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민아.
너한테 편지 쓰는 거, 처음인가? 아마 처음인 듯한데. 혹시, 놀랐어? 내가 너한테 편지 써서?
나 되게 무디다고, 네가 말했잖아. 나랑 알고 지낸 지 얼마 안 됐을 때. 그리고 우리 사귄 지 꽤 됐을 때도. 너무 무뎌서, 나는 사람 마음 섬세하게 파악 못한다고.
네가 그렇게 말했을 때, “그래, 나 되게 무디지.” 하고, 내가 대꾸했던 기억난다. 그 대꾸, 지금도 유효해. 나는 여전히 무뎌.
근데, 네가 2주 전에 했던 말이 자꾸 생각나네. 이렇게 둔해 빠진 내 마음에, 네 말이 자꾸 걸려 있어. 나는 그 말을 자꾸 곱씹게 된다. 네 말 때문에, 내 기분이 계속 예민해.
새로운 사람 만나는 게 언제부터 꺼려졌는지 모르겠다고, 네가 말했잖아. 살아온 세월만큼 네 역사는 길고 복잡해졌는데, 그걸 새로운 사람한테 일일이 설명하기가 너무 귀찮다고. 점점 더 귀찮아질 거 같다고.
그 말의 의미만큼 네 표정이 너무 어두워서, 나는 걱정스러웠다. 어째서 네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 그 생각이 너를 얼마나 괴롭게 만드는지. 그런 것들을 섬세하게 헤아려 줄 수 없어서, 한참 미안했고.
너 놀라고 있지? 내가 이런 말해서. 난 놀라고 있어. 내가 누군가의 상태를 이렇게까지 세세하게 파악한다는 것에.
아무튼 말이야. 희민아. 나, 네 말 오래 생각했다. 왜냐면, 나도 너랑 똑같이 생각했거든. 새로운 사람한테 나를 표현하는 게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 같다고. 점점 더 성가신 것 같다고. 그래서 새로운 사람 만나는 게, 점점 더 힘들어지는 것 같다고.
왜 그게 어렵고 성가시고 힘들어지는지, 내가 오래 생각해 봤어. 그리고 한 가지 결론에 다다랐다.
‘새로운 사람 모두에게, 내 모든 걸 낱낱이 밝힐 필요 없다. 내 모든 걸 낱낱이 밝히는 일 때문에, 어렵고 성가시고 힘든 마음 가질 필요 없다.’
이상한 결론 같지? 처음엔 나도 얼떨떨했어. 뭐 이런 결론이 다 있나, 진짜 이 결론대로 살아도 되나, 싶기도 했고.
근데 말이야. 나는 이 결론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어. 나를 진실하게 드러내는 잠깐의 순간이, 나에 대해 아주 많은 걸 설명해 주더라고. 살아온 얘기 3시간 줄줄 늘어놓는 것보다, 천천히 걸으면서 좋아하는 영화 얘기 30분 하는 게, 나를 훨씬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더라고. 그걸 어제 깨우쳤다. 신입사원 오리엔테이션 가는 길에.
그거 알아차리자마자, 네 생각이 났어. 너한테 이 깨달음을 전해 주고 싶었다.
‘새로운 사람 모두에게, 내 모든 걸 낱낱이 밝힐 필요 없다. 내 모든 걸 낱낱이 밝히는 일 때문에, 어렵고 성가시고 힘든 마음 가질 필요 없다.’
희민아. 새로운 사람한테 네 세상을 모조리 보여 주지 않아도 돼. 네 세상을 엿볼 수 있는 창문 몇 개만 열어 줘도 돼. 취향이라든지, 취미라든지, 그런 거, 몇 개만 알려 줘도 돼. 그것들을 조금씩 알아 가면서, 사람들은 네 세상을 차근차근 파악할 거야. 네가 모든 걸 말하지 않아도, 네가 가진 몇 가지 진실한 부분을 알게 된 사람들은, 너에 대해 꽤 깊이 있게 이해할 거야. 네 세상에 공감할 거야.
충분히 그럴 거야. 우리가 상대하는 사람들의 이해력을, 좀 더 믿어 보자.
그리고 우리 역사가 우리 자신은 아니잖아. 우리가 살아온 순간들이 오늘의 우릴 형성한 건 맞지만. 우릴 이해하기 위해, 타인이 그 모든 순간을 알아야만 할까? 글쎄.
네가 왜 그렇게 말하고 행동했는지, 논리적으로는 납득할 수 없지만, 그럴 만한 사연이 있었으니 네가 그랬을 거라고, 나는 너를 이해할 수 있어. 그런 식으로 너를 몇 차례 이해해 왔어. 너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 아니야. 진짜로 난 그래.
난 네 역사를 거의 다 아는 사람이지만, 네 역사를 다 알기 때문에 널 이해하는 건 아니야.
네가 어떤 일 겪고 와서 아무 말 없이 화만 잔뜩 내도, 나는 그런 너를 이해해. 네가 100% 옳기 때문이 아니야. 네가 그럴 수밖에 없는 속사정이 분명히 존재할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야.
내가 무슨 말하는지, 이제 좀 알겠지? 나는 너를 알아서 너를 이해하는 게 아니야. 네 존재를 사랑하기 때문에, 믿기 때문에, 네 존재가 행하는 모든 것들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렇게 너를 이해하는 거야.
희민아. 네 삶이 정당한 거라고 네가 설득하지 않아도, 너 사랑하는 사람들은 네 삶에 다 이유가 있다고 생각할 거야. 네 삶이 그 나름대로 합당하다고 생각할 거야. 내가 그렇듯이.
나는 희민이 네가 새로운 사람들이랑 더 편한 시간 보냈으면 좋겠다. 새로운 사람들 만나는 게, 네 괴로움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런 마음으로 몇 글자 적어 봤다.
다 놀라고 나면 전화해. 나는 마저 놀라고 나서 전화 받을게.
사랑을 볼 수는 없지만, 나를 쳐다보는 누군가의 흔들림 없는 눈동자를 볼 수는 있다. 내 어깨나 허리를 감싸 안는 누군가의 팔을 느낄 수 있다. 슬픔이 토막 내 버린 건 내 가슴인데, 그 슬픔으로 인해 붉게 부푼 누군가의 눈시울을 발견할 수 있다.
나는 그것으로 사랑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산문집 『마음이 퇴근하는 시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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