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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이로운 Jun 17. 2020

말하기를 멈출 수 없을 때


말들이 넘쳐나던 때가 있었다.


그 당시, 내 안에서 온갖 말들이 난데없이 생겨났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그냥 내 안에서 오만가지 말들이 솟아올랐다. 그래서 내 마음이고, 머리고, 뭐고, 다 터져 나갈 것 같았다.


그때 내가 분명하게 알고 있는 건, 하나였다. 내가 그것들을 어디에라도 쏟아내야 한다는 것. 그러지 않으면, 문자 그대로, 내가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진짜 내 것인지, 내 것이 아닌지 통 분간되지 않는 말들에 잠식되어서….


말들이 쌓여 나갈수록, 내 속은 뜨거워졌다. 갑갑함이 열기처럼 느껴졌던 걸까. 나는 그것들을 서둘러 배출해야 한다는 조바심을 느꼈다. 그러지 않으면, 내 몸과 마음이 다 타 버릴 것 같았으니까.


제일 위험하다고 느껴지는 부위는 머리였다. 나는 난생 처음으로 내 뇌 건강을 걱정하였다.





결국 나는 아무나 붙들고 아무 이야기들을 되는 대로 지껄였다. 그렇게까지 경황없이 행동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그런 나를 만난 사람들 대부분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였다. 원체 말이 없던 사람이 별안간 정신 나간 사람처럼 주절거리는 광경에서 일종의 공포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었다.


누군가는 갑자기 괴상해진 나를 심히 염려하였다. 누군가는 자기 예언이 성취되는 장면을 목격하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말했다. 내가 너 그렇게 될 줄 알았다고. 나는 알고 있었다고. 너는 말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말을 참는 사람이라는 걸….


누군가는 평정심을 잃어버린 나를 보며, 우월감에 빠져 들었다. 누군가는 그런 나를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그때껏 나에게 악수 한 번 청하지 않았던 사람이, 고름 같은 눈물을 쏟으며 나를 부둥켜안았다. 그러면서 나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혼자 둬서 미안하다고. 아픈 줄 몰랐다고.


나는 내 말들의 물살에 떠밀려,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내 주변 사람들은 그런 나를 새로운 방식으로 대했다. 내가 그동안 맺고 산 관계들이 일제히 그 뒷면을 나에게 보여준 것이다. 나는 내가 만나 온 이들이 가지고 있는 새로운 얼굴들을 보았다.


그 덕에, 진작 정리되었어야 했던 것들이 저절로 정리되었다. 그러니, 어떤 면에서 그 일은 감사한 일이었다.





그 어지럽고 복잡하고 시끄러운 나날 속에서, 나는 당신과도 새롭게 만났다. 당신은 내 갑작스러운 변화에 동요하지 않은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다.


어느 날, 당신이 나에게 말했다. 멈추어질 기미가 보이냐고. 그 말 폭탄의 폭파가 끝날 것 같은 어떤 기미가 보이냐고. 널 비난하려거나 우롱하려고 이걸 묻는 게 아니라고. 다만 묻는 거라고. 니가 누구한테 니 이야기를 토해내고 또 토해내는 동안, 뭔가가 가벼워지는 것 같은 느낌이 있었냐고.


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손안에 쥐고 있던 마이크를 소파에 내려놓았다. 우리는 동전 노래방에 있었다.


그날, 당신은 나를 다짜고짜 그곳으로 데려갔다. “빵 먹고 싶은데…. 아니다, 노래하러 가자.” 하면서.


좁다란 노래방 부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당신은 나에게 말했다. 부르면 삑사리 나는 곡들만 불러 보라고. 진 다 빠질 때까지 계속, 뭐든 부르라고.


나는 당신이 시키는 대로 하였다. 신종 치료법인가, 싶어 하면서.


나는 조금 쉰 목소리로 당신에게 대답했다. 아직은 내 말들의 범람이 끝날 것 같지가 않다고. 그동안 아무것도 가벼워지지 않은 것 같다고. 내 안은 여전히, 그렇다고. 말들이 와글와글한다고.


대답을 다 하고, 나는 내 손바닥에 고인 땀을 바라보았다. 그 즈음, 틈만 나면 내 두 손바닥이 땀으로 흥건해졌다. 원래도 손바닥에 땀이 잘 나는 편이었는데, 그때는 그 증상이 심해져, 손이 내내 끈적거리는 정도였다.


당신이 당신 옷소매로 내 손바닥을 닦으며 “나도 그랬어.” 하였다. “내 경우에는, 그게, 누구한테 얼마나 말해야 끝나는 문제가 아니더라고. 그게 뭐든, 나 자신한테 충분히 말을 해야 끝나는 문제더라고. 그 오만 말들을 다 들어야 하는 사람이, 다른 데 있는 게 아니더라고…. 니가 지쳐서 별말 못하고 있을 때 내가 이 얘기를 해야, 너한테 내 말이 들릴 거 같았어. 니 안으로 내 말이 들어갈 거 같았어. 그래서 오늘 여기 오자고 한 거야. 뭐, 내 경우랑 니 경우가 똑같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나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자기 안의 말들을 자기 자신에게 해 준다니….


당신의 그 말은 기이하면서도 설득력이 있었다. 이마가 조금 식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땀이 증발하며 손바닥이 차가워졌다.


당신은 내 표정 변화를 유심히 살피며, 내 손을 계속 잡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뒤에는 싱긋 웃으며 “미안해. 주제넘었지.” 하였다.


나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러면서 의자에 걸터앉았다. 관자놀이에 맺혀 있던 땀이 턱 쪽으로 흐르는 느낌이 났다.


당신이 내 어깨를 안고 내 등을 다독거렸다. 당신이 나를 병자처럼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당신이 그럴 사람이 아닌 걸 알면서도….





그날 저녁, 당신은 나에게 스프링 노트 두 권을 사 주었다. 파란색 노트 한 권, 노란색 노트 한 권. 일기장들이라고 하면서. 이것들을 쓰고, 말고, 하는 건, 너 알아서 하라고 하면서. 그냥 주고 싶어서 주는 거라고 하면서.


초등학생 때 이후로 일기를 써 본 적 없던 나는, 그 노트 두 권을 받아 들며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싫어서가 아니라, 단순히 생소해서였다. 일기를 쓰며 산다는 관념이 나에게서 사라진 지 너무 오래라.


당신은 다시 나에게 사과했다.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거 같아서 미안하다고.


나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다. 너 정도면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해도 된다고 내가 말하자, 당신은 “싫어!” 하곤 웃었다. 우리가 아무리 친밀해져도, 허물어선 안 되는 벽이 있다고 하면서.


당신이 말했다. 두 사람 사이에 아무런 벽이 없다는 건 절대 축복이 아니라고. 서로에게 절대 전달되지 말아야 하는 것들을 막아 줄 벽이 두 사람 사이에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고. 이를테면 ‘최소한의 예의’라는 벽 따위가.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노트들을 내 가방에 넣었다. 내 가방을 안고 있는 나를 당신이 안았다. 두 팔에 힘을 주고 나를 껴안은 당신은 내 뒤통수를 살살 쓰다듬었다.


아무래도 간호를 받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민이 커지면, 그 연민 때문에 사랑이 어딘가로 밀려날 것 같아서 조금 두려웠다. 당신이 나를 안타까워하다가, 결국 나를 사랑하지 못하게 될까 봐….


그때는 연민과 사랑이 한몸인 줄 몰랐다. 그래서 자꾸 당신에게 괜찮다고, 괜찮다고, 했던 것 같다. 실은 괜찮지 않으면서.


당신은 그마저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이 글은 소설집 《그 사람은 그 운명에 지지 않았다》에 수록되어 있는 단편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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