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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단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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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이로운 Jul 30. 2016

속에 있는 그대로

   언젠가 물속에 잠수해 있으면서 주변 사람 목소릴 들은 적 있다. 아마 그곳은 새로 생긴 실내 수영장이었던 것 같다. 아니, 집 근처 계곡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물에 잠겨 있느라 먹먹한 내 귓속으로 ‘웅웅’대는 여러 목소리가 느리게 번져 왔다. 그 목소리들은 너무 멀게 느껴졌다. 꼭 다른 세상에서 실수로 쏟아진 소리 같았다. 당장 코앞에서 누군가의 허벅지를 볼 수 있고 만질 수도 있는데 소리는 아주 먼 곳에서 조금씩 흘러드는 것 같았다. 나는 물안경 알과 푸른빛 물결 너머의 사람 형체를 올려다보며 그들의 알 수 없는 소릴 들었다. 

   그때의 느낌은 뭐랄까……. 마치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들은 물 밖에서 열심히 떠들어대고 있지만 난 물 속에 있다. 그러니 그들 말을 알아듣지 않아도 된다. 상관하지 않아도 된다. 내 나라나 나 같은 사람 존재에 관심조차 없는 어느 먼 나라의 길거릴 아무 생각 없이 걸어 다닌다면 그런 느낌일까. 그래, 이방인이 된다는 것. 그런 느낌이다. 사람들로부터 소외되는 것 같아 약간 초조하지만 누구도 책임지지 않아도 되니 한껏 홀가분한 느낌.    


   “생각해 봤어?”

   당신이 쇼핑 카트를 내 허리 쪽으로 밀며 물었다. 당신은 조금 짓궂은 얼굴이다. 익숙한 그 얼굴. 당신은 어떤 마음을 숨기고 싶을 때마다 그런 얼굴을 한다. 뭔가 장난을 거는 것 같은 그런 표정을 얼굴에 담는다. 자신의 속이야길 꺼내 놓을 때나 내 속이야길 들을 때 자주 볼 수 있는 얼굴이다. 긴장하고 있는 마음이 지금 당신 얼굴 밑에 가려져 있다.

   나는 몸을 피해 카트를 받아 끌며 긍정도 부정도 아닌 고갯짓을 했다. 당신은 아랫입술을 쭉 빼며 프라이팬 코너로 사라졌다. 한 3분쯤 전에 당신이 물었다. “나랑 싸우고 내가 연락 없을 때 당신 기분은 어때?” 하고.

   당신이 그 질문을 하자마자 내 의지와 상관없이 그 장면이 떠올랐다. 어린 시절 물속에 엎드린 채로 누군가의 목소릴 들었던 때, 그때의 장면이. 나는 그 장면이 떠오른 것에 대해 약간의 죄책감을 느낀다. 당신을 피해 물속으로 도망친 것 같아 미안하다.

   하지만 나로서는 누군가 토라지거나 단단히 화가 났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너무 막막한 것이다. 뭔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제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여겨지기만 하는 것이다.    


   “자기는 물 안 무서워?”

   내가 물었다. 당신은 초록색 손잡이 달린 프라이팬을 든 채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갑자기 무슨 물?”

   “수영 말이야. 그러고 보니까 둘이 수영 가 본 적이 없네. 물놀이도 그냥 살짝 담갔다 나오기만 하고.”

   “나 물 무서워. 좋은데 무서워.”

   나는 당신 옆에 카트를 세웠다. 당신 손에 쥐고 있던 프라이팬을 진열대 고리에 다시 걸어 놓았다.

   “물이 왜?”

   당신이 아랫배를 감싸며 물었다.

   “음……. 그럼 그건 알지? 물속에 머리 담그면 주변 소리 거의 안 들리는 거. 주변에서 무슨 소리 나면 되게 작게 들리고 웅웅대는 거 같이 들리는 거.”

   “응.”

   “자기랑 싸우고 자기 연락 없으면 난 그런 기분인데.”

   “그게 뭔 말이야?”

   “자기랑 싸우고 자기 연락 없으면 내가 물속에 빠져 있는 거 같다고.”

   “그게 어떤 건데?”

   당신 목소리가 아까보다 작고 낮다.

   “물속에 빠져 있으면 저 밖에서 들리는 소리 뭔 줄 하나도 모르잖아. 그거 같아. 마음은 뭘 해야 한다고 자꾸 뭐라고 하는데 그게 정확히 뭔지 난 하나도 모르겠거든. 그리고 솔직히 이건 좀 안 좋게 들릴 수도 있는데…….”

   나는 하던 말을 끊고 숨을 느리게 들이켰다. 당신은 턱 끝을 조금 위로 들어 보였다. 나는 뒷말을 잇는다.

   “아무것도 모르니까 ‘에라, 모르겠다.’ 싶을 때도 있어. 근데 무섭다. 진짜야. 무서워. 하루하루 갈수록 더 무서워. 나중에 물 밖으로 나오면 자기 없을까 봐. 연락 없는 채로 지내다가 영영 자기하고 끝일까 봐.”

   나는 말을 끝내고 카트를 다시 움켜쥐었다. 당신은 엄지손가락으로 콧방울을 만졌다가 목을 긁었다가 한다.

   “너무 솔직해서 조금 당황스럽네.”

   당신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중요한 문제일수록 속에 있는 그대로 말해 달라고 했잖아. 지난 주에.”

   “그래, 내가 그랬는데……. 어……. 갑자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네.”

   당신은 내 뒤쪽에 있는 냄비 진열대 쪽으로 시선을 던진다. 나는 농담을 던지려다 말고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이제 이런 순간을 가볍게 대하는 것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다. 당신의 진중한 침묵을 버티고 서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언제부터 그러기로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카트에서 손을 떼고 숨을 오래 내쉬었다. 당신은 주먹을 턱밑에 가져다 댄 채로 돌아섰다. 나는 눈을 조금 크게 뜨고 당신과 눈길을 마주했다.

   “마음이 갑자기 이상했어.”

   당신이 말했다.

   “응?”

   “솔직히 아무것도 모르겠다고 했을 때는 서운했어. 진짜 모르는 건지 아니면 알려고 하지 않는 건지, 싶고……. ‘에라, 모르겠다.’ 싶을 때 있다고 했을 땐 괘씸하더라? 연락 안 하고 있는 내 속은 썩어문드러지는데 ‘에라, 모르겠다.’니? 근데 무섭다고. 무섭다고 했잖아. 그 단어 듣자마자 마음이 저 밑까지 툭 떨어져 버렸어. 미안한데 그 뒤에 뭐라고 했는지 못 들었어.”

   당신은 말을 마치자마자 턱 밑에 대고 있던 주먹을 떼고 내 앞에 곧게 섰다. 나는 잠시 쇼핑 카트를 내려다봤다가 당신을 맞바라보았다. 어머니 말씀이 옳았다. 오랜 시간 함께한 사람과는 이런 일상적 순간에 가장 중요한 의사소통을 하게 되는구나. 평상시 대화가 안 되면 날 잡고 대화해도 아무 소용없다는 게 진짜이겠구나. 만일 내가 여기서 장소 핑계 대며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고 하면 앞으로 이 이야기 나눌 장소는 다시 주어지지 않을 것 같다.

   “무서워.”

   시선의 초점을 당신에게 모두 모으고 내가 말했다. 당신은 아까 그 자세 그 눈빛 그대로 나를 응시하고 있다. 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온몸에 쭈뼛거리는 감각이 쥐나는 것처럼 퍼져 가지만 이 순간을 회피하면 이 순간을 다신 얻어낼 수 없다.

   “어떻게 해야 잘 화해할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서로 맘 다치지 않고 이해할 수 있는지……. 그런 것들……. 아무것도 몰라서 미안. 알더라도 자기보다 덜 알아서 미안해. 싸우고 나서 항상 자기가 먼저 연락해 주는 거 알아. 하나도 안 당연해. ‘에라, 모르겠다.’ 싶을 때 분명 있어. 근데 그런 때보다 마음 쓰고 있을 때가 더 많다. 진심이야. 답답하고 속상하고 미치겠고 그래. 내가 서투르다는 게 핑계 될 수 없다는 거 나도 알아. 근데 다음부터 서투르게 하지 않는다고 말 못해 줘. 그건 거짓말이잖아. 대신 애써 볼게.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할게. 노력하고 고쳐 보고 맞춰 볼게. 그러니까 자기가 말 좀 해 줘. 어떻게 하는 게 자기 덜 맘 아프게 하는 건지……. 일부러 상처 주려고 내가 아무것도 안 하는 건 아니다, 진짜. 내 나름대로 되게 생각도 많이 하고 그러는데 결정도 안 나고 맞는지도 모르겠고 그러다 보니까 시간만 자꾸 가서…….”

   “나한테 다 맞추라는 게 아니야.”

   “알아.”

   “내가 뭘 말해 줄까…….”

   “나랑 연락 안 할 때 자기 기분은 어떤지. 자기는 어떻게 하고 싶은지.”

   “말하면?”

   “우리 두 사람이 원하는 거 사이에 합의점을 찾아야지. 뭐 규칙 같은 거?”

   “음……. 난 이따가 말해 줄래. 일단 가자. 배고파.”

   당신이 내 앞으로 와 카트를 밀며 말했다. 나는 가만히 당신 뒤를 따라 걸었다. 프라이팬 코너를 다 지나기도 전에 당신이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이렇게 말 잘하는데 그동안 왜 안 했어?”

   당신이 한결 밝아진 얼굴로 말했다.

   “나 말 잘해?”

   “응. 좋아. 새롭고……. 가자.”

   당신이 다시 앞질러 걷는다. 나는 걸어온 길로 도로 뛰어가 초록색 손잡이 달린 프라이팬을 집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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