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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 스테파노 Dec 05. 2023

블라디미르 Vs. 블라디미르

푸틴과 젤린스키, 그리고 키예프 대공

1.

블라디미르(Влади́мир / Vladímir)는 슬라브어권, 특히 러시아어권에서 인기 있는 남성 인명이다. 고대 교회 슬라브어 계통의 이름으로 '통치하다'는 뜻의 블라디(владь / vladĭ)와 '뛰어나다, 훌륭하다'는 의미의 매루(мѣръ / měrŭ) 혹은 평화, 세계를 뜻하는 미루(миръ / mirŭ)가 결합된 이름이다. "블라디미르"는 '세상을 지배하라'는  의미의 선 굵은 이름이 된다. 인명 지명에 '지배하다 - владеть'에서 파생된 '블라디'는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한국에서 가장 가까운 러시아 최동단의 도시 이름 블라디보스토크(Владивосток)는 '동쪽-바스톡'(восток)을 지배하라는 의미의 부동항 전략 요충지이고, 유라시아의 동맥이라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의 동쪽 종착ㆍ기착지가 되었다.


2.

유명인 중에서도 '블라디미르'는 친숙하다. 우선 러시아 혁명으로 소비에트 연방, 즉 소련을 창시한 레닌의 본디 이름은 '블라디미르 일리치 율리아노프'다. 친숙한 니콜라이 레닌은 필명이다. 미국 메이저리그 류현진 소속팀 토론토의 동료 '블게주'라 줄여 부르는 '블라디미르 게레로 주니어'는 아버지와 함께 2대를 이은 강타자로 활약 중이다. 블게주 부자는 도미니카 공화국이 본류다. 이는 남미에서 사회주의 혁명의 확산으로 레닌의 본명인 '블라디미르'를 쿠바나 남미 전역에서 이따금 만나게 되는 연유로 생각하면 된다. 이 밖에 <호로비츠를 위하여>의 미국 피아니스트 호로비츠, <롤리타>로 유명한 나보코프, 소련 시절부터 러시아 민중 저항 포크 가수 비소츠키, 그리고 국민 시인 마야콥스키의 이름이 모두 '블라디미르'다. 한국에서 활동하는 사회주의 철학 교수 박노자의 이름도 '블라디미르' 티호노프다.


모두 "블라디미르"


3.

최근 국제 사회의 모든 뉴스에서 두 명의 '블라디미르'가 주목받고 있다. 하나는 러시아의 독재 권력을 장기 집권중인 "블라디미르 푸틴"과 나머지 한 사람은 "블라디미르 젤린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다. 전쟁의 참혹함과 그 폭력적 무력 행사에 반대한다. 다만, 우크라이나-러시아의 대치와 전쟁 상황을 그저 서방 세계의 '우리 편'과 공산주의 잔재의 독재 권력의 '악의 축'과의 대결로만 바라보기에는 속에 숨은 이야기와 역사, 문화, 민족에 대한 복잡한 심경을 간과할 수 있다. 이름마저 똑같은 두 지도자의 운명이 마치 두나라의 비극적인 장난처럼 느껴지는 것도 그러한 생략된 '복잡한 사연'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블라디미르 1세, 키예프 공국, 공국의 시대


4.

'블라디미르'라는 이름의 시조는 루스 시대에서 공국의 시대를 만든 블라디미르 1세, 혹은 블라디미르 대제라 불리는 "블라디미르 스뱌토슬라비치"다. 흔히 국가로서의 실질적인 러시아의 건국 아버지라고 추앙받는 인물이다. 키예프 공국의 대공(재위 980~1015)으로 지금의 우크라이나 땅에서 '공국'을 세웠고, 이후 '노보고로드'와 '모스크바 공국'의 기원이 되며, 실질적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의 건국 아버지로 존경받고 있다. 변경의 동 슬라브족과 인접 민족을 토벌했고 남쪽의 유목민과 폴란드의 공세 ·간섭에 잘 대처했다. 또한 크림의 헤르소네스를 점령했고 비잔틴 황제의 누이동생을 대공비로 맞아들이며 그리스도교(정교회)를 국교로 제정한다. 이로서 슬라브-러시아의 고대국가 기틀 '왕정'-'키릴 문자'-'정교회'의 3대 축이 완성되었다.


5.

'블라디미르 푸틴'은 1999년 12월 31일 총리 겸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취임한 이래 현재까지 장기집권 중인 러시아의 대통령이다. 명목상으로는 민주적 절차에 따른 자유선거를 통해 당선된 국가원수지만, 다수의 부정선거 논란과 수많은 정적들을 탄압, 암살한 의혹으로 인해 이전부터 사실상 독재자로 간주되었으며, 2020년에는 대통령 연임 제한 철폐 개헌으로 종신집권의 길을 열었다.


블라디미르 푸틴


할아버지는 무려 블라디미르 레닌과 이오시프 스탈린의 다챠(별장)에서 일하는 전속 요리사였으며, 아버지는 독소전쟁에 참전해 레닌그라드 공방전에서 독일군의 포격으로 한쪽 팔이 절단된 상이군인이었다. 부친, 모친이 가진 첫째 아이 알베르트는 어릴 적에 일찍 죽었고, 둘째 아이 빅토르는 레닌그라드 봉쇄 중 디프테리아로 사망했다. 그렇게 폐인이 된 30대 부부만이 살아남아 전쟁 후에 마흔이 넘어 세 번째로 낳은 아이가 바로 블라디미르 푸틴이다. 전직 KGB 요원으로 첩보 활동에 대한 세간의 환상이 있고 실제로 국외에 파견되기도 했지만 푸틴이 맡은 일은 낮은 단계의 보안과 연락업무 등에 그쳤다. 즉 중간관리 사무직 요원이었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흑색 신분의 특수요원이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가 있다.


There is no such thing as a "Former" KGB man.
세상에 "전직" KGB 요원이란 건 없습니다.


노령에 접어든 푸틴이 판단력을 상실하고 있다는 분석은 상당히 지지를 얻고 있다. 2010년대까지만 해도 그의 임기를 거쳐간 미국 대통령들 머리 위에서 노는 듯한 정치적, 외교적 술수를 보여주었던, 푸틴이 우크라이나 위기를 기점으로 급격히 하책을 남발하는 어리석은 독재자로 전락하고 있다. 정치/외교 전문가들은 푸틴이 갑자기 이렇게 된 이유를 분석하다가 급기야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긴 게 아니냐는 평가를 내놓기 시작했다. 수십 년간 권좌에 앉아 온 독재자의 특성상 당연하게 빠질 수밖에 없는 자아도취와 오만함이라는 분석부터, 극단적으로는 정신병을 앓고 있다는 주장까지 다양한 평가가 나오고 있다. '미치광이'라는 이야기를 고급스럽게 하는 것이다.


푸틴은 "광인"인가 "광인인 척"인가


6.

'블라디미르 젤린스키'는 코미디언 출신 정치인으로, 우크라이나의 제6대 대통령이다. 코미디언을 꿈꾸었던 그는 17세 때 처음으로 코미디 경연 프로그램으로 TV에 등장했으며, 1997년 코미디 경연 프로그램에서 우승하며 주목받는 신예 코미디언이 되었다.  2015년 자신이 주도하여 제작한 시트콤 <인민의 종>에서 역사 교사 출신으로 대통령이 되어 부정부패에 저항하는 주인공을 연기했다. 시트콤이 우크라이나 내에서 최대 시청자 수 2,000만 명을 기록할 정도로 엄청난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국민적인 인기를 얻게 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정치와는 거리가 먼, 잘 나가는 코미디언에 불과했다.


블라디미르 젤린스키


"나는 평생 동안 우크라이나인들에게 웃음을 주기 위해 모든 것을 다해왔다. 그것이 나의 사명이었다. 이제 나는 우크라이나인들이 최소한 울지 않기 위해 모든 것을 다할 것이다." -2019년 대통령 취임사 중에서-


그러나 인민의 종 출연진들이 2018년 3월 동명의 정당을 창당하면서 대선 도전을 선언하고, 결선 투표에서 70% 이상의 득표를 올리며 대통령에 당선된다. 우크라이나에서는 계속된 실책으로 기존 정치인들에 대한 불신이 매우 높아진 상태였기 때문에, 젤렌스키 후보는 거기에 물들지 않은 새로운 피라는 점을 어필하며 아무도 예측치 못했던 일이 일어난 것이다.


하지만 그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도 존재한다. 그를 일약 스타로 만들어 준 드라마 인민의 종을 방영한 채널 ‘1+1(один плюс один)’은 우크라이나의 금융재벌인 이호르 콜로모이스키 소유의 방송국이다. 콜로모이스키는 포로센코(전 대통령) 때문에 이스라엘에 망명 중일 정도로 둘의 사이가 매우 나빴었다. 일개 배우가 정치 자금이나 조직이 필수인 전국단위 선거를 어떻게 치를 수 있었는지 의혹이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그래서 젤렌스키가 콜로모이스키의 배후 조종을 받는 게 아니냐는 의심이 있다. 그의 미숙한 판단과 부족한 역량이 '어릿광대'라고 폄하되어 지적받는 부분이다.


https://www.donga.com/news/Inter/article/all/20220224/112011723/1


러 침공 예측 못하고 위기 키운 ‘아마추어 대통령’

www.donga.com


7.

러시아 푸틴을 "미치광이"로 우크라이나의 젤린스키를 "꼭두각시"로 빗대어 평가하는 각 진영이 있다. 그러나, 그런 정치적이고 자극적인 평가는 잠시 미루어 두고자 한다. 두 사람에 대한 비판적 서술이라면 머릿속에 넘치고도 남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레닌 그라드(지금의 페테르부르크)에서 가난한 상이군인으로 자라났지만, 스포츠맨을 꿈꾸던 소년 '블라디미르'. 그리고, 우크라이나 시골 마을에서 많은 사람에게 웃음을 주는 배우가 되기를 희망하던 또 다른 청년 '블라디미르'의 미래에 전쟁이란 없었을 것이다. 그저 자신들이 가장 존경하던 '블라디미르 대공'처럼 자신의 분야에서 세상에 영향을 끼치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운명은 그들을 '광인'과 '광대'로 손가락질받게 했으니, 참 기구하다.


https://m.yna.co.kr/amp/view/AKR20161104186500080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의 크렘린궁 바로 옆에 동슬라브족 최초의 도시국가 '키예프 공국'의 통치자인 블라디미르 대공을 기리는 동상이 세워졌다.
-기사 본문 중-



하나의 사실에 다양한 견해가 존재한다는 점을 이해하면 사고의 폭이 넓어진다. 그리고 나와 다른 관점이나 사고방식을 지닌 사람이 있어도 감정적으로 반발하는 일이 적어질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일이 내셔널리즘 시대에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띠게 된다.

신제국주의가 진행되고 있는 현재, 내셔널리즘이 다시금 소생하고 있다. 합리성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내셔널리즘은 근현대인의 종교라고도 할 수 있다. 종교인 이상, 누구든 무의식 차원이라 하더라도 내셔널리즘을 각자의 내면에 품고 있다. 내셔널리즘의 폭주를 저지하기 위해 역사에는 다양한 견해가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사토 마사루 <흐름을 꿰뚫는 세계사 독해>-


8.

사토 마사루가 언급한 신제국주의 키워드로 보자면 우크라이나는 동방으로의 진출을 꾀하는 서방ㆍ유럽 열강과, 흑해를 거쳐 지중해로 나가고 싶은 러시아가 부딪힐 수밖에 없는 '지정학적 중추국(Pivot state)'이 될 수밖에 없다. 특히 러시아에겐 역사의 심장이고, 유럽에 걸칠 수 있는 발판으로 여기어진다. 미국의 전략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그의 저서 <거대한 체스판>에서 '우크라이나를 잃은 러시아는 유럽에서 멀어져, 더 아시아에 가까운 나라가 된다'며 우크라이나를 향한 러시아의 강한 열망을 설명하기도 했다.


https://n.news.naver.com/article/023/0003663823


우크라이나 정부는 국가 훈장으로 ‘야로슬라프 훈장’이 있고, 흑해에는 러시아의 ‘야로슬라프’ 프리깃함이 떠다닌다. 그런가 하면,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지난 7월 두 나라가 ‘한 나라’ 임을 주장하며 그 근거로 야로슬라브가 최전성기로 키운 ‘키예프 루스’를 들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이웃 벨라루스나 러시아가 자기들의 뿌리를 키예프 루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자신들이야말로 키예프 루스의 ‘직계 후손’이라고 주장한다. -기사 본문 중-


9.

야로슬라프 무드르이는 부친 블라디미르 1세를 이어 키예프의 군주가 되었다. 형제들과의 골육상쟁 끝에 권좌에 오른 그는 부친의 통치 이념을 이어받아 교육과 문화를 활성화하고 경제적 번영을 꾀했다. 또한 "루스카야 프라브다(러시아의 정의)"라는 러시아 최초의 법전을 편찬해 러시아 고대국가의 기틀을 다졌다. 영토 확장과 이웃 국가들과의 외교를 통해 고대 러시아의 전성기를 이끌어낸 인물로 러시아는 물론 우크라이나에서도 존경을 받고 있다. 각국의 화폐는 블라디미르 1세와 야로슬라프 1세가 나란히 자리 잡고 있는 것도 흥미롭다.


왼 쪽 위(우크라이나 1 Hryvnia ), 아래 (1 루블)/ 오른 쪽: 블라디미르 대공, 야로슬라프 1세


10.

처음으로 돌아가 "블라디미르"라는 이름을 되새겨 본다. "미르"라는 단어가 '세계'라는 뜻도 있지만 '평화'라는 의미도 있다. "평평한 대지가 평화를 상징"한다는 의미로 평원은 '평화' 표징 하기도 한다. ("버마/미얀마"라는 뜻도 그러하지요) 그래서 냉전 시대임에도 러시아 우주정거장 "미르" 모든 우주인의 고된 비행을 쉬어갈 평화로운 쉼터가 되었다. 그럼 "블라디미르" '세상의 통치자'라는 의미도 있지만, '평화의 수호자'라는 의미의 부여도 가능. 묘한 이름으로 이어진 '블라디미르'들이 제정신을 차리고, 내부의 진실의 목소리를 들어 미치광이와 어릿광대의 오명을 벗고 평화의 수호를 약속하기를 바란다. 아니면,  다른 블라디미르의 중재나 조정도 기적처럼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천여   부왕의 잔인한 폭정을 바로 잡고, 몽골ㆍ로마제국ㆍ바이킹들의 사면초가에서 비잔틴과의 외교와 그리스도교의 도입이라는 기묘한  수로 평화적 장치를 마련한 본격적인 '국가' 모습을 구축한 '블라디미르 1'처럼 말이다.


영화 <백야(1985)>에 나오는 "블라디미르 비쇼츠키"의 <야생마 (кони привередливые)>로 마무리한다.

https://youtu.be/witNwvewcmg



사족)

 #1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는 것은 잊지 말아야 한다. 미국과 서방이 해결해 줄 문제가 아닌 것이지요. 이유는 다 "돈" 때문이다.

https://news.v.daum.net/v/20220315151742076?x_trkm=t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우크라이나를 적극 지지하며 푸틴에 결투를 신청한 일론 머스크가 사업적으로는 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다는 기사가 나왔다. 미국 경제매체 CNBC는 14일(현지시간) 테슬라가 러시아 재벌 오레그 데리파스카가 설립한 러시아 금속 기업 루살(Rusal)서 2020년부터 알루미늄을 대량으로 구매하고 있다고 소식통을 인용해 보도했다. -기사 본문 중-


#2

비쇼츠키의 완곡과 가사는 아래 참조

https://youtu.be/wZf2hf2UaQ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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