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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단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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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이로운 Sep 06. 2016

환상

   건물 밖으로 통하는 유리문을 밀었다. 세찬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정말 때렸다. 때리면서 나를 다시 건물 안쪽으로 밀쳤다. 몸을 옆으로 틀고 택시를 찾았다. 택시는 정문 앞에 서 있었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시커먼 먹구름들이 한가득 끼어 있다. 마구잡이로 휘몰아치는 바람이 먹구름들을 치고 다녔다. 우락부락한 구름 덩어리들은 덩치에 걸맞지 않게 맥없이 쓸려 다녔다.

   택시 쪽으로 뛰었다. 하늘이 비를 퍼붓고 있진 않았다. 그래도 왠지 뛰어가야 할 것 같았다. 지금 당장 ‘와악!’ 하는 폭우가 쏟아져도 이상하지 않은 하늘이니까.

   뛰는 걸 별로 좋아하진 않는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뛰게 되는 순간은 묘한 쾌감을 준다. 비를 피해 뛰거나 멀찍이 달려오는 차를 피해 뛰거나 뭐 그런 순간……. 그런 순간엔 내가 나 자신을 살뜰히 지키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 하나 정돈 안전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것 같다. 나 자신에게 안도감을 가지게 된다. 그러면 나 자신을 꽤 듬직한 사람처럼 바라보게 된다. 믿음직스럽다고 해야 하나. 누가 들으면 미쳤다고 웃겠지만 정말 그런 마음이 든다. 그 마음은 내가 누군가를 만나 오래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을 선사한다. 바로 여기서 쾌감이 느껴지는 거다. 영혼의 짝을 만날 준비가 끝났다 싶은 쾌감……. 

   그러고 보면 나도 알고 있는 거다. 나를 잘 챙겨야 상대도 잘 챙길 수 있다는 걸. 누군가와 헤어지지 않기 위해 제일 먼저 보듬어야 할 사람이 나라는 걸.

   하지만 이런 쾌감의 순간은 너무나도 짧다. 그렇기에 나를 보살피기로 하는 결심도 길게 지속되지 않는다. 택시 문 닫히는 소리 들리자마자 오늘 몫의 쾌감과 결심이 흩어졌다.    


   “안녕하세요.”

   가쁜 숨 몰아쉬며 택시 기사님에게 인사했다. 기사님이 상체를 틀고 나를 돌아보았다.

   “콜 하신 분 맞죠?”

   얼굴을 찌그러뜨리며 웃고 있던 기사님이 내게 물었다. 뭐가 저렇게 즐거운 거지?

   “네.”

   “어디로?”

   웃음을 좀 가눠 보려는 기색으로 기사님이 다시 물어 왔다. 내가 목적지를 말했다. 기사님은 다시 몸을 돌려 운전대를 잡았다. 운전대 잡으면서 기사님은 소리 내 웃었다. 기사님 목덜미가 잘게 흔들거렸다.

   차를 출발시킨 기사님이 미터기 버튼을 눌렀다. 미터기 속 가짜 말이 달리기 시작했다. 가짜 말 옆에 적힌 택시 요금이 백 원씩 올라갔다. 좌석 시트 곳곳에선 담배 냄새가 났다. 

   큰길에 접어든 택시가 속력을 높였다. 차창 너머로 하늘을 보다가 다시 편히 앉았다. 백미러를 통해 기사님 얼굴이 보였다. 여전히 웃고 있다. 기사님과 내 눈이 마주쳤다. 

   “아이고, 이거……. 자꾸 웃음이 나서…….”

   기사님이 멋쩍은 듯 말했다. 나는 조그맣게 웃으며 “뭐 어때요, 웃으면 좋죠.” 하고 말했다. 빨리 이 택시에서 내리고 싶었다.

   “아까 콜 받고 거기까지 가는데 말입니다……. 라디오에서 하도 어처구니없는 얘길 들어서……. 어처구니가 없긴 없는데 일리 있는 말이기도 하고……. 계속 웃음이 나네.”

   “아……. 네…….”

   나는 차창 밖으로 시선 옮기며 대강 대답했다. 그 뒷이야기가 궁금하단 뉘앙스의 대답이 아니라 오직 침묵을 위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기사님은 조용히 가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어 보인다.

   “그 라디오에서 뭐라고 했냐면요. 실화인지 아닌지는 저도 잘 모르겠지만요. 어떤 남자하고 여자가 있었답니다. 눈에 뭐가 씌였는지 서로 아주 죽고 못 살게 사랑했다네요. 그러니까 둘이 같이 살아야겠는 거예요. 남잔 남자 집 가서 여잔 여자 집 가서 결혼할 사람 생겼으니 결혼하겠다고 한 거예요. 근데 양쪽 집에서는 결혼 반대했답니다. 아, 그도 그럴 것이……. 만난 지 3개월 만에 결혼한다고 하는데……. 어느 부모가 그걸 그냥 두고 보겠습니까? 그냥 반대한 것도 아니고 시간을 좀 더 두고 보자 그랬대요. 그랬더니 남잔 어디로 도망가 버리겠다고 하고 여잔 임신했다고 거짓말까지 했대요. 해 본 적도 없는 입덧 지어내서 꿱꿱대는 딸 보는 아버지 심정이 참 기가 막혔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됐겠어요? 세상에 자식 이기는 부모 어디 있겠습니까? 결국 만난 지 다섯 달 됐을 때 둘이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그런데 살림 차린 지 1년도 안 돼서 둘이 이혼을 한다지 뭡니까. 나 참……. 하루만 떨어져 있어도 얼굴이며 손발이며 말라비틀어지던 사람들이요. 이젠 저 인간 때문에 피 말라 죽겠다고 고래고래 소릴 치며 서로 으르렁대는 겁니다! 이혼 허락 안 해 주면 혀 깨물고 죽겠다면서 딸이 친정엘 찾아간 거예요. 그 집이 무슨 종교 집안인데 그 종교에서 이혼은 절대 안 된다고 했나 보대요. 이혼만은 안 된다고 엄마 아버지 둘 다 여자를 무지 말렸던 모양이에요. 근데 뭐 별 수 있겠습니까? 자식이 죽게 생겼는데요?”

   기사님이 말끝에 혀를 끌끌 찼다. 나는 백미러를 다시 건너다보았다. 기사님이 백미러를 통해 나를 한번 힐끗 보더니 빙긋 웃었다.

   “근데 둘이 왜 헤어진 줄 아십니까? 하하이, 참……. 화장실 변기 물 내릴 때 뚜껑 닫고 내리냐 안 닫고 내리냐 하는 문제 때문에 싸우다 헤어졌답니다. 누가 뚜껑 닫고 내리는 사람인지 누가 안 닫고 내리는 사람인지는 까먹었는데…….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고작 그런 문제 갖고 싸우다 헤어지는 게 말이 됩니까? 그게 참 황당하다가도요……. 한편으론 이해가 되더란 말입니다.”

   “이해가 되다니요?”

   괴상한 표정이 된 내가 물었다. 이해가 된다고?

   “그 사람들이요. 사람 둘이 산 게 아니라 환상 둘이 산 거 아니겠습니까. 너무 빨리 시작했어요, 결혼 생활을요. 사람이 원래 누구 만날 때 ‘저 사람은 어떨 것이다.’ 하는 환상을 가지지 않습니까? 좋은 환상이든 나쁜 환상이든요. 그 환상 깨지고 그 뒤에 있는 진짜 사람이 나와야 그 사람하고 제대로 된 관계를 맺는 거잖아요. 안정된 관계를요. 근데 그 과정을 건너뛰어 버린 겁니다. 그러니까 그런 일 벌어진 거 아니겠어요? 결혼하고 났더니 배우자가 갑자기 변했다는 사람 많이 있잖아요. 그것도 다 그런 거 아니겠어요? 저는 그게 웃긴 겁니다. 배신감을 왜 상대방한테 느껴요? 상대방은 원래 그 사람이었고 그 사람한테 씌운 자기 환상이 깨진 거뿐인데. 물론 저도 그거에 대해서 막 뭐라 할 입장은 안 됩니다. 결혼하고 식겁했거든요. 내가 연애한 사람하고 내가 지금 사는 사람하고 동일인물 맞나 싶어서요. 자다가도 벌떡벌떡 깨서 마누라 얼굴 확인하고 그랬다니까요. 얘기하다 보니까 많이 켕기네……. 글쎄, 누가 누구 흉을 본다고…….”

   기사님이 민망한 얼굴로 뒷말을 얼버무렸다. 나는 백미러에서 시선을 떼고 미터기를 바라보았다. 미터기 요금이 4000원을 넘어가고 있었다. 다시 백미러 쪽으로 눈길을 가져가려 할 때 차가 멈추었다. 차창을 내다보았다. 내가 내릴 곳이다.

   “4000원만 주세요.”

   내가 처음 이 택시 탔던 순간처럼 이쪽으로 몸을 튼 기사님이 내게 말했다. 미터기에는 4300원이 찍혀 있었다. 나는 1000원짜리 지폐 네 장을 내밀었다. 기사님은 방금 전까지 실컷 떠든 게 누군지 모르겠단 얼굴이다. 무덤덤한 표정의 기사님이 내게 “안녕히 가세요.” 인사했다. 차 문을 닫자마자 택시가 출발했다. 얼떨떨하게 잠시 서 있었다.

   습한 바람이 훅 불어와 치맛단을 들췄다. 정신이 들었다. 하늘은 여전히 어두컴컴했고 거리엔 가로등과 간판 불빛이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횡단보도를 건넜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온다. 혹시나 하고 받았더니 당신이다. 당신은 내게 어디쯤 오고 있는지 물었다. 핸드폰 배터리 없어서 동료 핸드폰으로 전화 걸었다고……. 나는 당신에게 대뜸 “나 어떻게 생각해?” 하고 물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당신은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야? 뭔 일 있었어?” 하고 물어 온다. 나는 일단 만나자 하고 전화를 끊으려 한다. 당신이 내 이름을 급하게 불렀다. 그리곤 “아니다. 만나서 얘기해.” 하고 말한다. 핸드폰 액정을 끄고 다시 걸었다.

   방금 건너온 횡단보도를 돌아보았다. 택시가 사라진 사거리 쪽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이래저래 어수선한 날이다.

   사람과 사람이 아니라 환상과 환상이 만났다던 그 말…….

   내가 지금 만나는 사람들 가운데 진짜 사람은 얼마나 되고 환상은 얼마나 될까. 나는 진짜 당신을 사랑하는 걸까. 아니면…….

   걸음이 느려졌다. 왼손 네 번째 손가락이 조금 무거웠다. 당신은 사무실 한편에 앉아 나와 똑같은 디자인의 반지를 낀 채 나를 기다리고 있다. 전화 끊을 당시 목소리로 미뤄 봤을 때 지금 당신 표정은 약간 긴장돼 있으리라. 

   당신은 진짜 나를 만나고 있는 걸까. 아니면…….    


   우리는 서로에게 생생한 사람일까 아니면 눈부신 환상일까.

   그걸 당장 알 수 없다 해도 당신에게 했던 사랑한단 말을 무르고 싶지는 않은데. 




소설집 안내 및 문의 : www.parkdabin.modoo.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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