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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단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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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이로운 Sep 08. 2016

폐교 캠핑장

   새까만 하늘 위로 불꽃이 어지럽게 피어올랐다. 허공에 빨간 안개꽃이 피어나는 것 같다. 모닥불 너머에서 누가 장작을 던진 모양이다. 낮엔 운동장 한편에 수북이 쌓여 있던 장작들이 지금은 모닥불 곳곳에 단정히 쌓여 있다.

   고갤 틀어 학교 건물을 바라보았다. 언젠가 저 학교 건물에서 초등학생들이 수업을 들었겠지. 누군가는 진탕 말썽 피워 복도에서 손을 들고 있었겠지. 수업 중인 교실 옆 복도엔 교감이나 교장 선생님이 뚜벅뚜벅 걸어 다녔겠지. 발 디딜 때마다 고무 소리 찍찍 나는 커다랗고 까만 슬리퍼를 신고.

   그런데 지금 이 학교는 밤에도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캠핑장이 됐다.

   불 켜진 교실 창문 너머로 술 마시는 사람들이 보인다. 거의 모두가 술을 마시고 있다. 창가에 술병을 전시해 둔 사람들도 있다. 건물 전체가 술집이라 해도 믿겠다. 나도 방금 저 거대한 술집에서 나온 참이다. 여기까지 오던 내 몸짓과 여기까지 오느라 걸린 시간 모두 느리게 느껴졌다. 좀 취한 듯하다.

   술에서 깰 필요가 있다. 특히 오늘 같은 날엔 취하면 곤란해진다.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여기 이 모닥불은 캠핑 온 사람들 모두를 위한 것이다. 모닥불 근처엔 간의 의자가 여러 개 놓여 있다. 나는 빨간 간이 의자에 앉아 있다. 예전에 외삼촌 따라 낚시 갔을 때 외삼촌이 앉혀 준 의자와 비슷하게 생겼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익숙한 게 참 무섭다. 익숙하단 이유로 뭘 선택하고 마는 순간이 얼마나 많았나. 그게 적합해서가 아니라 그냥 익숙해서……. 내 몸집에 알맞은 간이 의자는 저 까만 간이 의자인데 나는 굳이 여기 앉아 있다. 익숙해서. 익숙하니까 편안해서.    


   “왜 나와 있어요?”

   누군가의 목소리가 대각선 뒤쪽에서 들려 왔다.

   “왜 나와 있냐구.”

   누군가의 목소리가 내 바로 뒤쪽에서 들려 왔다. 고갤 돌렸다. 당신이었다. 나는 머릴 긁적거리며 엉거주춤 일어났다.

   “들어가잔 소리가 아니라……. 어디 불편해요?”

   당신이 나를 도로 앉히며 물었다. 당신은 내가 앉아 있던 빨간 간이 의자를 내려다보더니 조그맣게 웃었다.

   “이거 뭐야. 너무 귀엽다. 낚시 할 때 쓰는 의자 아니에요? 근데 너무 작아. 안 부러지고 용케 버티네. 왜 여기 앉아 있어요.”

   당신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 나는 이 빨간 간이 의자를 당신에게 내어 주고 까만 간이 의자를 가지고 왔다. 당신이 몸을 움츠리며 빨간 간이 의자에 조심히 앉았다.

   “근데 지금까지 한 마디도 안 한 거 알아요?”

   모닥불 불빛 받아 환해진 얼굴로 당신이 말했다.

   “나?”

   “그럼 내가 물을 사람이 여기 누가 또 있어요? 목소리 까먹는 줄 알았네.”

   “아…….”

   “세 번째 묻고 있어요. 왜 나와 있어요? 어디 불편해요?”

   당신이 무릎 위에 두 팔 포개 얹으며 물어 왔다.

   “아니야. 갑자기 술기운 확 올라서……. 술 좀 깨려고…….”

   양손바닥 펼쳐 모닥불을 쬐며 내가 말했다. 

   “술 마시러 온 사람이 술 깨러 나오면 어떡해.”

   당신이 아까처럼 옅게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 턱을 조금 치켜 올리자 당신 어깨에 얹혔던 머리카락이 등 뒤로 스르륵 넘어갔다. 바람이 이쪽으로 불어와 향수 냄새 같은 게 맡아졌다.

   “아니야. 취하려고 마시는 술은 아니야. 오늘은 아니야.”

   “웬일이래요? 술은 원래 취하려고 마시는 거라면서요. 한 번을 안 져 주고 박박 우기더니……. 그 고집불통 어디 갔지?”

   당신이 천연스럽게 말했다. 그 눈빛이 내 기분을 살피는 것처럼 보인다.

   “넌 왜 나왔어.”

   이번엔 내가 당신에게 물었다.

   “혼자 어디 가길래요.”

   “나?”

   “네.”

   “왜, 걱정됐어?”

   약간 장난치는 듯한 말투로 내가 물었다.

   “둘이 얘기하고 싶어서요.”

   당신이 간결하게 대답했다. 입술을 꼭 다문 당신은 내 눈동자 속으로 시선을 곧게 던졌다.

   “무슨 얘기?”

   “그냥 얘기.”

   “하고 싶은 말 있어?”

   “듣고 싶은 말이 좀 있어서.”

   “무슨?”

   “왜 나 피해 다녀요?”

   “내가 언제?”

   “요즘이요.”

   “그런 거 아니야.”

   “그런 거 맞아요.”

   “아니래도…….”

   “맞잖아. 내가 어색해 할까 봐 그래요? 껄끄러워 할까 봐?”

   “음…….”

   “뭐야. 피한 거 아니었다면서 왜 대답 고민해. 거 봐, 피한 거 맞잖아요.”

   “이런 얘기……. 술 마신 상태에서 안 하고 싶은데…….”

   “왜요? 술 안 마신 상태에선 더 안 할 거잖아요. 피하기만 하고.”

   모닥불 쪽으로 얼굴 돌리며 당신이 말했다. 불빛에 눈이 부신지 당신은 눈살을 조금 찌푸렸다.

   “뭘 어떻게 할까, 그럼. 너 내가 지금 너한테 하는 말 진심이라고 생각할 수 있어?”

   내가 물었다.

   “아님 뭔데요?”

   “술주정이지. 술 취해서 하는 말.”

   “취했어요?”

   “맨정신은 아니니까.”

   “나한테 거짓말 하고 싶어요? 맘에도 없는 말 하고 싶어요?”

   “아니.”

   “그럼 술이랑 우리 얘기하는 거랑 무슨 상관이야.”

   “그래……. 그러게.”

   내가 어물거리자 당신은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내 대답은 듣지도 않고 왜 자꾸 도망만 다녀요.”

   “대답…….”

   “설마 내가 대답 안 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당신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어 왔다. 

   지금껏 당신이 내게 쏘아붙이듯 한 말 모두가 사실이다. 나는 며칠 내내 당신을 교묘히 피해 다녔다. 그리고 당신이 내게 대답할 말이 있으리라곤 생각 못했다. 내 마음 하나 추스르는 것도 버거워 당신 입장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상체를 틀어 당신을 맞바라보았다. 내게 대답할 말이 있다는 건가. 당신이?    


   일주일 하고 이틀 전이다. 당신을 피하기 시작한 건……. 당신 앞에 다시 설 자신이 모두 사라져 버린 그 날 아침에 나와 당신은 마주 보고 서 있었다. 라일락 잔뜩 핀 담장 앞에서 내가 당신에게 말했다.

   “나한테 5분만 주라. 니가 중간에 끊으면 나 끝까지 말 못할 거 같거든. 나 5분만 말할게. 딱 5분만. 있잖아……. 좋아해. 너 많이 좋아해. 처음부터 좋아했어……. 처음부터 좋아했는데 처음부터 지금까지 아닌 척만 했어. 확신이 없어서가 아니야. 사는 동안 지금처럼 내 마음 확실했던 적 없었으니까. 겁이 났어. 겁이 나서 아닌 척했어. 너 마주치고 너한테 말 걸고 니 얘기 듣고……. 앞으로 그런 거 못할까 봐. 좋아한다고 말하는 순간부터 너랑은 예전처럼 지낼 수 없을 거 같아서. 그래서 아닌 척했어. 하루만 더 니 얼굴 봐야지. 하루만 더 너랑 인사해야지. 하루만 더 니 목소리 들어야지. 하루만 더 니 이름 불러야지. 하루만 더 잘 자라고 해야지. 그러다가 여기까지 왔어. 그렇다고 지금은 니 얼굴 보고 너랑 인사하고 니 목소리 듣는 거 안 아쉬워서 이 얘기하는 거 아니야. 너 좋아하는 마음 점점 커질수록 니 옆에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맴도는 내가 싫어서. 그래, 싫더라. 니 눈엔 내가 그저 너랑 아는 사람일 뿐인 거. 그게 싫었어. 5분만이라도 니 앞에 너 좋아하는 사람으로 서 있고 싶었다. 너한테 내 마음 다 알아 달라는 거 아니야. 내가 너 얼마나 좋아하는지 니가 알 필요 없어. 어차피 나도 모르니까. 그냥 나를 보여 주고 싶었어. 나는 길 가다가 너랑 편하게 아는 척할 수 있는 사람이기만 한 게 아니야. 어디서든 아무렇게나 너 못 지나치는 그런 사람이기도 해. 난 그런 사람이기도 해. 너 이제 못 볼 거 같아서 아쉽고 힘든 마음보다 니 눈에 내가 영영……. 그냥 그런 사람으로 비칠 거란 사실이 더 난감해. 5분 지났나? 시간 뺏어서 미안하다.”

   나는 당신에게 가겠단 인사도 없이 돌아섰다. 그리곤 그 라일락 담장을 빠져나왔다. 심장이 눈알에 옮겨 붙은 것처럼 두 눈이 펄떡거리고 욱신거렸다.     


   모닥불 속에서 타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 대답은 안 듣고 싶어요?”

   당신이 고갤 오른쪽으로 기울이며 물었다.

   “대답…….”

   “대답해도 되는지 허락 받으려다 날 새겠네. 그냥 나도 똑같이 할게요. 나도 5분만 줘요. 며칠 동안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는데……. 너무 많아서 정리가 안 되네……. 우선 그냥 그렇게 가 버리는 법이 어디 있어요? 사람이 어떻게 그래? 혼자 생각하고 혼자 결정 다 내리고……. 좋아한다고 해놓고 왜 나는 안중에도 없는 건데. 그리고 고백한다고 누가 잡아먹는대요? 고백하면 거기부터 시작 아닌가? 왜 거기서 다 끝내 버려요? 아, 물론……. 예전하고 똑같을 순 없겠죠. 그렇다고 아무것도 못할 건 또 뭐야? 내가 만나지 말쟀어요? 인사하지 말쟀어요? 문자하지 말랬어? 내 이름 부르지 말랬어? 난 아무 소리도 안 했는데 혼자서 아주 난리야, 난리!”

   “…….” 

   “누가 나 좋아하지 말랬어요? 왜 해선 안 될 일 저지른 사람처럼 자꾸 멀어지기만 해요. 거기 좀 있으라구요. 밀어낸 적도 없고 밀어낼 생각도 없으니까 이리저리 피하지 말고 거기 좀 있으라구요. 알겠어요?”

   당신이 왼손을 내게 쭉 내밀며 말했다. 나는 당신의 왼손을 멀뚱히 내려다보았다.

   “아, 알겠냐구요!”

   당신이 가볍게 을러댔다. 나는 고갤 끄덕거렸다. 당신은 “에휴!” 하고 한숨을 푹 내쉬더니 간이 의자에서 일어섰다. 건물로 도로 들어가는 당신을 나는 물끄러미 넘겨다보았다.  

   모닥불에서 다시 타닥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술 진열장 같던 창가엔 술병이 두어 개쯤 더 얹혀 있다. 당신이 나를 흘끗 돌아보곤 다시 건물 쪽으로 걸었다. 




소설집 안내 및 문의 : www.parkdabin.modoo.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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