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이가 여니에게
가파른 비탈만이
순결한 싸움터라고 여겨 온 나에게
속리산은 순하디 순한 길을 열어 보였다
산다는 일은
더 높이 오르는 게 아니라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라는 듯
평평한 길은 가도 가도 제자리 같았다
아직 높이에 대한 선망을 가진 나에게
산은 어깨를 낮추며 이렇게 속삭였다
산을 오르고 있지만
내가 넘는 건 정작 산이 아니라
산 속에 갇힌 시간일 거라고,
오히려 산 아래에서 밥을 끓여 먹고 살던
그 하루 하루가
더 가파른 고비였을 거라고,
속리산은
단숨에 오를 수도 있는 높이를
길게 길게 늘여서 내 앞에 펼쳐 주었다
-나희덕 <속리산>에서 -
거의 20년 만에 만난 고교 동창의 SNS는 한 편의 묵상집 같습니다. 내 궁핍을 타개할 요량으로 찾아낸 친구는 실질적 도움은 물론 매일 누가 보든 보지 않든 적어 내리는 글이 시편들 같습니다.
문이과 50명씩 전교 석차를 잘라 학교 소강당에 자율학습을 운영하던 고3 시절. 이 친구는 한 번도 이과에서 맨 앞자리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당연 한국 최고 대하삭의 최고 학부 물리학과에 진학했는데, 대학 졸업하고 오래간만에 동창회에서 만난 친구는 자퇴하고 다시 학력고사를 치르고 지리학을 전공하고 있었습니다. 딩시에도 모든 선택에 대답이 있는 저보다 늘 성숙한 사람이었지요.
이 친구는 늘 저를 살피는 것 같습니다. SNS나 이곳 글들이 힘들다고 냄새를 풍기면 박봉 국립대 교수 월급을 쪼개에 제게 보내 주곤 합니다.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늘 묵상이 되는 글을 줍니다. 그 글이 제겐 기도의 지향이 돠곤 합니다. 오늘은 나희덕 시인의 <속리산>이었습니다.
"산다는 것은 더 높이 오르는 것이 아니라, 더 깊게 들어가는 것"이라는 말에 저도 모르게 위안이 되었습니다. 지금 깊게 들어와 앉아 있는 이 삶의 골짜기는 결국 산다는 산행이라는 것이니까요.
"내가 정작 넘는 것은 산이 아니라, 산 속에 갇힌 시간"이라는 말에 눈물을 쏟았습니다. 제게 이보다 큰 위로와 응원은 없었습니다. 지금 끝이 없는 유한의 산등성이를 헤매는 것이 아니라, 가늠할 수 있는 무한의 시간을 헤아리는 중이라는 말은 등을 두덕거리는 조용한 안도의 손길이 되었습니다.
하루 해가 넘어간다고 얼마나 바뀔까요.
세상이 바뀌어 제 가난이 사라질 것도 아니며,
사람이 바뀌어 자신의 과오를 갑작 자각하여 사과하고 교정할 것도 아니며,
산 속의 시간이 갑자기 산 아래 시간으로 바뀌지도 않습니다.
단, 바뀔 수 있는 한 가지, 제 자신이 아닐까 합니다.
적어도 제 결심과 의지와 성찰은 변화하고 변모할 수 있는 일이지요. 그러기에 "새해의 다짐"과 "새해의 소원"은 유의미하고 유효합니다.
친구의 타임라인에 답글 남기지 않고 이곳에 답을 남깁니다. 고맙다고, 덕분이라고, 그리고 계속 지켜봐 달라고. 한 숨에 넘을 산이 내게 길게 길게 펼쳐진 이유도 까닭도 분명 있을 것이라고. 산 너머의 산 아래에서의 끓인 밥 한 끼는 고달프지 않을 테니 같이 먹자고.
새해 달력이 바뀌는 이유는
천문학도, 종교도, 풍습도 아닌 "마음" 때문이라 생각이 드는 오늘입니다. 복된 걸음 걸음 되시길.
-곰탱이 남편의 어여쁜 아내와 나누는 아침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