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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단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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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이로운 Nov 06. 2016

바다 한가운데 놀이공원이 있다

형과 나


   언젠가 긴 꿈을 꾸었다. 

   평소 때보다 오래 잠들었던 것도 아니다. 딱 하룻밤 꿈이었다. 그런데 그 꿈은 너무 길어서 하나의 생애 같을 정도였다.

   꿈의 시작부터 끝까지 다 기억할 수 있어서 꿈이 길게 느껴진 건가(꿈이 느닷없고 이상하게 여겨지는 건 우리가 꿈의 일부분만 기억할 수 있어 그런 거 아닌가). 그렇게까지 생생한 꿈은 처음이었다. 이후로는 그런 꿈을 꾸지 않았다.    


   그 선명하고 긴 꿈은 배들이 가득 정박해 있는 항구에서 시작된다. 나는 면 재질로 된 검은색 가방을 어깨에 둘러메고 있다. 내가 타고 갈 배를 기다리는 모양이다. 

   나는 내 몸을 멋대로 컨트롤 할 수 없다. 내 몸 속에 갇혀 내가 어쩌는지 구경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이 상황이 꿈인 줄 모르고 있다.

   안경 쓴 남자가 내게 손짓한다. 그가 입은 아이보리 색 조끼가 단정해 보인다. 그는 나일론으로 만든 카키색 가방을 메고 있다. 나는 그에게 웃으며 인사한다. 나는 그를 형이라고 부른다. 내가 형에게 다가가자 형은 왔던 길로 다시 돌아선다. 형이 앞장서 걷는다. 형은 나를 마중 나오는 길이었나 보다. 

   형과 내가 커다란 유람선 앞에 선다. 가스나 기름 냄새가 맡아진다. 유람선 몸체에 유람선 이름이 적혀 있다. 유람선 이름은 에버레스팅everlasting이다. 

   나는 가방에서 표 두 장을 꺼내 형에게 내민다. 형은 고맙다고 말하며 표를 받아 선원에게 건넨다. 두꺼운 손바닥을 가진 선원이 표를 확인한다. 선원은 표를 다시 우리에게 돌려준다. 또 다른 선원이 우리를 배 안쪽으로 안내한다. 우리는 곧장 갑판 위로 올라갔다.    


   배가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때다. 작은 배 한 척이 우리가 탄 배 옆으로 붙는다. 아까 우리 표를 받았던 선원이 형과 나를 외쳐 부른다. 우리는 밧줄을 타고 내려가 그 작은 배를 탄다. 뒤를 돌아봤더니 작은 배가 두 척 더 와 있다. 사람들이 밧줄을 타고 내려온다. 

   이윽고 작은 배들이 출발한다. 유람선은 우리와 반대 방향으로 나아간다.

   나는 몸이 조금 노곤하다고 생각한다. 저기 구석자리에 앉아 쪽잠이라도 자 두라고 형이 내게 말한다. 나는 어깨에 걸쳤던 가방을 품에 안고 빈자리에 쪼그려 앉는다.

   까무룩 잠든 나를 흔들어 깨운 건 형이었다. 졸음을 쫓기 위해 나는 눈꺼풀을 세게 끔벅거린다. 형이 내 오른팔을 끌어당겨 나를 일으킨다. 

   “다 왔어. 저기 봐.”

   바다 쪽을 향해 뜨거운 숨 내뱉으며 형이 말했다. 형의 목소리가 퍼져 나가는 그곳으로 고갤 돌린다. 

   바다 한가운데 놀이공원이 있다. 섬 전체가 놀이공원인 듯하다.    


   세 척의 작은 배가 섬에 정박한다. 초록색 유니폼 입은 직원들이 나와 우리를 맞는다. 직원들은 우리에게 표를 내라고 한다. 형이 우리 배표를 꺼낸다. 직원들 몸에 걸쳐진 유니폼에 에버레스팅everlasting이라고 적혀 있다. 우리가 타고 온 유람선 이름과 같다. 배 타려고 끊은 표가 놀이공원 입장표이기도 한 모양이다.

   형이 내 팔뚝을 툭 친다. 형을 돌아본다.

   “여기가 첫 번째 섬인데……. 이 섬이 제일 넓대.”

   상기돼 붉어진 얼굴로 형이 말했다. 나는 직원들의 유니폼을 다시 바라본다. 에버레스팅everlasting이라고 적힌 글자 밑에 세 개의 섬이 그려져 있다. 바다 한가운데 세 개의 놀이공원이 있나 보다. 그래서 아까 그 큰 유람선에서 모든 이들이 내리지는 않았구나. 나는 또 다른 섬에 내릴 이름 모를 사람들을 생각한다.

   표를 내고 받은 건 초록색 종이 팔찌다. 형과 나는 서로의 왼쪽 손목에 팔찌를 채워 주었다.     


   모래사장 한가운데 놓인 길을 걸어 놀이공원 입구를 지나 왔다. 주황색 인형 탈 쓴 사람들이 방문객들을 한 번씩 껴안아 준다. 까끌까끌한 인형 탈에서 바다 냄새가 났다. 나는 배가 조금 고프다고 생각한다. 내 허기는 기념품 가게 앞에 놓인 솜사탕 기계 때문인 것 같았다.

   형이 카키색 가방을 뒤적여 동전 몇 개를 꺼낸다. 형의 걸음이 조금 빨라진다. 형이 솜사탕 기계 앞에 놓인 줄 뒤에 선다. 형이 나를 돌아본다. 웃고 있는 형 얼굴이 내게 주는 느낌은 복잡하다. 나는 형이 멘 그 카키색 가방 안에 있는 전 재산이 지금 형 손에 들려 있음을 안다. 그냥 안다.

   형이 내게 새하얀 솜사탕을 내민다. 나는 이 솜사탕을 어떤 식으로 먹어야 이 달콤함이 기억 깊이 새겨질지 고민한다. 우리는 솜사탕을 나눠 먹으며 또 다시 걷는다. 형의 뺨은 계속 붉어져 있다. 형의 그 들뜬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는 문득 깨닫는다. 우리가 15년 만에 다시 만났음을. 15년 만에 다시 만난 지 얼마 안 됐음을.

   나는 형과 내 겉모습을 돌아본다. 다 커버린 우리 모습을.    


   형이 멈춰 선 곳은 바이킹 앞이다. 바이킹 안에 탄 사람들이 제각기 다른 목소리로 비명을 지른다.

   “이젠 이런 거 안 무섭지?”

   바이킹을 올려다보며 형이 내게 물었다. 나는 ‘이젠’이라는 단어가 담은 수많은 의미를 생각해 보느라 형에게 대답하지 못한다.

   형과 내가 바이킹 맨 왼쪽 자리에 앉았다. 안전 바가 내려오고 바이킹 운행이 시작된다. 머리카락 속으로 바닷바람이 가득 들어온다. 조금 어지럽지만 위협적이거나 두려운 느낌은 없다.

   이젠…….

   우리 맞은편 끝에 앉은 아이들이 고갤 숙이며 비명을 내지른다. 나는 형을 돌아보았다. 붉어져 있던 형의 뺨 위로 눈물이 흘렀다. 나는 그 눈물이 어떤 의미인지 너무 잘 알고 있었기에 그 눈물을 오래 보고 있을 수 없었다. 

   바이킹 운행이 절정에 다다르고 있었다.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더 다양해지고 더 커졌다. 형의 목 안쪽에서 터져 나오는 건 비명이 아니라 흐느낌이었다. 나는 무섭지도 않은데 고갤 숙이고 안전 바를 끌어안았다.




책 안내 : www.parkdabin.modoo.at



책 속 한 문장 :


살면서 맞닥뜨리는 어떤 어려움이 사랑 때문이라면……. 기꺼이 그 어려움 속을 헤매도 되는 거 아닐까. 사랑 없는 순조로움에 무슨 의미가 있나. 그런 용감한 생각이 물비린내와 함께 샘솟아 올랐다.

-소설집『내가 사랑하는 너에게』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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