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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단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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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이로운 Jun 28. 2016

역사학자

   “오늘 어디까지 보려고?”

   벙거지 모자 쓴 교수가 동료에게 물었다. 잘 알려지지 않아 인적이 거의 없는 그곳은 중국의 작은 성이었다. 동료는 젖은 셔츠 자락을 손으로 펄럭거리며 교수를 돌아보았다.

   “그래도 두 군데는 더 가 봐야지. 일정도 짧은데.”

   동료가 검은 가죽 손목시계 내려다보며 말했다. 오후 2시 16분, 점심 식사로 먹은 허옇고 기름진 국수가 이미 소화된 지 오래였다. 교수는 배낭을 벗어 손에 쥐고 다시 걸었다. 성벽이 야트막해 산 아래 동네가 한눈에 굽어 보였다. 3층 이상 건물은 없었다.

   “참 못해 먹겠네…….”

   교수가 배낭을 다른 손에 바꿔 쥐며 말했다. 그들은 성벽에 기대 물을 나눠 마셨다.

   “왜, 이제 나이가 들어서 몸이 안 따라 주나?”

   동료가 물병 뚜껑을 닫으며 느물댔다. 그의 젖은 셔츠 색깔이 아까보다 진해져 있다.

   “몸이 아니라 마음이 안 따라 주네.”

   “마음?”

   “그래.”

   “마음이 어째서?”

   “역사 교수가 이런 말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되네.”

   “내가 뭘 말했다고?”

   “하고 싶은 말에 직업이 무슨 상관인가 말이야, 이 사람아.”

   “뭐 아무튼, 덧없는 것들 보기가 영 힘드네.”

   교수가 고갤 떨어뜨리며 말했다.

   “덧없는 것들…….”

   동료가 교수의 말을 되뇌었다.

   “쓰임도 없이 흔적만 남아 있는 것들 보면 자넨 속이 꽉 틀어 막히고 그렇지 않나?”

   “자네 때문에 앞으로 좀 그럴 거 같긴 하네.”

   동료가 성벽에서 등을 떼고 장난 걸듯 말했다. 성벽에 짙은 땀자국이 둥글게 묻어 있었다. 교수는 말이 없었다. 동료가 입을 열었다.

   “우리 처지도 그렇게 될까 봐 그런 맘 드는 건가? 언젠가 시대에서 밀려나고 잊어지고 찾는 이도 없고 쓸모도 없이 점점 닳아가는 신세…….”

교수가 고갤 들어 동료를 바라보았다. 교수가 희미하게 “뭐, 그렇지.” 하고 말했다.

   “자네는 책 속 공부만 실컷 해서 그러네.”

   동료가 교수의 오른쪽 팔뚝을 당기며 말했다. 둘은 왔던 길로 되짚어 걷기 시작했다.

   “또 샌님 타령이구만.”

   “역사가 실제 존재했던 사실만 파고드는 학문인가?”

   동료가 제법 진중한 어조로 물었다. 교수는 어깨를 살짝 으쓱하며 동료와 걸음 속도를 맞추었다.

   “역사가 가르쳐 주는 가장 큰 유산은 순환이네.”

   동료가 등에 달라붙은 셔츠 자락을 떼며 말했다. 교수가 눈두덩이를 긁적거리며 고갤 조금 끄덕여 보였다.

   “기울지 않는 역사가 어디 있던가. 자기 땅 안 잃고 건재해도 그 속엔 늘 흥하고 망하는 각본이 반복되지 않던가, 말이야. 자넨 무너진 성벽에서 덧없음을 느끼지만 난 좀 다르네. 난 거기서 새 생명이 꿈틀거리는 리듬을 듣네. 한 역사가 기울었으니 새 역사가 일어날 거 아닌가.”

   “그거랑 인생지사랑 뭔 상관인가.”

   “무관할 이유는 또 뭔가? 새 역사는 지난 역사의 단점을 보완하고 장점을 키우며 발전하네. 지난 역사를 지닌 채로 나아가. 그걸 자네 자식들이 하고 있잖은가? 자네 일부분은 세상에 영원히 남을 텐데 어찌 그게 덧없는 일인가, 말이야.”

   계속 ‘말이야.’가 따라붙는 걸 보니 동료가 어지간히 흥분했나 보다고 교수는 생각했다. 동료가 굳은 얼굴을 풀고 교수의 어깨를 툭 쳤다. 교수는 “하아.” 하고 숨을 내뱉으며 성벽 너머로 난 나무 한 그루를 쳐다보았다.

   “인간미라곤 없는 사람.”

   교수가 동료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아니, 나보다 인간적인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런 망발인가?”

   동료가 비죽 웃으며 양손바닥을 하늘로 치켜들었다. 

   “인생이 시들어 가는 게 무섭지도 않냐, 말이야.”

   교수가 동료의 말투를 따라했다.

   “인생이 1000년쯤 됐어도 우린 인생 끝에 똑같은 두려움에 시달리겠지.”

   동료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까진 뭐 새 생명의 리듬을 듣는다더니?”

   “이 사람아, 나라고 늙는 게 뭐 반갑기만 한 줄 아나? 하지만 늙어야 삶이 제대로 보이네. 젊고 푸른 게 얼마나 싱그러운 줄도 알고. 어쨌든 우리도 그 시절을 가져 보지 않았는가, 말이야. 그 가치를 똑바로 이해하는 시간이 지금이라고 보네. 좋았던 때를 막연히 그리워하는 게 아니라 한때 그걸 누려 본 사람으로서 삶의 전성기가 주는 아름다움을 깊이 음미하는 시간……. 그리고 우리가 아직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많은데 시든다는 그 무시무시한 표현을 쓰는가? 팔순 노인도 아니고.”

   동료가 교수의 모자챙을 톡 건드리며 말했다. 두 사람이 성 입구에 다다랐다. 찢어진 노란 파라솔 밑에서 입장료 받던 젊은이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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