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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By 박다빈 . Mar 20. 2017

스무 살 언저리의 그 사랑



   몇 년 간 사랑한 사람이 있었다. 방금 말한 이 ‘몇 년 간’은 내가 아주 어렸던 때의 기간이다. 내가 ‘아주 어렸던 때’라고 지칭한 이 시기는 내 20대 초반을 의미한다. 그 감정이 사랑인 줄도 모르고, 그 사람을 몇 년 간 사랑했다.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은 ‘그 사람을 사랑했다.’라는 형태로 알아차려졌다. 그 사람과의 관계가 끝난 직후에, 나는 ‘그 사람을 사랑했다.’라고 생각했다. 그 사람을 사랑하는 동안에, 나는 사랑에 대한 그 어떤 의식도 없었다. 

   그때 그 사람은 내 모든 것이었으므로. 나는 그 사람으로부터 모든 감정을 느꼈으므로. 그 사람에 대한 뾰족한 정의를 내릴 수 없었던 걸까. 사랑한다고. 우주가 한 사람이기도 하고, 한 사람이 우주이기도 한, 미묘한 세상 속에 내가 들어와 있다고.

   사랑이 뭔 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가장 대단한 사랑을 했던, 눈부신 몇 년이 내게 있었다. 사랑이 뭔 줄 제대로 알지 못했기에, 알지 못해 판단할 수 없었기에, 사랑이 가장 자유롭고 찬란했던, 환희의 몇 년이 내게 있었다.





   별안간 그 사람이 떠오른 건, 상자 하나 때문이었다. 20년 동안 살던 집을 새로 짓기로 한 직후에, 나는 그 상자를 발견했다. 옆 동네에 있는 작업실로 내 모든 짐을 옮겨야 했기 때문이다.

   20년 만에 그 상자를 발견했다. 다락방 구석에 방치돼 있던 그 상자를 보자마자, 가슴이 터질 듯 뛰는 걸, 나는 느꼈다. 그 상자는 그 사람과 나 사이에 남은 물질적 흔적이 총집합돼 있는 곳이었던 까닭이다. 

   사랑이 끝나서, 모조리 끝난 사랑을 거기 담아 보관했다고 생각했는데. 그 상자를 보았던 그 날, 내 가슴은 생명을 갓 부여받은 것처럼 거세게 요동쳤다. 가슴을 둘러싼 뼈들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가슴이 울룩불룩 튀어나왔다 움푹 들어가기를 반복하는 것 같았다. 만화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현실 감각이 한 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 상자를 열어 보기까지, 3주가 걸렸다. 작업실로 운반된 그 상자는 내 책상 밑에 놓여 있었는데, 나는 그것 위에 발을 얹거나, 그것을 툭툭 쳐 보곤 했으면서도, 그 상자를 열어 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 상자 속에서 나올 물건들이 품고 있을 에너지를 감당할 수 있을지, 나는 몰랐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그 에너지를 감당할 수 있을 거라는 데에, 나는 약간 비관적이었다. 그래서 꽉 닫힌 그 상자를 곁에 두고만 지낸 것이다.    


   마침내 그 상자를 열어 본 건, 여름이 막 시작되던 어느 날이었다. 화장실에서 오줌을 오래 누고 나왔는데, 느닷없이, 그 상자를 열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난데없는 결심이 당혹스러웠지만, 나는 몸을 낮추고 책상 밑에 들어갔다. 그 상자를 꺼내 왔다. 그리고 그 상자를 열었다. 

   상자 표면에 남아 있던 먼지가 손끝에 느껴졌다. 짐 옮기던 날, 상자를 꼼꼼히 닦았는데도, 먼지가 남아있었다. 얼룩덜룩 묻어 있던 먼지는 그 자체로 20년 세월 같았다. 단번에 걷어내기 어려운, 단번에 없던 걸로 치기 어려운, 단번에 거슬러 올라가기 어려운, 20년 세월. 하지만 나는 그 20년 세월을 단번에 걷어내 버린 것처럼, 그간의 20년이 갑자기 사라져 버린 것처럼, 시간을 삽시간에 거슬러 올라갔다. 20년 세월의 노화를 잊고, 내 가슴은 다시 울렁거렸다.     





   상자에는 노트 몇 권과 편지들과 자잘한 생활용품들, 버리지 못하고 가져온 냅킨이나 일회용 종이컵 뚜껑 같은 것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퀴퀴한 냄새가 맡아졌다. 그 냄새는 그 시절의 신선함이 더는 이곳에 남아 있지 않다는 걸 암시했다. 하지만 내 가슴은 계속, 점점 더, 삐거덕거렸다. 가슴 안쪽에서 뭔가 잘 맞물리지 않는 소리가 실제로 나는 것도 같았다. 명치가 조금 아팠다.

   다 끝난 사랑인 줄 알았는데. 지금 내 나이가 몇인데.    


   나는 맨 위에 놓여 있던 연습장을 열어 보았다. 그 안에는 내가 그 사람에게 보낸 편지 내용이 고스란히 적혀 있었다. 그 옛날, 그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 내용을 연습장에 그대로 베껴 놓는 습관이 내게 있었다. 그 사람과 관련된 모든 것들을 살뜰히 기록해 놓고 싶었던 까닭이다. 

   네 권의 연습장을 다 읽었을 때, 뱃속에서 꼬르륵대는 소리가 났다. 정오였다. 냉장고에서 꺼내 온 사과를 베어 먹으며, 나는 편지 꾸러미를 꺼내 들었다. 





   그 사람이 내 이름 부르며 시작한 편지들을, 나는 하나하나 읽어 보았다. 편지지들 색깔은 예전만 못했다. 그것들 대부분이 누렇게 바래 있었다. 그때쯤엔 내 온몸이 너무 뜨거워서, 겨드랑이 안쪽과 등허리에 땀이 계속 맺혀서, 나는 한여름을 사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창밖은 5월 말이었다. 


   그 사람이 내게 써 준 편지들을 읽다가, 문득, 나는 낯선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 기분이 너무 생소한 나머지, 나는 갑자기 생애의 모든 기억을 잃어버린 사람이 된 듯했다. 그 사람이 나를 향해 적어 보낸 모든 문장이 너무 부드럽고, 따뜻하고, 절절해서, 나는 깜짝 놀랐다. 

   한없이 점잖은 그 사람을 내가 너무 사랑해서, 그러다 제풀에 지쳐 버려서, 그래서 끝난 사랑이라 생각했는데. 편지 속에 들어앉은 그 사람 말 곳곳에 담긴 감정들이 용암처럼 끓고 있어서, 나는 깜짝 놀랐다. 

   편지 속에 ‘좋다.’라는 단어가 너무 많이 적혀 있어서. 편지 속에서, 그 사람이 내 이름을 쉴 틈 없이 불러서. 편지 쓴 사람이 나를 보고 싶어 한다는 걸, 곁눈질로도 알 수 있을 만큼, 그 사람 문장이 분명해서. 이런저런 문장을 통해, 그 사람이 나와 내 마음에 대해 안달해서. 나 때문에 펑펑 울고 말았다는 얘기를, 연필로 꾹꾹 눌러 쓴 편지가 있어서. 나는 깜짝 놀랐다.

   ‘내가 몇 년 간 사랑한’ 사람이 ‘나를 몇 년 간 사랑한’ 사람으로 돌변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너무 커다란 내 사랑이 버거워 나동그라진 게 아니었다. 내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이, 그 사람 안에 있었다. 내가 그걸 바라보지 않은 것뿐이었다.

   나는 단지 두려웠을 뿐이었다. 지친 게 아니라, 두려웠을 뿐이었다. 그 사람이 주는 사랑을 받을 자격이 내겐 없다는 생각이 자꾸 커져 간다는 사실 때문에, 두려웠을 뿐이었다.

   그래서 달아났다. 달아날 필요가 없는 곳에서, 어쩌면 영원히 머물러도 좋았을 그곳에서, 나는 달아났다. 그걸 깨달았을 때, 내가 입고 있던 파란색 셔츠 등허리는 둥글게 젖어 있었다.    


   몇 년 간 사랑한 사람이 있었다. 내가 몇 년 간 사랑한 사람이 있었다. 나를 몇 년 간 사랑한 사람이 있었다. 우리는 사랑했다. 우리였다. 나는 한 순간도 혼자이지 않았다.

   우리였다.

   우리였다.

   우리, 우리였다.




사람과 삶을 공부합니다. 배운 것들을 책 속에 담아내며 살아갑니다. 모두의 마음과 삶이 한 뼘씩 더 환해지고 행복해지는 책을 만들고 싶습니다. 느리고 서툴지만, 더 나은 책을 위해 부단히 고민합니다. 카쿠코 매거진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매거진을 통해 소설집과 산문집을 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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