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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이로운 Dec 03. 2020

사랑하는 만큼 용서하기 쉬울까

남, 지인, 가족


관계의 깊이 면에서 우리가 용서해야 하는 사람들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됩니다. 남, 지인, 가족. 여기서 말하는 ‘남’은 우리와 이렇다 할 관계가 없는 타인을 의미합니다.


어렸을 때 나는 나와 절친하게 지내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용서하는 것이 아무것도 아닌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누워서 떡 먹기 같은 일. 내가 그 사람들을 사랑하는 만큼 내가 그 사람들에게 너그러울 거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부분적인 사실일 뿐이었습니다. 모든 상황에서 통하는 사실이 아니라요.


별일이 없을 때 나는 내 지인들과 가족들에게 관용적이었습니다. 남을 대할 때보다 훨씬 더. 그런데 내 지인이나 내 가족이 나를 아프게 할 때 나는 그 사람을 남보다도 못한 사람처럼 대했습니다. 기대와 욕구의 좌절 때문이었습니다.


원래부터 나를 대놓고 좋아하지 않았던 사람이 나에 대해 험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내가 1만큼의 충격을 받는다고 가정해 봅니다. 여기서 말하는 ‘1만큼의 충격’은 아주 미미한 충격입니다.


그 사람에 관해서는 내가 아무런 기대와 욕구를 품고 있지 않기 때문에 나에 대한 그 사람의 험담은 나를 흔들지 못합니다. 그것은 나를 아주 잠깐 불쾌하게 만들 뿐입니다. 혹은 나는 그 사람의 그런 행동에 무관심합니다.


그런데 나하고 너무 잘 지내던 사람이 나에 대해 험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1 이상의 충격을 받습니다. 그 사람에 대한 내 기대와 욕구가 좌절되면서 부가적인 충격이 발생되기 때문입니다. 충격이 커지는 만큼 상처도 커집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했던 만큼 그 사람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누군가를 믿었던 만큼 그 사람에게 실망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애착의 양면성을 봅니다.





애착의 두 가지 면


애착은 ‘사랑할 애愛’와 ‘붙을 착着’을 결합하여 만든 단어입니다. 대상을 사랑해서 그것에 딱 달라붙어 있는 것이 애착입니다. 여기서 대상에 딱 달라붙어 있는 것은 마음이겠습니다.


여기저기 붙였다 떼어서 접착력이 다 떨어진 포스트잇을 내 손등에 붙였다가 떼어 봅니다. 내 손등은 멀쩡합니다. 희미한 자국도 남지 않습니다.


그런데 공업용 접착제를 덕지덕지 발라 놓은 수건을 내 손등에 붙였다가 떼어 보면 어떨까요. 그 접착제의 접착력이 너무 강해서 내 손등의 살갗이 다 떨어져 나갈지도 모릅니다.


대상에 대한 강한 애착은 우리에게 그만큼 강한 흥분과 쾌감 그리고 만족감을 줍니다. 그런데 애착의 강도가 높아질수록 그 애착으로 인해 우리가 입게 될 상처도 커집니다.


그래서 붓다는 제자들에게 끝내는 애착에서도 놓여나라고 가르쳤습니다. 싫어해도 괴롭지만 좋아해도 괴롭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싫어하지 않고 아무것도 좋아하지 않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요.


애착을 버릴 수 없으면 애착으로 인한 결과에 잘 대응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분노의 원인 알아차리기


우리가 애착하던 대상이 우리에게 실수하거나 우리를 공격할 때 우리는 분노할 수 있습니다. 그 관계에 대한 우리의 다양한 욕구들로 이루어진 탑이 붕괴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붕괴로 인해 우리가 상처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분노는 위험이나 위협에 대한 생리적인 반응입니다. 일종의 생존 본능인 것입니다. 우리는 취약해지거나 상처 입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분노합니다.


분노 자체는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문제는 과한 분노입니다.





분노 다스리기


분노를 다스리려면 우선 내가 분노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는 그 분노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아보아야 합니다. 그전에 심호흡이나 짧은 산책 등을 통해 격렬하고 뜨거운 에너지를 외부로 좀 배출하는 것도 좋습니다. 의식의 주도권을 되찾기 위해서요.


관계에서 일어나는 분노들 대부분이 ‘욕구의 좌절’에서 옵니다. 나는 그 사람이 그렇게 하길 원했는데 그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으니까 내 마음에서 분노가 일어납니다. 나는 그 사람이 나를 아껴 주길 원했는데 그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으니까 내 마음에서 분노가 일어납니다. 나는 그 사람이 나를 이해해 주길 원했는데 그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으니까 내 마음에서 분노가 일어납니다.


욕구의 좌절은 그 자체로 우리에게 상처를 입힙니다. 그 상처는 분노라는 자기 보호 본능을 작동시킵니다.


내가 내 욕구를 알아차리지 못할 때 나는 ‘저 사람이 나에게 잘못했다. 그래서 내가 분노한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내 분노는 자꾸 커지기만 합니다. 내가 나를 피해자 또는 희생자라고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가 내 욕구를 알아차리고 난 다음에는 ‘내가 저 사람에게 이러이러한 기대를 품었다. 그런데 저 사람이 그 기대에 부응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분노한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분노의 원인이 ‘저 사람’에게 있지 않고 ‘내 욕구’에 있음을 알아차리면 내가 내 분노를 다스리기가 비교적 수월해집니다. 내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 그 사람의 의무가 아니라는 걸 내가 인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본인이 원하는 대로 살아갈 권리와 자유를 가진 독립체입니다.




이 글은 자기 계발서 《용서하기 그리고 용서받기》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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