 알루미늄 새시로 창문을 달았고, 고급 미장 합판으로 마루와 천장의 문화주택"
이러한 모습은 모두 대도시 문화주택 못지않게 번듯하다는 의미로 "문화"의 시대에는 개발과 개량이라는 '토건'이 성행합니다. 토건은 지난 세기 우리 사회에서 시대를 뛰어넘어 자신들이 살고 있는 주거의 문제를 해결하고 지향해야 할 모범답안이 되었으니까요.
이런 생각에서, 용산박물관의 보도자료 출처를 확인해 보았습니다. 용산구청과 현대산업개발이 각각 지방자치 행정과 산업 담당들에게 뿌렸습니다. 그때서야 이야기에 확신이 섭니다. "용산 타운비즈니스 개발 사업"의 그 땅이았던 것이지요.
철도병원은 1984년부터 중앙대학교의료원에서 부지와 건물을 한국철도공사-코레일로부터 장기 임대하여 중앙대학교 의과대학 부속 용산병원이라는 이름으로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MB정권이 들어서며 서울 시장 때부터 추진하던 "용산개발"을 본격화합니다. 당시 비리의 온상 부지 소유자인 한국철도공사는 병원을 내보내려는 입장이었습니다. 결국 2007년에 철도공사가 반환 소송을 냈고 2009년 12월 5일 승소함에 따라 결국 2011년 3월 25일, 임대계약이 만료되며 중앙대학교 용산병원의 진료도 종료되었습니다. 그렇게 2011년 3월 31일 중앙대학교 용산병원의 폐업이 신고되면서 병원으로서의 역사는 마감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2008년 등록문화재가 된 철도병원 구관의 문화재 철회가 무산되고, 용도는 상업시설의 경우 무조건 병원으로 써야 한다는 조건으로 방치되었습니다. 결국 2019년이 되어서야 용산구에서 철도공사로부터 기부채납을 받아 구립 역사박물관으로 활용하는 것으로 최종 결정되었습니다. 이는 중소기업벤처부가 지난해 4월 용산을 '역사문화 르네상스 특구'로 지정하면서 , 용산구는 특구 지정에 따라 510억 원을 투입해 용산역사박물관 조성을 비롯한 특화사업을 2024년까지 추진할 계획을 진행 중입니다. 반대급부로 말 많고 탈 많던 용산 타운비즈니스 개발은 순풍을 달게 된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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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산이 추진하고 있는 용산철도병원부지 개발사업은 용산지구단위계획구역 내 용산구 한강로 3가 65-154번지 일대 1만 772㎡ 부지를 개발하는 것이다. 부지 내 용산철도병원 본관은 용산역사박물관으로 리모델링해 용산의 헤리티지를 이어가며, 지하 6층~지상 최고 33층 621가구 규모로 주거·쇼핑·문화가 융합된 주거복합공간을 조성한다. (중략) 현산은 민간 차원에서 용산역 주변 위 3개 거점을 중심 코어로 삼아 서쪽 한강변 용산국제업무지구를 한강 수변공간과 연계하면서 기존 여의도의 업무지구와 함께 글로벌업무특구로 유도할 계획이다. 또 새롭게 열리는 용산 시대의 밑바탕인 용산공원조성사업, 문화예술과 여가, 주거의 중심인 이태원을 함께 아우르는 새로운 글로벌 중심업무생활지구(Global-Central District; GCD)를 개발한다. 앞으로 글로벌 도시로서 서울의 경쟁력을 키워나가기 위해 과거,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헤리티지를 품은 용산이 그 구심점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HDC현대산업개발이 그랜드비전을 선도한다는 것이다. -기사 본문 중-
이런저런 이유로, 용산이 시끌 시끌합니다. 용산은 사실 개발의 요지라기보다는 위기의 한반도의 근현대사를 담고 있는 "근현대사의 사적"이라 생각합니다. 1905년 러일전쟁 때,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군은 용산에 군대를 주둔하기로 하고, 그해 8월 용산 일대 가옥과 무덤을 이전시킵니다. 생활의 터전인 전답을 빼앗기고 가옥을 철거당한 데다 조상 대대로 섬겨 온 분묘를 이장해야 했지요.
용산공원이 조성되는 땅은 40년간 일본군에게 점령당한 것도 모자라 다시 70년 세월 동안 미군부대가 주둔해 ‘금단의 땅’으로 인식된 곳입니다. 그동안 용산 주민이 감내해야 할 고통도 컸습니다. 미군부대가 들여다보인다고 고층 건물을 못 지었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부대를 중심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용산 주민이 미군, 군속들과 마주치며 받았을 직간접적 피해도 예상 가능한 일입니다.
용산으로 대통령 집무실 이전이 추진되고 있습니다. 졸속한 추진에 반대의 입장입니다. 비용의 문제나, 안보의 문제보다 국가 철학의 부재로 인식되기 때문입니다. 용산에 역사와 정치의 거점이 자리 잡는 의미를 충분한 논의와 설득으로 "이야기"를 구축했다면 지금과 같은 거센 반대와 마주 했을까요. 환경적인 측면의 가치를 뛰어넘어 제국주의 시대로부터 냉전시대에 이르는 근현대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그 장소의 의미를 재평가받을 수 있는 계기 또한 마련될 테니까요. 그리고 그 주변에는 국립중앙박물관, 한글박물관, 전쟁기념관, 안중근 의사 기념관, 백범 김구 기념관 등의 각종 문화시설을 비롯하여 남산공원, 한강공원, 효창공원, 용산가족공원 등의 시민들의 발걸음, 공원이 자리 잡고 있으니까요.
무리한 토건 개발을 물리고,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이야기"가 가득한 곳으로 설득했다면 어떠했을까 하고 잠시 상상해 보았습니다. 적산 건축이 토건개발로, 그리고 시대정신의 정치행위로 이어지는 "상상"의 꼬리물기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