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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단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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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이로운 Jul 29. 2016

니가 가진 거

   “나 재미없어.”

   여자가 뒷덜미를 긁더니 느닷없이 말했다. 금방 나온 두툼한 소프트 아이스크림 모양 참 예쁘다고 두런거리던 일행이 여자를 바라보았다. 여자는 방금 꺼낸 말이 반쯤 혼잣말이었는지 갑작스럽게 쏟아진 시선을 주체 못하고 고갤 약간 돌렸다. 창밖 가로수가 누렇게 바랜 은행잎을 쉼 없이 떨어뜨리고 있었다. 바람이 부나 보다. 햇살에 잘 마른 잎사귀에선 항상 좋은 냄새가 나는데.

   “재미는 무슨 재미야. 잠꼬대 하냐.”

   일행 중 한 사람이 여자에게 놀리듯 말했다. 여자는 테이블 쪽으로 다시 고갤 돌리고 민망한 듯 웃어 보였다. 여자가 오른손으로 왼쪽 어깰 잡으며 입을 열었다.

   “그냥……. 나 재미없잖아.”

   일행은 여자의 말뜻을 좀체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이 재미없다는 저 말이 여자에게 긍정적인 의미인지 부정적인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여자의 표정은 담담한 것 같기도 하고 체념적인 것 같기도 했다. 일행은 여자에게 함부로 동의해 줄 수도 없었고 섣불리 반박해 줄 수도 없었다. 여자 앞에 놓인 푸른색 도자기 잔 속에서 아이스크림이 녹고 있었다.

   “근데 그게 왜?”

   일행 중 한 사람이 여자에게 물었다. 나머지 일행은 그 질문이 탁월했다고 생각하는지 다들 비슷한 표정을 지으며 여자 쪽을 응시했다. 여자가 은색 티스푼으로 잔 속 아이스크림과 에스프레소를 뒤섞으며 말을 이었다. 

   “재밌는 사람이 좋잖아.”

   여자의 대답에 몇 사람이 웃었다. 몇 사람은 눈이나 콧등을 찡그리며 여자에게 말 걸고 싶은 기색이 되었다.

   “왜, 누가 너 재미없대?”

   여자에게 말 걸고 싶어 하던 사람들 중 여자와 가장 가까이 앉은 이가 여자에게 물었다. 그는 “재밌는 사람이 좋잖아.” 하던 여자 목소리 뒤에 깔린 상처와 슬픔의 기미를 읽었다.

   “아니.”

   여자가 입속에 넣은 아이스크림을 우물거리며 뭉갠 발음으로 대답했다.

   “그럼?”

   “그 사람은 재밌는 사람이 좋대.”

   테이블 둘레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여자는 아이스크림 녹은 부분을 스프처럼 떠먹었다. 일행은 서로 오묘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 사람이 너한테 그러디? 자긴 재밌는 사람 좋다고?”

   여자를 포함한 일행 중 가장 대가 센 사람이 여자에게 물었다. 여자는 잔 가까이 얼굴을 묻은 채 얼굴을 저었다. 여자가 지금껏 발언한 것들을 모아 보자면 이렇다. ‘나는 재미없다. 재밌는 사람은 좋다. 누가 내게 재미없다고 한 건 아니다. 다만 그 사람이 재밌는 사람을 좋아할 뿐이다. 하지만 그 사람이 내게 직접 자기가 재밌는 사람 좋아한다고 한 적은 없다.’

   몇몇 사람은 답답한 표정이 되었다. 몇몇 사람은 그게 뭔지 알 만하다는 표정이 되었다. 스치듯 내뱉은 누군가의 짧은 한 마디가 자기 인생의 옳고 그름을 결정해 버리는 순간을 겪어 보지 못한 자들과 겪어 본 자들의 표정 차이였다. ‘그 사람은 그런 게 좋다고 하던데 만약 난 그런 걸 안 가지고 있음 어떡하지?’의 걱정으로 한동안 가슴 저려 본 적 없는 자들과 있는 자들의 입장 차이였다.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이 좋다고 하는 걸 이미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그에게 사랑 받을 만한 재료를 하나도 갖지 못한 것처럼 느껴 본 적 없는 자들과 있는 자들의 공감대 차이였다.

   누군가를 막 좋아하기 시작한 상태는 모든 논리가 사라져 버리는 기점이다.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판단 내리기가 도무지 난감한 날들이다. ‘내가 과연 저 사람과 어울리는 사람인지. 내가 과연 저 사람 곁에 있을 자격이 있는 건지. 그것도 아니라면 단순히 내가 저 사람을 좋아해도 되는 건지.’ 끊임없이 자신을 시험하고 의심스러워하며 스스로에게 불리한 결정을 자주 내리는 기간이다. 자신감이 가장 요란한 변덕을 부리는 시점이기도 하다. 모든 게 가능할 것 같다가도 모든 걸 이미 망친 것처럼 여겨지는 요지경의 세월이다. 여자를 납득한다는 듯 쳐다보고 있는 이들은 그 상태를 이해하고 있었다. 터무니없이 혼란스럽지만 지극히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그 상태를 이해하고 있었다. 

   “야, 자꾸 묻긴 뭘 물어. 지금 지 속도 모르는 애한테. 먹던 거나 마저 먹어라.”

   여자 바로 옆에 앉아 있던 사람이 왼손으로 여자 등을 감싸며 말했다. 여자에게 집중된 분위기를 흩뜨리려는 것이었다. 여자는 다시 티스푼을 들었고 여자 맞은편에 앉았던 두어 사람은 화장실을 찾아 나섰다. 네다섯 사람 이상 모일 때 대부분 그러하듯 이제 일행은 몇 팀으로 나눠져 저들끼리 이야기했다.    


   “한 번만 대답해 봐. 나 재미없지?”

   여자가 오른쪽으로 몸을 틀고 물었다. 여자가 대답을 기다리며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아까 여자 등을 감싸 준 그였다.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니가 왜 재미없어. 이렇게 재밌는데. 아유, 재밌어.”

   “아, 놀리지 말고 똑바로 대답해 봐.”

   “재미있어.”

   그가 웃음을 추스르며 말했다. 

   “진짜?”

   “응. 진짜. 근데 그게 다가 아니잖아.”

   “뭐가?”

   “니가 가진 거. 니가 재미만 가진 건 아니잖아. 니가 어디 재미만 가졌냐. 니가 가진 좋은 것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것들 홀랑 까먹어 버리면 걔들이 얼마나 서운해 하겠냐?”

   그가 나긋나긋 말하며 여자의 등을 잠깐 다독였다. 여자는 방금 들은 말을 소화 시킬 시간이 필요한 듯 잠시 멍한 채로 앉아 있었다. 그가 뒷말을 이었다.

   “너한테만 하는 소리 아니다. 나한테도 해당되는 소리야. 야, 사람이 말이야. 어떨 땐 토 나오게 복잡한데 이럴 때 보면 또 되게 단순하지 않냐? 그 사람이 어쨌네 저쨌네 하면서 하루 종일 그 생각만 하잖아. 뭐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닌데……. 지나고 보면 가끔 후회되더라고.”

   “후회?”

   “내가 없잖아. 그 사람 좋아하는 시간에 그 사람만 있고 내가 없잖아. 그 사람 좋다는 거, 그 사람 싫다는 거, 그런 것들만 있고 나는 없잖아. 나는? 내가 좋아하는 건? 내가 싫어하는 건?”

   여자는 숨을 크게 들이켜며 입술을 안쪽으로 말아 물었다.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아니, 급소가 건드려진 기분이었다. 항상 유쾌하고 장난 잘 치고 능청스러운 그가 웃음기 없이 해 준 말이어서 더 큰 울림으로 느껴지는 건지도 모르겠다.

   여자는 상상 속 작은 방에 버려진 자기 모습을 얼핏 보았다. 그 작은 방은 수백 가지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 그 방 밖엔 온통 그 사람이었다. 그 사람 말, 그 사람 취향, 그 사람 행동, 그 사람 생각, 그 사람, 그 사람, 그 사람……. 그 사람을 사랑하기에 여자 그 자신의 말과 취향과 행동과 생각 같은 건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런 것들은 옆으로 밀어 놔야 한다고 여겼다. 언제나 그 사람이 1순위여야 한다고 여겼다.

   누군가를 좋아하면 모든 걸 걸고 그 사람에게 뛰어들어야 한다고 여자는 생각했다. 그게 사랑이라고 순수라고 낭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여자 옆에 앉은 그는 그런 생활을 가끔 후회했단다. 자기가 없어서. 자기가 없어서.    

   “노파심이다. 넌 안 그럴 수도 있는데 내가 오지랖 떤 걸 수도 있고.”

   그가 한쪽 어깨를 돌리며 말했다. 여자는 그런 그를 물끄러미 넘겨다보았다. 여자 앞에 놓인 잔 속엔 이제 아이스크림 형체가 남아 있지 않았다. 화장실 간다고 나섰던 두 사람이 카페 문 열고 들어오며 다급하게 손짓했다. 한 사람은 자기 시계 쪽으로 손짓했고 한 사람은 카페 밖으로 손짓했다. 

   “얘 미쳤나 봐, 진짜. 밥 먹은 지 얼마나 됐다고 또 먹으러 가재.”

   시계 가리키던 이가 테이블 앞에 서서 큰소리로 말했다. 앉아 있던 일행이 각자의 의사를 궁금해 하며 서로서로 둘러보았다. 여자와 그의 눈길이 마주쳤다. 두 사람은 잠깐 머쓱한 듯 웃으며 다시 다른 사람들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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