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단편 소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이로운 Jul 27. 2016

나 여기서 기다릴까?

   많은 것들은, 아니, 세상 거의 모든 것들은 순간의 선택으로 이루어진다. 별로 안 내켜서 아무리 주저하며 긴 시간을 보내도 찰나의 선택은 우리 인생을 저 앞의 새로운 곳으로 훌쩍 데려다 놓을 수 있다. 그 선택이 우리가 간절해 원했던 것이었든 그저 즉흥적인 것이었든 상관없다. 모든 선택은 언제나 그만한 결과를 가지고 올 뿐이다.

   선택과 행동은 생각과 마음보다 언제나 강력하다. 그리고 결정적이며 단정적이다. 사람들은 선택한 사람이 선택하기 전까지 가졌던 생각과 마음에 별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선택한 사람이 그런 선택을 내렸다는 것만 생각하고 그것에만 마음 쓸 때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때론 누군가의 선택이 ‘그 사람은 그런 사람’이라고 설명하거나 정의해 주기도 한다. 연인과 헤어지기로 선택한 사람은 연인과 헤어지려는 사람이기만 할 확률이 높다. 수많은 날들을 고심하고 갈등하고 망설였던 사람 내지는 아주 많이 상처 받았던 사람으로 기억될 확률은 희박하다. 선택은 아주 잠깐이지만 선택은 그걸 선택한 사람의 모든 삶과 성격을 제멋대로 판단하도록 유혹한다. 그런 선택을 내렸으니 그 사람은 틀림없이 그런 종류의 사람일 거라고.    


   남자는 그런저런 생각을 곱씹고 있었다. 손에 든 테이크아웃 잔이 아까만큼 뜨겁진 않았다. 남자가 왼쪽으로 고갤 돌렸다. 낡은 벤치 빈자리에 눈송이가 내려앉고 있었다. 

   “왜?”

   남자의 친구가 옷깃 여미며 남자를 불렀다. 옷자락 추스르는 손끝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친구 입가에서 옅은 입김이 흩어지고 있다. 친구가 벤치 빈자리에 앉았다. 녹지 않고 그대로 얹히던 눈송이들이 남자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남자가 고갤 들고 친구를 바라보았다. 남자의 입술 색깔이 아침보다 어두워져 있었다.

   “안에서 얘기 안 하고 왜. 무슨 일 있어?”

   친구가 다시 물었다. 그들은 오래된 친구이기도 했지만 같은 건물에서 일하는 일종의 동료이기도 했다. 그들이 한 건물에서 일하게 된 건 우연이 아니었다. 남자가 새로 일자리 구하는 김에 친구 있는 쪽으로 온 것이었다. 지난 일자리도 이 건물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빌딩이었다. 그들은 항상 그런 식으로 서로의 가까이 머물렀다. 현재 남자는 3층 서관 법률사무소에서 일하고 친구는 3층 동관 한의원에서 일한다. 남자는 사무직 직원이고 친구는 한의사다. 

   “그냥. 이거 마시라고.”

   남자가 허벅지 옆에 놓아 둔 테이크아웃 잔을 친구에게 건넸다. 하얀 잔 속에는 카모마일 차가 들어 있었다. 

   “야, 별 얘기 아니면 들어가. 들어가서 얘기해. 얼어 죽겠다.”

   친구가 받아든 잔을 허공에 흔들어 보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아니, 잠시만.”

   “왜? 왜 이래, 오늘? 아침에도 이상한 표정 하고 귀신처럼 돌아다니더니.”

   남자는 대답 대신 손에 든 잔을 벤치에 내려놓았다. 무슨 말을 어디서부터 꺼내면 좋을까. 남자가 친구 쪽으로 고갤 돌리다 말고 다시 앞을 내다보았다. 

   “뭐냐구.”

   친구가 채근하듯 말하며 남자 쪽으로 조금 다가앉았다. 

   “좀만 기다려 봐.”

   “할 말이 있긴 한 거야?”

   “응. 근데 정리가 안 되네.”

   “뭐길래 그래. 겁나게.”

   “겁이 나?”

   남자가 눈꺼풀을 조금 들어 올리며 친구를 응시했다.

   “응?”

   “방금 겁난다며. 뭐가?”

   “니가 지금 심각하잖아.”

   “내가 심각하면 겁이 나?”

   “뭐? 왜 이러실까, 진짜…….”

   친구가 끝말을 얼버무리며 다리를 꼰 뒤 벤치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등이 좀 차가웠지만 아까보다 춥진 않았다. 친구는 시선의 초점을 또렷이 하고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의 굵고 새까만 머리카락과 빨개진 귓바퀴와 남색 재킷과 다갈색 눈동자를 차례로 들여다보았다. 남자는 친구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고갤 돌렸다. 남자의 모습은 평소와 똑같았지만 남자가 내뿜고 있는 분위기는 생전 처음 느껴지는 것이었다.

   “아, 정리가 안 되네…….”

   “중요한 얘기야?”

   “어, 중요해.”

   “오늘 꼭 해야 되는 얘기야?”

   “그건 아닌데…….”

   “나 여기서 기다릴까?”

   “응, 아니, 춥다고 했잖아.”

   “기다려, 말아. 그것만 얘기해.”

   “3분만 기다려 봐.”

   “알았어. 말 안 걸게. 정리해.”

   친구가 테이크아웃 잔 뚜껑을 열며 정면을 바라보았다. 왜 방금 겁이 난다고 말한 걸까. 친구는 낯선 리듬으로 뛰고 있는 가슴의 박동을 차근차근 느껴 보았다. 지금부터 약 10분 내지는 15분 간 벌어질 상황을 예측해 보고 싶었지만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언젠가 이런 상황이 올 것 같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이런 상황’이라는 게 정확히 어떤 건지 설명할 순 없었다. 그냥 막연히, 막연히, 이런 상황이 올 것 같았다. 뭘까. 뭐가 벌어지고 있는 걸까. 왜 이 상황이 갑작스러우면서도 익숙한 걸까. 조금은 반갑기도 한 걸까.     


   “지금 우리 관계 어떻게 생각해?”

   남자가 구부정하던 허릴 곧게 펴며 친구에게 물었다. 여전히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친구는 찬바람에 굳어진 몸을 조금씩 움직이며 남자의 옆얼굴을 넘겨다보았다.

   “쉽게 대답하기 힘든 질문 같은데.”

   “왜?”

   “그럼 넌 쉬워?”

   “아니.”

   친구가 턱을 약간 갸웃거리며 벤치 맞은편 느티나무를 바라봤다. 잎 다 떨군 느티나무는 속으로 선명한 나이테 하나를 새기고 있을 것이었다. 사람에게도 나이테가 새겨진다. 사람에게는 인연이라는 나이테가 인생 안쪽으로 둥글게 새겨진다. 나무는 1년에 나이테를 몇 가지씩 얻는다. 친구는 다시 남자를 응시했다. 그럼 이 사람은 내게 몇 겹의 나이테, 몇 겹의 인연인 걸까. 난 지금 뭘 겁내고 있는 걸까.

   “나는 겁이 좀 나는데.”

   남자가 웃을 듯 말 듯 입술을 움직이며 말했다.

   “뭐가?”

   “이 관계가.”

   “왜?”

   “내가 뭔가를 말하면 깨져 버릴까 봐. 이 관계가 깨져 버릴까 봐. 쉽게 깨질 관계 아니라고 믿어 왔는데……. 내가 말하고 싶어 하는 이 뭔가를 결국 말하게 되면 너무 쉽게 깨져 버릴 거 같다.”

   친구는 대답 대신 고개를 아래로 떨어뜨렸다. 난데없는 짐작이 왔다. 남자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불현듯 가늠되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를 알았다. 남자가 하고 싶어 하는 말이 무엇인지 자신은 너무 오래 알고 있었으며 어쩌면 자신도 그 말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음을. 아니면 자기 혼자 그 말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 모든 건 어디까지나 짐작일 뿐이었다.

   두 사람은 이것을 영원히 짐작으로만 남겨 둘 수도 있었다. 

   “그 뭔가가 뭔데?”

   친구가 어렵사리 입을 떼었다. 멀쩡히 뜨고 있긴 했지만 두 눈을 질끈 감는 심정이었다. 짐작 밖으로 한 발짝 걸어 나온 것이다.

   되돌아보면 이런 상황이 이번이 처음은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남자는 친구에게 친구는 남자에게 은근하게 뭉근하게 어렴풋하게 물어 왔던 것 같다. 이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 관계가 어떻게 이어졌으면 좋겠는지. 이 관계를 새롭게 바꿀 의향이 있는지. 서로를 친구 말고 다른 것으로 부를 의향이 있는지.

   의식 수준에서든 무의식 수준에서든 두 사람은 이미 알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서로에게 미처 표현되지 못한 나머지 마음을. 서로에게 갖는 어떤 특별한 종류의 모든 감정들을. 그 나머지 마음과 특별한 감정들이 말과 행동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언제나 터져 나온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직까지 이 모든 것들은 어디까지나 짐작일 뿐이다. 친구는 평소보다 눈을 빠르게 깜박거리며 남자를 쳐다보았다 다른 곳을 쳐다보았다 했다. 

   많은 것들은, 아니, 세상 거의 모든 것들은 순간의 선택으로 이루어진다. 그들은 막 그 순간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진짜 가슴으로 마주하겠다는 그 찰나적 선택은 어쨌거나 그들에게 결과를 가져다 줄 것이다. 이 10분 내로든 며칠 내로든.




www.parkdabin.modoo.at

매거진의 이전글 이상한 동물병원 직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