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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단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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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이로운 Sep 27. 2016

씨앗


   노을이 진다.

   바다 한가운데 펼쳐진 노을은 땅에서 올려다보는 노을과 차원이 다르다. 보통 사람들은 노을을 붉은색이라 한다. 푸르다거나 보랏빛이라 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바다 위에서의 노을은 그렇게 단순히 묘사될 수 없다.

   해질녘 갑판에 나와 주위를 빙 둘러보면 보면 알 수 있다. 지는 태양이 남긴 햇살은 희고 노랗고 주홍빛이면서 타는 듯한 빨강까지 모두 담고 있다. 끝없이 펼쳐진 하늘은 연한 파랑과 짙은 보랏빛과 무겁게 가라앉은 남색까지 모두 담고 있다. 햇살과 하늘의 색깔이 섞여 새로운 빛깔이 만들어지는 곳은 구름이다.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빛깔이 하늘에서 흠뻑 쏟아진다. 그 모든 빛깔은 바다에서 고스란히 반사된다. 바닷물에 잠긴 노을은 위에서 보이는 것과 또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해 떨어지는 저녁 무렵엔 어딜 보아도 다채로운 빛에 압도되고 만다. 뱃사람들끼리 하는 말이지만 바다에선 노을이 위아래로 진다. 눈부신 빛살이 위에서 퍼지고 아래에서 피어오른다.      


   “자네 또 탔어?”

   누군가 뒤에서 고함쳤다. 뒤를 돌아보았다. 선장실 문이 열려 있고 선장의 뒷모습이 보였다. 선장이 어떤 남자를 향해 외친 말인가 보았다. 남자가 웃으며 뒷목을 긁적거렸다.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진짜 마지막.”

   남자가 선장에게 대답했다. 선장이 뒷짐을 졌다. 등 뒤로 맞잡은 선장의 양손이 다부졌다. 다시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가 내 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남자의 시선을 의식한 선장도 이쪽을 돌아보았다.

   “자네도 여기 있었나? 식사들은?”

   물음과 동시에 선장이 내게 손짓했다. 그쪽으로 오란 손짓이었다. 선장과 남자 근처로 다가갔다. 

   “저는 대강 먹었습니다.”

   남자가 선장에게 말했다.

   “저도 뭐…….”

   내가 말했다. 선장이 선장실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걸음을 내디디려던 선장이 고개를 돌렸다. 선장의 시선이 하늘을 향했다 나와 남자 쪽으로 되돌아왔다. 

   “술이나 한 잔씩 하세.”

   선장은 간단한 권유만 남겨놓고 선장실로 들어갔다. 나와 남자는 서로 눈치 살피며 쭈뼛거렸다. 다행히 선장은 몸놀림이 빠른 사람이었다. 금세 보드카 한 병 들고 나온 선장이 우릴 물끄러미 쳐다봤다.

   “둘이 서로 모르는 사인가?”

   선장이 우리에게 물었다. 전혀 예상치 못했단 표정이었다. 나와 남자가 서로를 바라보며 고갤 끄덕거렸다. 선장이 멋쩍은 웃음을 터뜨렸다.

   “미안하네. 성격 비슷한 사람들이어서 서로 잘 알고 지내는 줄 알았어. 통성명 하고 있게. 컵 좀 가지고 나올 테니까…….”

   끝말을 우물대며 선장이 다시 사라졌다. 선장이 건넨 보드카 병이 내 손에 들려 있었다. 남자가 먼저 자기 이름을 소개했다. 남자의 이름은 딜런이었다. 미국 서부 출신이었다. 나도 내 이름을 소개했다. 딜런은 “크리스토퍼…….” 하며 내 이름을 두어 번 반복해 되뇌었다. 

   “근데 뭐가 마지막이라는 겁니까?”

   내가 딜런에게 물었다. 아까 선장이 딜런에게 왜 또 배를 탔냐 하고 딜런은 이게 진짜 마지막이라 하지 않았던가. 딜런이 빙긋 웃었다. 딜런이 뭐라 대답하려 할 때 선장이 불쑥 나타났다. 

   “딜런이 소설 쓰겠다고 한 지가 벌써 1년이 지났네. 쓴다는 소설은 안 쓰고 자꾸 배를 탄다니까.”

   선장이 불만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딜런이 또 배 타면 선장은 뱃삯 받을 수 있으니 좋아해야 하는데……. 선장은 딜런이 배를 그만 타길 바란다. 딜런이 이만 소설을 쓰길 바란다. 선장에게 딜런은 고객이 아닌가 보았다. 자신에게 돈을 지불하는 사람 이상의 존재인가 보았다. 

   “소설이요?”

   내가 딜런에게 물었다. 선장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계속 투덜거렸다. 딜런이 두 손을 모아 쥐며 입을 열었다.

   “꿈입니다. 소설을 쓴다는 거……. 제가 살면서 처음으로 꾼 꿈이에요. 그리고 저한테 꿈은 이거 하납니다. 10대 무렵엔 꿈만 꿨어요. 소설책 읽는 건 좋아했는데 쓰는 건 엄두가 안 났습니다. 20대로 넘어와서는 일을 열심히 했습니다. 어느 정도 돈이 모이면 그 돈으로 먹고 살면서 글 쓰겠다고 결심했죠. 지금은 충분한 돈도 있고 시간도 있는데……. 쉽지가 않네요.”

   딜런이 조근조근 말했다.

   “뭐가 쉽지 않다는 겁니까?”

   선장에게 보드카 병을 내밀며 내가 딜런에게 물었다. 

   “지금까지 해 온 걸 다 내려놓고 소설을 쓴다는 거 말입니다. 꿈꿔 온 걸 실현하는 거요. 생활이 여유로워지면 당장 시작할 수 있을 줄 알았어요. 한 2년은 집에 틀어박혀 글만 써도 먹고 살 수 있을 만큼 돈을 모았는데……. 당분간 돈 안 벌어도 되는데……. 자꾸 배 타러 오게 돼요. 소설 쓰긴 미루게만 되고…….”

   딜런이 말끝에 헛기침을 토해냈다. 딜런도 나 같은 무역상인인 모양이었다.

   “아무것도 되지 못할까 봐 두려워서 저러는 거네.”

   선장이 딜런 대신 대답했다. 선장의 날카로운 눈빛이 딜런에게 날아가 박혔다. 가슴이 뜨끔거려서 딜런을 쳐다보았다. 딜런은 대꾸 없이 자기 컵에 보드카를 따랐다. 

   “오래 기다리고 힘써 준비해서 ‘짠!’하고 시작했는데……. 아무것도 이뤄내지 못할까 봐 겁이 나서 저러는 거네. 꿈에 부푼 가슴으로 쓴 소설이 아주 형편없는 종이 쪼가리에 불과할까 봐 오금이 저려서 저러는 거네.”

   선장이 계속 주절댔다. 위아래 어금니가 꽉 다물어졌다. 파도를 지나가는지 배가 한 번 울렁거렸다. 딜런은 출렁거리는 보드카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10년 넘게 꿈꾸는 연습만 하면 뭐하나? 꿈이 열매로 맺힐 때까지 견디는 연습은 하나도 안 됐는데……. 꿈꾸던 걸 실행에 옮긴 그 순간부터 한동안 나는 참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라는 걸 인정할 줄 알아야지. 그게 왜 두렵고 겁나고 피하고 싶은 순간인가? 지극히 자연스런 순간이지. 씨앗이 자기가 씨앗인 걸 못 견뎌 하고 분노하던가? 당장 꽃이 되지 못해서? 씨앗은 순리를 알고 있어. 땅 속에서 얻은 영양분 쌓으면서 싹틀 때까지 차분히 기다리네. 그러다 새싹이 되면 온 힘 다해서 위로 뻗어 올라가. 자네는 지금 씨앗이야. 꽃이 아닌 게 당연하고 열매가 아닌 게 당연하네. 지금은 땅 속에서 부지런히 실력 쌓을 시간이라고. 왜 자꾸 꽃이 아니고 열매가 아닌 자기를 비난하느냔 말이야. 왜 벌써부터 자길 실패자 취급하느냔 말이야. 훌륭한 글 못 쓸 것 같아서 여기 왔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린가? 훌륭한 글 못 쓸 것 같으면 안 훌륭한 글 쓰게. 여기 오지 말고 보잘것없고 당장 짓밟아 버리고 싶은 글을 쓰라고! 아유, 됐네. 됐네, 됐어……. 이런 소리 지겹다고 나도. 평생 씨앗으로 살게. 자네 맘대로 하게!”

   선장의 꾸지람에도 딜런은 계속 침묵했다. 화를 내지도 않았고 부정하지도 않았고 인정하지도 않았다. 선장과 딜런은 이런 얘길 전에도 나눈 적 있었나 보다. 아주 많이……. 선장에게 딜런이 단순한 고객이 아니란 사실이 확실해지는 순간이었다. 딜런에게 선장도 보통 상인이 만나는 보통 선장이 아닌 듯하다. 저런 뼈아픈 소릴 듣고도 묵묵한 걸 보면.

   두 사람 사이에 낀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갑자기 딜런이 컵을 내게 내밀었다. 나는 딜런의 컵을 받아 쥐었다. 딜런이 뒤를 돌아 걸어 나갔다. 갑판 계단을 내려가 버렸다. 나는 선장을 쳐다보았다. 선장은 검어지는 먼 바다를 내다보았다. 선장도 나도 딜런도 아직 보드카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상태였다.

   “미안하네. 이러려고 같이 있자 한 게 아닌데…….”

   선장이 내게 사과했다. 나는 고갤 저었다. 

   갑판 계단에서 발소리가 들려 왔다. 뒤를 돌아보았다. 다시 딜런이 올라오고 있었다. 딜런 손에 종이 뭉치가 쥐여 있었다. 딜런이 그 종이 뭉치를 선장에게 내밀었다. 

   “읽으시고 제 눈앞에선 짓밟지 마십시오. 전 벌써 여러 번 짓밟고 오는 길이라…….”

   딜런이 선장과 눈을 못 마주친 채로 말했다. 선장이 종이 뭉치를 건네받았다. 그리고 그것을 펼쳤다. ‘2000년대’라는 큼지막한 제목이 적혀 있었다. 딜런이 쓴 소설인가 보았다.

   “200년이나 뒤에 있을 일을 썼다고?”

   선장이 종이 뭉치 너머로 딜런을 힐끗대며 물었다. 딜런은 어깰 으쓱하며 내게서 컵을 받아 갔다. 

   “쉽지 않고 자꾸 미룬다고 했지 안 쓴다고는 안 했습니다.”

   딜런이 말했다. 

   “이래저래 사과할 일이 많이 생기는군…….”

   선장이 종이 뭉치를 접으며 웅얼거렸다. 선장은 종이 뭉치를 주머니에 넣으려 했다가 손에 쥐고 있으려 했다가 뭘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선장은 결국 선장실로 사라졌다. 아무렇게나 두고 싶지 않은 게 손 안에 들어오면 사람은 참 부산해진다. 선장실 안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배가 다시 한 번 울렁거렸다. 딜런을 바라보았다. 딜런은 선장실을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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