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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이로운 Aug 17. 2016

그 집으로 갈 거야

   그 좁은 골목은 오르막길이었다. 오르막 골목 양쪽에 건물들이 다닥다닥 세워져 있었다. 건물 1층은 주로 카페나 빵집이었다. 당신이 귀에 딱지 앉도록 말했던 빵집 골목이 여긴가? 언젠가 당신이 우리 작업실로 사 갖고 온 바게트 빵이 생각난다. 그때 당신은 생크림을 깜빡하고 안 사왔다며 무지 허둥거렸다. 관자놀이에 땀까지 흘리면서……. 나를 비롯한 작업실 식구들은 그런 당신을 바라보며 왠지 가족 같은 느낌으로 웃었다. 그래, 그 날이었지. 당신이 당신 동네에 빵집 골목 있다고 다음에 한번 같이 가 보면 좋겠다고 했던 게.

   간장으로 뭔가를 졸일 때 나는 짭짤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이 골목을 둘러싼 건물들 2층은 1층 매장과 연결돼 있거나 독립된 주택이거나 했다. 어떤 건물 2층엔 내가 모르는 나라의 빨간 국기가 펄럭거리고 있었다. 그 건물 1층 간판도 외국어로 되어 있다. 매장 밖 테라스와 연결된 진열장엔 난생 처음 보는 모양의 빵들이 나란히 놓여 있다. 뭘로 만들었길래 빵 색깔이 저렇게 뽀얗지? 아무튼 여기가 당신이 말한 그 빵집 골목인 게 분명하다. 

   걸음을 늦추며 골목 위쪽을 휘둘러보았다. 2층 이상 건물은 잘 없다. 오르막길에다 건물을 어떻게 지어 올리는지 신기하기도 하고 조금 아슬아슬해 보이기도 했다.     


   당신 집을 찾아 가겠다고 전화로 당신에게 말한 게 어젯밤 10시다. 솔직히 술김에 내지른 말이었다. 이 한여름에 두 시간 거리인 당신 집을 혼자 무슨 수로 찾아간단 말인가? 주소 하나만 덜렁 갖고……. 핸드폰 지도 어플을 제 눈으로 보고도 길 못 찾는 천하의 길치가 난데. 

   당신은 수화기 너머에서 익숙한 목소리로 “크흠.” 하고 웃었다. 그러더니 “알았어. 와. 기다릴게. 어차피 나 내일 약속 없거든.” 하고 말했다. 당신이 풍선 바람 빠지는 소리처럼 웃은 건 내가 알아주는 길치임을 당신도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라고? 아무리 술기운에 겨웠어도 나는 “응?” 하고 되물었다.

   “와. 온다며.”

   당신이 길게 늘인 말투로 말했다. 그 말투가 내게 ‘어디 한번 보자.’ 하는 것 같았다.

   “진짜 가? 간다?”

   “그래. 진짜 와. 점심이나 같이 먹게.”

   당신은 “그럼 오는 걸로 알게. 나 잔다.” 하곤 전화를 툭 끊었다. 잘 시간 아니면서. 마지막으로 들은 당신 목소리 끝엔 장난기가 배어 있었다. 나를 제대로 놀릴 심산인가 보았다. 아니면 내가 술에 너무 많이 취해 있어서 이 통화 내용을 기억 못할 거라 생각하거나…….

   하지만 나는 고작 맥주 세 캔을 마셨을 뿐이다. 과일 향이 나고 도수도 아주 약한 맥주 세 캔을. 눈앞이 약간 흐리긴 했지만 정신까지 탁해져 있었던 건 아니다. 그게 아닌가? 대뜸 “내일 그 집으로 갈 거야.” 말한 거 보면 정신이 흐릿해져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아무튼 나는 오늘 일어나자마자 간밤에 나눈 우리 목소리들을 또렷이 떠올릴 수 있었다. 그 집으로 갈 거야. 알았어. 와. 응? 진짜 가? 그래. 진짜 와.    


   핸드폰 액정을 켜고 지도 어플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이 골목 끝 사거리에서 횡단보도 한 번 건너고 오른쪽 길로 접어 들어가 그리로 쭉 걷다 보면……. 일단 길을 건너야겠다. 

   당신과의 연락은 어제 그 통화가 끝이었다. 나는 간다고 연락하지 않았고 당신도 오느냐고 연락해 오지 않았다. 나는 간다고 했으니 어쨌든 갈 것이고 당신은 기다린다고 했으니 어쨌든 기다릴 것이다. 그게 우리 성격이다. 맞으면 맞고 아니면 아닌 거. 하면 하고 안 하면 안 하는 거. 우린 친구 결혼식 날 만나 이 성격 얘길 나누다 친해졌다. “어, 그쪽도 그러세요? 저도 되게 그런 성격인데.”라고 말하며 하늘색 셔츠 소매 걷어 올리던 앳된 당신 얼굴이 기억난다. 그게 벌써 5년 전이다. 사람 일 참 묘하다. 때론 피곤하기까지 한 이 성격이 연결고리가 되어서 우릴 5년 간 묶어 두었다. 물론 나는 앞으로도 기꺼이 이 연결고리 속에 묶여 있고 싶다. 둘 다 너무 비슷한 성격이라 좋을 땐 너무 좋다가 어긋날 땐 한없이 어긋나더라도……. 당신이 좋다. 당신과 되도록이면 오래오래 함께이고 싶다. 당신은 볼수록 좋은 사람이니까. 함께할 미래에 대한 기대를 주는 인연은 흔치 않으니까.

   당신과 긴 세월 함께하기 위해 나도 항상 더 발전하는 사람이고 싶다. 당신도 나를 보며 오지 않은 내일에 대해 기분 좋은 느낌을 받았으면 좋겠다. 천지사방에서 왜들 그렇게 사랑하라고 떠들어대는지, 그 이유를 당신을 통해 알았다. 그러니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정말 사랑한다고 해도 나는 그 말 앞에 전혀 부끄럽지 않다. 사랑이 무엇이라고 똑바르게 설명할 순 없어도 내가 사랑을 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확실하게 알고 있다. 그리고 나는 어렴풋이 느낀다. 누군가를 진실로 사랑할 수 있는 기회가 인생에 그리 많지 않다는 걸. 사랑이 뚜렷하게 느껴질 땐 그것을 놓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걸.    


   횡단보도 옆 보행자 신호등에 아직 빨간불이 들어와 있다. 횡단보도 앞으로 주황색 택시 한 대가 쌩하니 지나갔다. 내가 전대미문의 길치인 건 내가 방향감각에 둔하단 이유도 있지만 내가 택시를 타지 못한단 이유도 있다. 나는 택시에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다. 당신도 그걸 알고 있다. 나는 여덟 살 때 이후로 택시를 타 본 적이 없다. 앞으로도 택시 탈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어……. 와…….”

   부스스한 얼굴로 나를 맞으며 당신이 ‘어’와 ‘와’를 느리게 발음했다. 정말 집 앞에 떡하니 나타난 나를 감탄스러워 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냥 좀 더 자고 싶어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아마 둘 다겠지.

   “들어가도 돼?”

   옷 속으로 땀이 흐르는 걸 느끼며 내가 물었다. 당신이 “크흠.” 하고 웃으며 길을 내 주었다. 거실 소파로 걸어가는 등 뒤에서 “어유, 일찍도 왔다. 안 헤맸어?” 하고 당신이 물었다.

   “말도 마.”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내가 말했다. 

   “헤맸어? 많이 헤맸어?”

   당신이 조금 커진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은 손등으로 눈 비비며 이리로 터벅터벅 걸어왔다. 내가 지난여름 휴가 다녀오며 선물한 줄무늬 반바지가 당신 무릎 위에서 하늘거렸다. 애초에 잠옷으로 입으라고 선물한 거였다. 근데 당신은 가끔 외출할 때도 그걸 입고 나갔다. 나 만나러 올 때도 몇 번 그걸 입고 있었다. 멀쩡한 바지 놔두고 왜 그걸 입느냐고 내가 타박하면 당신은 얼굴을 한껏 찡그리며 “내 맘이야.” 하고 말했다. 그러면 내 가슴 안쪽이 간지러워지곤 했다. 나는 그 간지러운 느낌이 좋아서 당신을 몇 번 더 구박했다.     


   “사실 그렇게 많이 헤맨 건 아니고…….”

   소파 밑에 엎어져 있던 소설책을 주워 들며 내가 대답했다. 

   “잘했네. 그래. 그렇게 하는 거야.”

   “응? 뭘?”

   당신을 올려다보며 내가 물었다. 뭘 그렇게 한다는 거지?

   “응?”

   당신은 ‘내가 방금 뭐라고 했지?’ 하는 표정이었다.

   “‘그래. 그렇게 하는 거야.’ 하고 방금 말했잖아.”

   “아, 그건……. 너 길치라고 밖에 잘 안 돌아다니잖아. 그러니까 혼자서는 말이야. 근데 어제 갑자기 니가 우리 집 온다고 하길래……. 얘가 이제 혼자서도 뭔가를 해 보려 하네, 싶었지.”

   당신이 흰 티셔츠 위로 팔짱을 끼며 말했다. 얼떨결에 그 집에 가겠다고 한 내 말 듣고 당신은 거기까지 생각했구나. 나는 입술을 깨물고 당신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당신 입술이 다시 아래로 떨어졌다.

   “뭐……. 어제 니가 술을 마셨다곤 했지만……. 술 마시고 하는 말도 다 어느 정도 마음속에 있던 말이잖아. 난 그렇게 생각하거든. 그래서 오라고 했지. 혼자 처음 길 나서는데 니가 가야 하는 목적지에 다른 사람 있는 거보단 내가 있는 게 낫잖아. 니가 힘들다고 더 이상 못 가겠다고 하면 내가 데리러 가면 되고. 언제 출발했어? 밥 안 먹었지.”

   당신이 팔짱을 풀고 주방으로 걸어 들어갔다. 종이 가방 부스럭대는 소리가 났다. 나는 당신이 거기서 부스럭대는 동안 방금 당신에게 들은 말을 곱씹었다. 혼자 처음 길 나서는데 니가 가야 하는 목적지에 다른 사람 있는 거보단 내가 있는 게 낫잖아. 니가 힘들다고 더 이상 못 가겠다고 하면 내가 데리러 가면 되고.

   옷 속으로 땀방울 하나가 또 흘러내렸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따라 들어갔다. 당신은 큼지막한 종이 가방 속을 아직 뒤적이고 있다. 나는 그런 당신을 뒤에서 꼭 끌어안았다. 잠깐 멈칫하던 당신이 허릴 펴고 서며 “크흠.” 하고 또 웃었다.

   “자꾸 오라고 해야겠네.”

   당신이 천연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려다보이는 종이 가방 속엔 빵들이 담겨 있었다. 아까 빨간 국기 펄럭거리던 빵집 밖에 진열돼 있던 빵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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