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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이로운 Mar 24. 2017

생각의 각도를 수정해 준 여행



   여행지에서, 안경이 부서졌다. 내가 쓰고 있던 안경이. 안경테만 어설프게 부러진 게 아니었다. 테부터 알까지 산산이 부서졌다. 바닥으로 떨어진 내 안경이, 신발 신은 발에 완전히 짓밟힌 것이다. 2년 전 여름이었다. 허름한 분식집 입구 자리에서였다.

   내 시력이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가 있던 그곳은 익숙한 생활공간이 아니라, 낯선 여행지였다. 색다른 세상을 경험하러 떠난 그곳에서 안경 없이 지낼 수는 없었다.

   분식집에서 나오자마자, 나는 주위를 휘둘러보았다. 사방이 흐릿하게만 보였다. 근시近視를 앓고 있는 내 맨눈으로 안경점을 찾는 건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다시 분식집으로 들어갔다. 분식집 주인 아주머니가 나를 보며 “어서 오세요.” 하고 인사했다. 아주머니는 내가 새로운 손님인 줄 알았던 모양이다. 

   내가 방금 나간 손님임을 설명한 뒤, 나는 근처에 안경점이 있는지 여쭤 보았다. 눈을 가늘게 뜬 아주머니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다행히 이 부근에 안경점이 두 개나 있었다. 시야 초점을 잡기 위해 인상을 한껏 찌푸린 채로, 나는 안경점을 찾아 다녔다. 신호등 사이에 놓인 횡단보도를 건넌 뒤, 작은 골목으로 접어들었고, 다시 작은 횡단보도 하나를 건넜다. 

   크게 헤매는 일 없이, 나는 안경점을 찾을 수 있었다.    

   안경점 내부 인테리어는 간소했다. 아니, 제대로 보이는 게 없어서, 그냥 그렇게만 느껴진 건지도 모른다. 그곳엔 흔한 유행가 하나 켜져 있지 않았다. 안경 진열장 옆을 서성이는 한 사람이 내고 있는 조용한 인기척이, 그곳을 떠도는 유일한 소리였다. 

   “여기, 주인 안 계십니까?”

   허공에다 대고, 내가 말했다. 유리 진열장 옆에 있던 사람이 나를 돌아보았다.

   “전데요.”

   진열장 위를 손바닥으로 쓸며, 그가 대꾸했다.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이목구비가 정확히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가 앳된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내가 식별할 수 있었다. 

   그의 나이가 나보다 꽤 많이 어릴 거라는 건, 안경점에 들어오고부터 짐작했다. 그의 옷차림이나 탄탄한 체형에서, 제법 어린 티가 났던 까닭이다. 그래서 내가 주인을 찾은 것이었다.   

   “아, 네. 젊은 분 같아서, 주인 아니신 줄 알고.”

   몸 앞으로 손을 휘저으며, 내가 주절거렸다. 공기 중에 떠 있던 내 착각을 흩뜨리기라도 하듯이.

   “어떻게 오셨어요?”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그가 내게 물었다.

   “안경을 하려고 하는데요.”

   “누구 안경을, 손님 안경을요?”

   “아, 네. 아까 안경이 부서져서요.”

   말을 맺으며, 나는 손끝으로 콧등을 만졌다. 안경코를 밀어 올리려는, 무의식적인 손짓이었다. 2초에서 3초 남짓, 그가 내 눈을 쳐다보는 듯했다.

   “안경 다 되는 데까지, 얼마나 걸리나요?”

   내가 물었다.

   “아, 금방 될 거예요. 이쪽으로 들어오세요.”

   갈색 문을 열고 들어서며, 그가 나를 안내했다. 그를 따라 들어간 곳은 시력 검사실이었다.    





   그의 말대로, 새 안경은 금세 완성됐다. 새 안경집과 함께, 그가 새 안경을 들고 왔다. 카운터 뒤에 선 그가, 안경 닦는 천을 꺼내 들었다.

   “안 닦아도 됩니다.”

   카운터 쪽으로 손 내밀며, 내가 말했다.

   “닦아야죠. 지문이 이만큼 많이 묻었는데. 손님은 하루에 안경 몇 번이나 닦으세요?”

   그가 느닷없는 질문을 던졌다.

   “음, 글쎄요, 하루에 몇 번이나 닦진 않는데. 사나흘에 한 번씩 닦는 거 같아요, 나는.”

   “닦은 안경 쓰면 어때요?”

   “사장님도 안경 쓰셨잖아요. 몰라서 물어요? 어떻긴요, 무지 잘 보이죠. 딴 세상 온 거 같고.”

   “그렇죠? 저는 매일 아침마다 안경 닦거든요. 안경 닦기 전에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아, 안 닦아도 될 거 같은데.’ 하는 생각을요. 근데, 막상 안경을 닦잖아요? 닦고 난 안경을 쓰잖아요? 닦기 전 안경 너머로 보던 세상하고, 닦고 난 안경 너머로 보는 세상하고, 너무 다른 거예요. 안경 닦기 전에도 세상 보는 데 아무 탈 없었는데. 안경 닦고 나니까, 세상이 완전 맑고 선명해지는 거예요. 안 닦았으면 어쩔 뻔했나, 싶고.”

   “뭐, 그렇죠.”

   방금 다한 말을 왜 또 하느냐는 투로, 내가 맞장구쳤다. 나는 안경을 빨리 받고, 어서 다음 일정을 시작하고 싶었다.

   “너무 작아서 ‘그깟 거’라고 불러 버릴 수 있는 어떤 행동도, 아무것도 바꾸지 못할 거 같은 그런 행동도, 세상을 충분히 변화시킬 수 있지 않을까. 세상을 좀 더 좋은 곳으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그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혼잣말 같았다. 내 귀가 멀쩡히 뚫려 있어서, 그게 혼잣말이 될 수는 없었지만. 





   흘러가듯 새어 나온 그의 그 말은, 내 가슴을 움찔하게 만들었다. ‘더 나아질 게 아무것도 없을 거라 확신한 순간에도, 뭔가 더 나아질 구석이 있을 테니, 분명 있을 테니, 뭐라도 해 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찰나적인 생각이 나를 스치고 갔다. 찰나적인 생각 혹은 찰나적인 각성覺醒이.

  방금 한 말이 자기 몸에서 나온 거란 사실을 말끔히 잊은 사람처럼, 그는 무심한 얼굴이었다. 그가 내게 새 안경을 내밀었다. 그에게서 나올 다음 말을 기다리며, 나는 말없이 안경을 건네받았다. 하지만 그는 뒷말을 잇지 않았다.  

   “결제 도와드리겠습니다.”

   단조로운 톤으로, 그가 말했다. 약간의 어지럼증을 느끼며, 나는 카운터 앞에 섰다. 도수가 약간 높아진 안경을 써서 어질한 건지, 갑자기 의식이 전환돼서 그런 건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그는 전자계산기에 숫자들을 쳐 넣고 있었다. 나는 선명해진 그의 얼굴과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내 예상만큼 어려 보이는 생김새는 아니었다. 

   뒷주머니에서 꺼낸 신용카드를 그에게 내밀며, 나는 그가 했던 말들을 가만히 곱씹었다.

   뭐가 됐든, 해 보고, 해 보고, 또 해 보고, 적어도 서너 번은 해 보자는 마음가짐이, 아무리 다져 넣어도 쉽게 빠져 나가기만 하던 그 마음가짐이, 뽑히지 않는 뿌리로 내게 박힌 순간이었다.

   ‘더 나아질 게 분명 있다. 그건 언제나 있다.’는 낙천적인 시각이 망막 깊이 스며든 순간이었다. 


   그 안경점에서 되찾은 시야는 한 가지가 아니었다. 새로운 경험을 하러 갔다가, 새로운 세상을 달고 온 여행이었다. 그 세상을 원래 내 세상과 연결시키는 건, 순전히 내 몫으로 남았고.




사람과 삶을 공부합니다. 배운 것들을 책 속에 담아내며 살아갑니다. 모두의 마음과 삶이 한 뼘씩 더 환해지고 행복해지는 책을 만들고 싶습니다. 느리고 서툴지만, 더 나은 책을 위해 부단히 고민합니다. 카쿠코 매거진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매거진을 통해 소설집과 산문집을 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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