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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이로운 Jun 22. 2020

자의식 과잉과 에고


“나는 과잉된 자의식을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적당한 자의식을 가지고 있는가.”


요 며칠 동안, 나는 나 자신에게 이 두 가지 질문을 수시로 던졌습니다. 내가 며칠 전에 읽은 명상 칼럼이 나로 하여금 그 자문을 반복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칼럼은 자의식 과잉을 치유하기 위한 명상법을 독자들에게 알리고 있었습니다.


‘자의식 과잉’이라는 단어가 (이제는) 꽤 흔한 단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이것이 정식 심리학 용어는 아니지만요. 공식적으로 분류된 질병도 아니지만요.


많은 사람들이 자의식 과잉 문제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자신의 자의식 수준을 알아차리거나 반성합니다. 그리하여 그 상태에서 비로소 벗어나기 시작합니다.


자의식自意識은, 문자 그대로,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입니다. 내가 나라는 존재를 깨닫는 일입니다. 자기 몸에 대한 알아차림, 자기 감정에 대한 알아차림, 자기 생각에 대한 알아차림….


어떤 학계에서는, 자기 내면 세계에 대한 의식만 자의식으로 치는데요. 나는 이 글에서 자의식을 ‘포괄적인 자기 의식’이라고 치겠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모든 의식을 자의식으로 여기겠다는 것입니다. 내면 세계뿐만이 아니라요.





자의식을 통해, 우리는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 뭘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뭘 되뇌고 있고, 뭘 느끼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자의식 자체는 인간에게 유익한 기능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성장에 필수적인 기능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먼저 스스로를 의식해야만, 스스로를 성찰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건강한 자기 통제와 자기 성숙은 분명한 자기 의식에서 시작됩니다. 자기가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지 분명히 알아야, 그런 자기를 데리고 무언가를 제대로 해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내 몸 사이즈를 분명히 알아야, 내 몸에 잘 맞는 옷을 입을 수 있습니다. 그렇듯, 내가 나 자신에 대해 어느 정도는 분명히 알아야, 내 인생에 적합한 무언가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의식은 일종의 축복입니다.





그런데 자의식이 과잉되면, 사람은 자기 안에 갇히기 시작합니다. 스스로를 과도하게 의식한 나머지, 다른 것들은 의식하지 못하거나 의식하기 힘들어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자기 자신이 지나치게 중요해져서, 그들의 시선은 좀처럼 그들 자신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함께 있는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본인을 끊임없이 추켜세우는 사람은, 그 자리에서 자기 자신만 보고 있습니다. 그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곁에 있는 사람들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본인을 끝없이 비하하는 사람 또한, 그곳에서 자기 자신만 의식하고 있습니다.


과잉된 자의식은 여러 가지 문제들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것이 가장 쉽게 파괴하는 것은 인간관계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듭니다. 과잉된 자의식이 가장 먼저 망가뜨리는 게 의사소통 기능이기 때문입니다.


의사소통이 힘들거나 불가능한 관계는 오래 지속되기 어렵습니다. 나는, 만날 때마다 자기 얘기만 늘어놓는 사람하고는 계속 만나기 어렵다고 느낍니다. 처음에는 좋아하는 마음, 이해하는 마음으로 그런 사람과 마주할 수 있지만요(이 사람이 한두 번만 그러겠지, 라고 생각하기도 하구요).


나는 나라는 존재가 생략되어 버리는 관계를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대화를 원합니다. 수동적인 듣기가 아니라요. 나는 교류를 원합니다. 나는 대나무 숲이 아니라 사람이니까요.


나는 수단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모두가 그렇습니다. 모두가 사람입니다. 살아 있는 사람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항상 잘난 척하는 사람, 항상 우는소리 하는 사람, 항상 분노하는 사람, 항상 자기가 피해자라고 하는 사람과의 관계도 지속하기 어렵습니다. 어쩌다 서로의 고충을 털어놓는 일은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해 주지만요. 지속적으로 일방적인 하소연과 토로는 사람을 무기력하게 하고 지치게 합니다.






어느 때는 내가 과잉된 자의식으로 누군가를 고단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나를 떠나게 만들었습니다. 나는 주로 우는소리를 해서 상대를 힘들게 만들었습니다.


왜인지 모르겠는데, 당시 내 고통을 누군가에게 내보이는 일은 기이한 쾌감을 일으켰습니다. 그 쾌감은 내가 어떤 보상을 받을 때 느껴지는 쾌감과 비슷했습니다. 나는 그 쾌감에 중독되었습니다.





피해 의식과 자기 연민을 앞세우고 있으면, 정작 중요한 일은 아무것도 안 해도 되니 좋았습니다. ‘내가 이렇게 억울하고 아프고 불쌍하고 힘든데….’라는 생각을 하고 있으면, 내 나태함을 간단히 합리화할 수 있었습니다. 그 합리화는 나를 더더욱 수동적인 인간으로 만들었습니다. 나를 한없이 정체시켰습니다.


그 무책임과 게으름은 맛있었습니다. 매번 너무 맛있었습니다.


그러니 내 자의식 과잉은 일종의 회피 수단이었습니다. 나는 과잉된 내 자의식 뒤에 숨어, 내 인생을 정면으로 상대하길 포기했습니다.


나는 자의식 과잉에 관한 그 칼럼을 읽는 내내 에고ego를 생각했습니다. 과잉된 자의식이 에고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에고는 심리학에서 말하는 에고(일반 자아)가 아니라, 종교계와 영성계에서 말하는 에고입니다. 비본질적인 자아, 물질 자아, 허구 자아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내 에고는 나라는 인간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합니다. 그것은 나를 부분적으로 보거나 왜곡시켜 봅니다. 때로는 그조차도 못합니다. 그것은 내가 전혀 아닌 무언가를 나라고 보기도 합니다. 나에 관한 다양한 착각들에 단단히 사로잡혀서요.



과잉된 자의식은 자기 자신을 ‘너무’ 봅니다. 



그래서 이것은 자기중심적인 사고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사고는 자기 객관화를 불가능하게 합니다. 그래서 과잉된 자의식이 기괴한 수준의 피해 의식과 자기 연민을 일으킬 수 있는 것 아닐까요. 이를테면 이런 식으로요.


내가 내 상처만 보고 있으면, 나만 다친 것 같습니다. 내가 내 고난만 보고 있으면, 나만 처량한 것 같습니다. 내가 내 장점만 보고 있으면, 나만 잘난 것 같습니다. 내가 내 존재만 보고 있으면, 나만 특별한 것 같습니다.


내가 상처 덩어리 같고, 불행의 온상 같은 건, 내가 내 상처와 불행을 나와 동일시하기 때문입니다. 내 상처는 나에게 있는 것이지만, 그것이 나 자신인 건 아닙니다. 내가 내 상처에 너무 집착하기 때문에, 나라는 존재와 내 상처를 분별할 수 없게 되었을 뿐입니다.


내 상처는 내 본질이 아닙니다. 그런데 과잉된 자의식은 나를 내 상처와 동일시하게 만듭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본질이 아닌 것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도록 부추기는 것이 에고입니다.


에고는 아름다운 목소리로 속삭입니다. “이게 너야.”라고. 이 생각이, 이 감정이, 이 처지가, 이 물건이 너라고.


에고는 우리가 본질적인 삶의 주인이 되는 걸 끊임없이 방해합니다. 우리가 비본질적인 것들에 휘둘려야 에고 자신이 에너지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를 거쳐 간 수많은 에고들을 떠올려 봅니다. 우월감 에고, 열등감 에고, 분노 에고, 피해자 에고, 자만심 에고, 자기 연민 에고, 직업 에고, 역할 에고…. 그중 가장 파괴적인 에고는 분노 에고와 피해자 에고였습니다. 내 경우에는 그랬습니다.


자의식 과잉을 방지하기 위해, 나는 수시로 바라봅니다. 내가 가진 범상함을요. 타인이 가진 특별함을요. 모두가 평범하면서도 독특한 존재입니다. 평범하기만 한 존재 없고, 독특하기만 한 존재 없습니다. 멀리서 보면 다 똑같은 인간입니다. 나만 유별나지 않습니다.




이 글은 산문집 《온화하고 부드러운 것들》에 수록되어 있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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