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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단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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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이로운 Jul 18. 2016

나 만나 보지 않을래요?

   어둠 속에 묻힌 잔디밭으로 빨간 슬리퍼 신은 발이 들어섰다. 키가 170cm쯤 돼 보이는 사람 형상이 잔디밭 입구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림자와 합쳐져 그렇게 보일 뿐이지 실제 키를 정확히 가늠할 순 없었다.

   그곳 잔디밭은 커다란 사거리 옆에 위치한 고등학교 운동장이었다. 야간 자율학습을 운영하지 않는 고등학교여서 오후 6시 이후로 모든 건물이 텅텅 비었다. 학교 측에서는 지역 주민들을 위해 방과 후에 운동장을 개방했다. 곧 7시 30분이 되면 테니스장에 세워진 조명이 켜질 것이다. 그때까지 아직 10분 정도 남았다.

   사람은 슬리퍼를 벗어 잔디밭 둘레 우레탄 트랙에 가지런히 놓았다. 잔디밭 위생이 그리 청결하지 않다고 들었지만 이따 수돗가에서 씻고 가면 그만이었다. 사람이 잔디밭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잔디밭은 오전에 내린 빗물을 아직 머금고 있었다. 발바닥으로 축축한 느낌과 까슬까슬한 느낌 그리고 조금 차가운 느낌까지 고스란히 전해졌다. 사람의 시선 끝에 하얀 축구 골대가 어렴풋이 보였다. 저기까지 천천히 걸어갔다 오면 얼추 10분쯤 되리라.

   운동장에 불 켜진다고 무슨 큰일이야 나겠냐마는 캄캄한 곳에 혼자 좀 있고 싶었다. 무엇보다 여기서 7시 30분에 만나기로 한 이에게 귀신처럼 맨발로 걸어 다니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자기가 지금 심란하다는 걸 들키고 말 것이기 때문이었다.

   사람은 ‘한 20분 더 일찍 나왔을 걸.’ 하고 생각했다. 이따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점점 자신이 없었다. 전략을 짜 보기에 10분은 턱없이 부족했다. 아까 현관에서 나설 때까지만 해도 할 말이 분명하다고 확신했는데……. 이제라도 그냥 미안하다고 하면 간단히 해결될 거라고 예상했는데……. 이런 종류의 거절은 처음이라 사람은 가슴이 갑갑했다. 맞게 하고 있는 건지 자꾸 의심스러웠다.

   이렇게 거절하는 게 두 사람을 위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했는데 과연 정말 그럴까? 사람은 걸음을 멈추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런 채 양쪽 검지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진짜 거절하고 싶은 거야, 아니면 그냥 무서운 거야…….”

   사람이 입을 조금만 열고 혼잣말을 우물거렸다. 사람은 사흘 전에 들은 말을 떠올렸다. “나 만나 보지 않을래요? 교제하는 의미로.” 이따 7시 30분에 만나기로 한 상대가 그 말을 했었다.   


   이런 일이 사람에게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사람은 대외적으로나 대내적으로나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늘 여러 가지 관계가 사람을 따라다녔다. 연인 관계로 발전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항상 있었다. 중요한 건 사람이 그 관계들에 별 관심 없었단 거지만……. 이렇게 연인이 되자고 하는 말을 들을 때 사람은 보통 그 자리에서 딱 잘라 거절했다. 예의 바르지만 여지를 주지 않는 태도로.

   그런데 이번에 사람은 그 자리에서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멀뚱히 서서 목에 건 사원증만 매만지고 있었다. 사람 주위에 흐르던 시간이 그 사원증 속으로 모두 빨려 들어가 버린 것 같았다. 잠깐 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상대는 그런 사람에게 한 발짝 다가와 사람의 얼굴을 살폈다. “미안.”이라고도 말했다. 사람은 뭐가 미안하냐고 묻고 싶었지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쩌면 미안할 일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상대는 다시 한 발짝 물러서서 “대답하고 싶을 때 대답해 줘요.”라고 말한 뒤 돌아섰다. 그로부터 7분이 지나서야 사람 손에서 사원증이 떨어졌다. 막혀 있던 숨통도 트였다. 

   사람은 어제 친구를 만났다. 친구에게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친구는 인상을 쓰며 사람의 허벅지를 때렸다. 너 같은 사람한테 그런 상대는 ‘땡큐’라고 말하며 친구는 사람을 들볶았다. 사람은 의자를 뒤로 조금 물려 앉으며 “땡큐인 그런 사람이 날 왜 만나냐고, 내 말은.” 하고 말했다. 친구는 자신이 방금 말실수 했다고 생각하며 수습할 말을 찾았다. 하지만 끝내 별다른 말을 건네주지 못했다. 사람은 맥주잔을 놓고 테라스 밖으로 걸어 나갔다. 친구는 사람을 붙잡으려 했으나 사람은 “그냥 피곤해서. 먼저 갈게. 신경 쓰지 마.” 하고 말했다.    


   테니스장 너머에 있는 커다란 파리채처럼 생긴 조명이 켜졌다. 사람은 축구 골대를 돌아 다시 슬리퍼 쪽으로 걷고 있었다. 날개뼈 밑까지 찰랑거리는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과 몸에 꼭 맞는 흰 티셔츠 그리고 검은 반바지가 그 형체를 드러냈다. 7시 30분인가 보았다. 교문 안으로 누군가 뛰어 들어왔다. 그였다. 

   그녀는 일부러 걸음을 재촉하지 않았다. 맨발이건 뭐건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해야 할 말을 도무지 찾아낼 수가 없었다. 그는 그녀의 맨발을 보더니 슬리퍼를 찾아 그 옆에 섰다. 그런 채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저 안 늦었어요. 딱 정각에 왔는데.”

   검은색 트레이닝복 차림의 그가 말했다. 그녀가 「운동할래요?」라고 문자 메시지를 시작했기 때문에 두 사람 차림이 그랬다.

   “알아요. 안 늦었어요.”

   “무슨 운동할래요? 제 차에 운동기구, 공 이런 거 한가득 실어 왔는데. 말만 해요.”

   “걸어요, 걸어.”

   그는 웃는 얼굴로 “넵.” 하고 대답하며 신발을 벗었다.

   “뭐하시는 거예요?”

   “걷자면서요. 저도 맨발로 걸을래요.”

   그녀는 슬리퍼를 신다 말고 다시 잔디밭에 올라섰다. 그는 자신의 운동화와 그녀의 슬리퍼를 한데 뭉쳐 쥐고 뒷짐을 지었다.

   “제가 한 말은 생각해 봤어요?”

   그가 그녀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의 부스스한 머리카락이 조명을 하얗게 반사시켰다.

   “그게…….”

   “확신 들 때까지 대답 안 해도 돼요.”  

   “만약 그 확신이 거절이면요?”

   “음……. 그래도 달라지는 건 없어요.”

   “뭐가요.”

   “제 마음이요. 고백 성공하고 실패하는 거 따라 잇고 끝낼 만큼 가볍지가 않아서.”

   그는 작은 헛기침과 함께 학교 건물을 돌아보았다.  

   “제가 이런 고리타분한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왜 저예요?”

   “왜가 왜 붙지? 사람이 사람 좋아하는데 왜가 붙을 이유가 어디 있어요. 내가 물어 봅시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별로 바람직한 조건을 가진 게 아니잖아요. 제가 상대적으로…….”

   “이게 일입니까?”

   “네?”

   “그렇잖아. 일도 아닌데 조건을 왜 따지냐고. 그리고 그 조건이 뭐가 어때서요. 그게 자기 좋다는 사람한테 할 소리예요? 내가 좋아하는 사람 그렇게 함부로 깎아내리지 마세요. 그거 되게 무례한 거예요. 본인 마음을 말해 달라구요, 내 말은. 내 마음 어떤지 추측하지 말고. 내 마음은 내가 이미 잘 알아요.”

   그가 조금 발끈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아유, 됐어요. 다음에 얘기해요. 아직 정리 덜 된 거 같은데. 입씨름 하지 말고 걸어요, 우리.”

   “네.”

   “밥은 먹었어요?”

   “아까 회사에서…….”

   “그럼 우리 커피 마실까요?”

   그가 얼굴에 평정을 되찾으며 말했다. 그녀는 왼손으로 자신의 머리 위쪽을 짚으며 “네.” 하고 대답했다. 오늘 중으로 또렷한 대답이 나올 거 같지 않았다.

   사실 그녀는 누가 좋고 싫고 어떻고를 단숨에 판가름 낼 수 있다고 믿으며 살아 왔다. 실제로 여태까지는 그런 즉각적인 판가름이 가능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 판가름 기능이 순 먹통이었다. 괜히 상대 애간장 태우며 시간 질질 끈다고 비난했던 그 짓을 자신이 하고 있었다. 그 짓을 막상 하고 보니 깨달아지는 게 있었다. 고의적으로 그러는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누군가 자신을 좋아하고 기다리는 기분 즐기려고 대답 미루는 게 아니라 머릿속이고 마음속이고 아득하기만 해서 좀처럼 대답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누군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이 인생을 거꾸로 뒤집어 버려서 그 어떤 판단도 제대로 서질 않는 경우가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 동안 지켜온 관계의 모든 법칙이 깨져 버려서 그 사람과 같이 있을 때 마주보는 거리와 걸음걸이 간격까지 하나하나 다 새로 고민해야 하는 상황이 정말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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