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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이로운 Feb 05. 2017

이별의 이유가
​이별의 이유로 적당하지 못했음을

이토록 먼 미래인 오늘에서야



   엎드린 채 잠들어 있던 하현. 그녀가 어둠 속으로 오른손을 불쑥 뻗는다. 그 손이 허공에서 얼마간 허우적거린다. 오전 4시 27분. 
   한쪽 눈을 뜬 겨우 그녀가 창문 쪽을 올려다본다. 창문 윤곽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겨울 새벽의 짙고 뻑뻑한 암흑이 방향 감각을 뒤흔든다.
   뭘 쥐려고 했더라.
   하현이 오른손을 거둬들인다. 꿈의 마지막 장면에서 뭔가를 쥐려고 했던 것 같은데. 꿈 내용을 기억해 낼 수가 없다. 누구랑 싸우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어디로 바쁘게 돌아다녔던 것 같기도 하고. 되게 어수선한 꿈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내용도 없이 심란한 뉘앙스만 가득 남긴 꿈 때문에, 잠이 다 달아나 버렸다. 
   왜 이런 꿈을 꾼 거지. 최근에 스트레스 받은 일도 없었는데. 아닌가. 스트레스는 알게도 오고, 모르게도 오는 거라고 했으니까. 그렇게 말해 줬던 사람이 누구더라. 됐어, 알 게 뭐야.
   하현이 이불을 목 가까이 당겨 덮는다. 아랫배가 탱탱 부풀어 있다. 오줌이 마렵다. 자기 전부터 마려웠던 거지만.
   이러다 진짜 방광에 병나는 거 아니야? 하긴, 지금까지 방광이 무사히 버텨 준 것만 해도 용한 일이지만. 
   하현은 밤만 되면 화장실 가기 귀찮아하는 특이한 습성을 가지고 있다. 그 때문에, 그녀의 방광은 저녁나절 내내 팽창돼 있어야 한다. 꽤 오래 전부터 이어져 온 습성이다. 이 습성이 어디서부터 시작된 건지는 아무도 모른다.





   몸을 일으킨 하현이 방문 쪽으로 미적미적 걷는다. 차가운 방바닥이 그녀의 발바닥 온기를 식힌다. 정신이 점점 맑아지고 있다. 다시 잠들 수 있을까. 오늘 일요일인데.
   변기 위에 앉은 하현이 오른손으로 휴지를 뜯는다. 눈꺼풀이 저절로 감긴다. 너무 졸리지만, 다시 잠들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눈알이 녹아내릴 것처럼 졸리지만, 다시 잠을 청할 수 없는 상태. 하현은 이 가물가물한 상태를 자주 경험한다. 그런데 이 상태를 좀처럼 이해 못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그들은 “졸리면 도로 자면 되지!”라며, 그녀를 가볍게 나무라곤 했다. 잠에서 한번 제대로 깨 버린 뒤엔 다시 잠들지 못하는 사람의 고충을, 그들은 알지 못했다. 
   타인의 어떤 고충을 알지 못하는 이들의 80% 정도는 그 고충에 대해 별로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러니 “졸리면 도로 자면 되지!”하고 하현에게 타박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그녀는 “그러게.” 하고 만다. 구구절절 말해 봐야 뭐하겠니, “그래도 그냥 자면 되지!” 같은 대답이나 들을 텐데, 하는 심정으로.


   화장실 구석에서 물소리가 들린다. 하현이 그쪽을 바라본다. 물소리의 근원은 화장실 벽 아래쪽에 달린 수도꼭지다. 수도꼭지가 물방울들을 쉼 없이 토해내고 있다. 그 밑으로 플라스틱 대야가 놓여 있다. 대야 속은 이미 물로 가득 차 있다. 조용하고 꾸준히 넘쳐 가면서.
   물방울들이 대야 속으로 떨어질 때마다, ‘똑똑’ 하는 맑은 소리가 퍼진다. 물방울이 수면水面을 때리는 소리. 물방울이 물속으로 파고드는 소리.  


   겨울이 될 때마다, 하현의 집 화장실에 벌어지는 풍경이다. 수도관이 얼어 버릴까 봐, 물을 조금씩 계속 틀어 놓는 것이다. 이 익숙한 풍경은 그녀의 가족이 이 빌라로 이사 온 첫 해부터 시작되었다. 
   하현의 가족이 새 집에서 맞는 첫 겨울이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 집 화장실 수도꼭지는 꽉 잠겨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며칠 내내 기록적인 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참이었다. 주방이고, 세탁실이고, 화장실이고, 물이 나오는 데가 없었다. 하현의 어머니는 일시적인 단수斷水 때문에 물이 나오지 않는 건 줄 알았다. 근처에서 수도 공사를 하나 싶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옥상 수도관이 얼다 못해 터져 버렸다. 그래서 물이 나오지 않은 것이었다.
   빌라 꼭대기 층에 사는 하현의 어머니가 설비 공사 인부들을 불렀다. 공사 비용이 만만찮게 청구되었다. 
   그런데 빌라에 사는 다른 이웃들은 그 사실을 나 몰라라 했다. 매달 걷어 가는 빌라 관리비를 받아, 공사 비용을 충당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옥상 수도관은 빌라 공동 설비라, 그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하현의 어머니는 이웃들의 철저한 외면을 받았다. 그들이 처음 이사 왔던 때, 비어 있던 이 집의 밀린 관리비 명목으로 20만원을 뜯어 간 그들 아니었던가(지금도 그 관리비라는 게 어디에 사용되고 있는 줄 모른다. 전기요금, 수도요금, 가스요금 모두 각 가정에서 따로 내고 있기 때문이다. 빌라 내부 청소도 모두 각자의 몫이다. 그럼 대체 뭘 관리한다는 거지?). 평생 주택에서만 살다 빌라에 처음 온 그들은, 뭐라 항의도 못하고 20만원을 내어 줄 수밖에 없었다. 그게 관행이니 돈이나 내놓으라고 빡빡 우겨대는 이웃들을 마주하고 있자니 기가 막혀 할 말을 잃은 게 첫째 이유였고, 이런 사람들을 상대할 때는 손해 좀 본다 싶어도 원하는 걸 그냥 들어 주는 게 신상에 이롭다고 생각한 것이 둘째 이유였다. 도무지 말이 통하지가 않았다. 대화를 이어 나갈수록 더 말이 안 통할 것이었다.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20만원 안 주려고 실랑이 하다가, 200만원어치 정신적 피해를 입을 순 없었다.
   수도관 동파 때문에 그 호된 경험을 한 이후로, 하현의 어머니는 11월부터 화장실 수도꼭지를 열었다. 끔찍한 기억을 한시바삐 떨쳐 버리려는 표정으로.





   “물방울 소리.”
   하현이 잠꼬대처럼 중얼거렸다.
   방으로 되돌아온 하현이 조금 식은 이불속으로 몸을 집어넣는다. 방금 전에 자신이 우물거린 말을 떠올려 본다. 


   물방울 소리.

   떨어진 물방울이 수면에 닿을 때면, ‘톡톡’ 하는 소리가 난다. 그럼 물줄기 소리는? 물줄기가 수면에 닿을 때도 소리가 났었나. 소리가 나지 않을 이유는 없지만, 그 소리가 정확히 어땠는지는 잘 모르겠다. 물방울보다는 물줄기가 수면을 훨씬 무겁고 세게 때릴 텐데도. 
   물방울 소리는 분명히 알지만, 물줄기 소리는 모른다. 물줄기 소리를 알려고 한 적이 없다.
   나는 항상 뭔가가 ‘조금’일 때만 그것에 신경을 쏟았구나. 그게 물이든, 사람 마음이든.  

   어떤 사람 마음이 하현에게로 물줄기처럼 쏟아지고 있을 때, 그녀는 그 소리를 듣지 못한다. 그러다 그 마음이 물방울처럼 줄어들고야, 그녀는 그 소리를 알아차린다. ‘톡톡’ 하고 조금씩 흘러내리는 그 마음의 소리를 듣는다. 그 얼마 안 되는 마음 때문에 그녀는 불안하다. 그녀에게로 오던 그 마음이 곧 멎어 버릴까 봐. 
   집중해 들으려 하지 않은 게 누군데.
   왜일까. 나는 왜 모를까. 누군가의 마음이 내게로 꽤 많이 쏟아지는 중일 때는 왜 모를까. 왜 그 마음이 줄어들거나 바닥날 쯤에야 알아차리게 될까. 그 사람 마음이 그곳에 있었다는 걸. 꽤 많이 내게 흘러들었다는 걸. 

   “그게 거기 있는 줄 몰랐다는 건, 그게 거기 있는 게 당연하기 때문이야. 거기 있는 걸 못 봐서 몰랐던 게 아니야. 그걸 다신 못 보게 되리라고 생각 안 하기 때문에, 그래서 모르는 거야. 내가 무슨 말하고 있는 줄 알겠어? 이해가 돼? 하나도 감이 안 오지?”라고, 누군가에게 말했던 적이 있다. 하현이 누군가에게.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말했던 적이 있다.


   울음이 터져 나왔다. 이불 속에 묻힌 하현의 몸이 둥글게 말린다. 
   나를 몰라준다는 이유로 헤어지자고 했었는데. 나도 몰라줬었구나. 똑같았구나. 그 사람과 헤어진 지 2년이나 지난 오늘에야, 나는 겨우 조금의 감을 잡는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감을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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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 한 문장 :

나는 싸울 때 싸우더라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마음 품고 사는지, 어떤 생각 갖고 사는지, 제일 가까운 사람한텐 그냥 다 보여주고 싶어. 우길 때 우기고, 양보할 때 양보하더라도 말이야.

-소설집『내가 사랑하는 너에게』중-


소설집과 산문집을 발행하는 WRIFE MAGAZINE은 ‘나’와 ‘나’가 만나 ‘나’와 ‘너’가 되고, ‘나’와 ‘너’가 어우러져 ‘우리’가 되는 모든 순간들을 담아냅니다. WRIFE MAGAZINE의 시선과 마음과 글이 머무는 곳은 언제나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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