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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단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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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이로운 Jun 30. 2016

스페인 가는 비행기

   비행기는 어느덧 주황색 구름 물결 속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자동 조종 모드에 들어간 비행기는 인공위성의 신호에 따라 도착지를 향해 미끄러져 가고 있었다. 조종사와 부조종사는 직원 용 휴게실 2층 침대에서 눈을 붙이고 있었다.

   비행기는 마치 건물처럼 2층 구조로 이뤄져 있었다. 짐칸까지 합하면 3층이라 볼 수도 있었지만 짐칸을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비행기 2층 왼쪽 통로에 은발의 노신사가 앉아 있었다. 그는 2인석을 통째로 예매해 그 공간을 혼자 사용했다. 노신사는 창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노신사의 눈동자가 주황색 구름 무늬로 일렁거렸다.

   비행기 2층 앞쪽 벽에는 문이 두 개 있었다. 왼쪽 문은 조종실로 통했고 오른쪽 문은 직원용 휴게실과 각종 비품실로 통했다. 조종실 문에는 출입금지 딱지가 붙어 있었다. 오른쪽 문이 열렸다. 그 너머에서 스튜어디스 한 사람이 나왔다. 그녀는 가슴까지 오는 높이의 크림색 음료 카트를 밀고 있었다.

   스튜어디스의 카트가 노신사 자리 옆에 멈추었다. 그녀는 쪽지 하나를 꺼내 노신사가 주문한 샴페인 브랜드를 확인했다. 가느다란 샴페인 잔에 샴페인이 담겼다. 노신사가 아무 대답 없을 걸 알았기에 스튜어디스는 빈자리에 간이 식탁을 펴고 샴페인 잔을 올려 두었다. 노신사는 그녀의 그 모든 기척을 느끼고 있었지만 아무 내색 없이 바깥만 바라보았다. 구름 색깔이 아까보다 어두웠다.

   스튜어디스의 카트가 소리 없이 멀어졌다. 노신사는 고갤 돌려 샴페인을 넘겨다보았다. 잔 속에서 노란 기포가 떠오르고 있었다. 노신사는 그것을 한 모금 홀짝거렸다. 한평생 그 샴페인만 마셔 온 듯 제법 능숙하게 주문했지만 사실 처음 맛보는 샴페인이었다. 아내와 큰딸이 좋아하는 샴페인이라 이름을 외우고 있던 것이었다.    

   노신사는 친구가 살고 있는 스페인의 마드리드로 가는 중이었다. 친구의 결혼식이 내일 오후 1시에 열린다. 노신사는 처음 친구 전화 받던 그 날을 떠올렸다. 2주 전이었다.


   그때 노신사는 정원에 새 흙을 다져 넣고 있었다. 정원 손질은 노신사의 오랜 취미였다. 아내가 현관문을 밀고 나와 전화 좀 받아 보라 재촉했다. 아내는 친구 이름을 언급하며 조용히 웃었다. 노신사는 장갑을 벗어 삽 옆에 내려놓고 거실로 들어섰다. 거실과 안방 사이에 있는 복도 벽면에 전화기 테이블이 있었다. 노신사는 수화기를 귀에 가져다 댔다.

   “여보세요.”

   “전화 받는데 무슨 한 세월씩이나 걸리나!”

   “마당에 있었네. 자네가 웬일인가? 내가 전화 안 하면 절대 먼저 연락하는 법 없는 양반이.”

   “나 결혼하네.”

   “뭐?”

   “결혼하네.”

   “그 앞에 ‘나’라고 했나?”

   “그래, 나 결혼하네.”

   노신사는 넋 나간 표정으로 거실을 돌아보았다. 아내가 팔짱 낀 채 싱긋 웃고 있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잔기침 소리가 흘러나왔다.

   “왜 말이 없나?”

   “정신도 없네.”

   “초대하려고 전화했어.”

   “자네 진짜 결혼하나?”

   “내 참, 반응하고는……. 서운하구만. 자네까지 이럴 줄은 몰랐는데.”

   “아니, 놀라서 그러네. 놀라서. 자네를 어떻게 판단하는 게 아니라…….”

   노신사가 허둥대며 말했다. 그의 왼쪽 발이 반 발짝 뒤로 물러났다. 

   “장난이네. 이 나이에 남들 반응이며 판단이 뭐 중요하겠나. 그래도 내 행복에 진심으로 동참해 줄 사람들하고 같이 시간 보내고는 싶네. 시간 되면 오게. 자네 핸드폰으로 시간이랑 주소 찍어 보내 놨으니까.”

   친구는 뭐라고 더 재잘대더니 전화를 툭 끊었다. 한결같은 통화 패턴이었다. 노신사는 검지로 코밑을 문지르며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일흔셋에 결혼이라…….

   “다녀오세요.”

   아내가 노신사 어깨에 손바닥 얹으며 말했다.

   “당연히 가야지. 가는데……. 아, 내, 이 친구 참…….”

   노신사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내도 얼굴을 조금 흔들며 웃었다.

   “작년엔 서핑 배우다 팔을 부러뜨리더니 이제 새 장가 든다는구만. 볼수록 대단해.”

   노신사가 흙 묻은 팔뚝을 스웨터에 닦으며 말했다. 

   “나이 없이 산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죠.”

   아내가 어깰 으쓱하며 주방으로 걸어 들어갔다.    


   비행기 밖은 이제 한껏 어둑해졌다. 노신사는 빈 샴페인 잔을 간이 식탁에 내려놓았다. 노신사는 친구를 처음 만났던 그 전기 케이블 회사를 생각했다. 친구는 노신사가 입사한 지 얼마 안 돼 회사를 그만두고 작은 상가를 얻었다. 친구는 그곳에서 핫도그 장사를 했다. 이후로도 친구는 내키는 대로 직업을 바꾸었다. 푸드 트럭 하며 전국을 일주했고 타이어도 팔고 스킨스쿠버 강사도 했다. 친구의 직업은 3년 반에서 4년 주기로 계속 바뀌었다. 친구가 그렇게 지내는 동안 노신사는 그 전기 케이블 회사를 계속 다녔다. 공로상도 받았다. 그리고 은퇴 후 아내와 소일거리 하며 살고 있었다.

   사실 노신사는 친구를 철딱서니 없고 한심한 녀석이라고 자주 생각했다. 자기 자신을 못 찾아서 이리저리 떠돈다고 여겼다. 그런데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같이 어울려 다니던 친구들 중 자기 자신을 제일 빨리 찾은 게 그 친구였던 듯하다. 자기 자신을 찾는다는 건 한 가지 목표를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게 아니라 스스로에게 모든 걸 경험할 자유를 주는 것이었다.

   노신사는 샴페인을 한 잔 더 마시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2층 천장 아래 설치된 전광판에서 ‘도착지까지 8시간’이라는 글자가 반짝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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