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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이로운 Apr 25. 2017

사람이 사람에게 쉬워진다는 것



   “내가 좀 망가지고 그러면, 너한테 내가 쉬워지려나?”

   그가 그렇게 말했다. 어제 저녁, 편의점 앞에서. 아이스크림 포장 뜯고 있던 내 쪽으로 걸어오다가, 난데없이.

   쉬워진다. 쉬워진다. 그가 말한 ‘쉬워진다.’가 어떤 의미인지, 명확히 가늠되지 않았다. 사람이 사람에게 쉬워진다는 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정확히 어떤 건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쉬워진다는 게, 내 경우에는 썩 유쾌한 상황이 아니어서, 나는 그에게 되물어 보았다. “뭐가 쉬워지는데요?” 하고. 사람이 사람에게 쉬워진다는 게, 그에게는 어떤 상황인 건지, 좀 더 자세히 들을 필요가 있었다. 

   내 질문을 받은 그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나는 그의 손 안에 들려 있던 아이스크림을 가져와, 그 포장을 대신 뜯었다. 내가 그러는 동안, 그는 차도 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내게 해 줄 대답을 생각하는 듯했다.





   “나 되게, 느슨하지 않은 사람이잖아.”

   하얀색 트럭 한 대가 편의점 앞을 지나치자마자, 그가 말했다.

   “느슨하지 않은 사람?”

   “너를 잘 보살펴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게, 나한테 있어. 니가 그러라고 한 건 아니지만. 나한테는 그런 의무감이, 있어. 그래서 니 앞에 설 때마다, 내가 좀 빡빡하게 구는 거 같다. 좀이 아니라 좀 많이. 자꾸 너한테 어른 행세를 하려고 하네, 내가. 옳은 것만 찾아서, 옳은 소리만 하려 하고. 너도 어른이고, 아니, 어른이 아니더라도, 옳고 그름 같은 건, 자기 스스로 얼마든 찾을 수 있는 건데.”

   그렇게 말한 뒤, 다시, 그는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나는 그에게 그의 아이스크림을 내밀었다. 내게서 아이스크림을 받아 간 그가, 편의점 입구를 잠깐 힐끔댔다. 

   “그러니까, 쉬워지는 게 어떤 건데요?”

   나는 그에게 좀 더 세밀한 대답을 요구했다.

   “편안한 거?”

   “내가 우리 사이, 편안하지 않다고 했었나? 그런 적 없는데?”

   “마냥 편안한 것도 아니잖아.”

   “그런 말한 적도 없는데? 마냥 편안한 건, 어떤 건데요?”

   “음…….”

   “누가 뭐라고 했어요?”

   “응?”

   “누가 우리 사이더러, 뭐라고 했냐구.”

   “아니, 그냥.”

   “내가 뭐 말실수 한 거 있어요?”

   “아니야, 그런 거.”

   “근데 왜 갑자기 쉬운 거 타령이지? 혹시, 나 불편해요?”

   “아니! 절대 아니야. 나는, 니가 나 불편해 할까 봐 그러지.”

   “안 불편해요.”

   “안 불편해?”

   “불편할 게 뭐 있어. 나는 우리, 편한데? 편한 것도 편한 거 나름이잖아요.”

   “편한 거 나름?”

   “편한 거에도 종류가 있다구. 이 사람 만날 땐 이런 식으로 편하고, 저 사람 만날 땐 저런 식으로 편하고, 뭐, 그런 거 아니에요? 거기에 정답이 어디 있어. 정답 없어요. 나한테는 없어요.”

   말을 끝내는 것과 동시에, 나는 손을 뻗어 그의 왼팔을 잡았다. 아이스크림 쥐고 있는 그의 왼팔을, 그의 얼굴 쪽으로 들어 올렸다. 내가 그러자 싱긋 웃던 그는, 얼굴을 내밀고 아이스크림을 깨물어 먹었다.





   “아까 나, 친구랑 통화하는 거, 그거 다 들었죠?”

   내가 묻자, 그의 눈이 두 번 깜빡거렸다. 빠르게. 그러면서 그의 입술이 조금 들썩거렸지만, 그는 잠자코 마른침만 삼켰다.

   “들었어요, 안 들었어요?”

   내가 다시 물었다.

   “들었어.”

   “듣고, 질투 났어?”

   “아니야, 그런 거.”

   “그럼, 신경 쓰였어요?”

   “그냥.”

   “원래 이렇게, 그냥이란 단어를 자주 썼었나? 자꾸 그냥이라 그러네.”

   “니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너한테 해 주는 모든 역할을, 내가 다 해 주고 싶어서, 그래서 그래. 안 되는 일인 거 알면서도, 그걸 하고 싶어서, 그래서 그래.”

   그렇게 말한 그가 얼굴을 살짝 붉혔다. 그 순간, 나는 가슴 안쪽의 뭔가가 움푹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줏대 없게.”

   말을 잇지 못하고 있는 나를 바라보며, 그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고개를 짧게 내저었다.





   “친구처럼 편한 건 편한 건데, 망가지는 건 뭐예요? 왜 망가져?”

   살짝 웃으며, 내가 물었다.

   “실수 같은 거, 그런 거 보여주고, 잔소리 듣고 싶어, 너한테. 니 마음에 올라오는 말들, 잔소리를 포함한 그런 말들을, 니가 거르지 않고 나한테 다 해 버릴 수 있었으면 좋겠어.”

   “언제부터 그렇게 생각했어요?”

   “몰라. 아까 분명해졌어, 그 생각이.”

   “근데, 내가 그래 버리면, 싸울지도 몰라요, 우리.”

   “좀 싸워야 되지 않겠어?”

   “싸워야 된다구?”

   “응.”

   “뭐야, 그런 게 어디 있어. 난 안 싸우고 싶은데. 왜 그렇게 생각해요?”

   “싸우고 싶어서 싸우자고 하는 게 아니야. 괜한 꼬투리 잡아서 너랑 싸우겠다는 게 아니야. 이유 없는 싸움이 필요하다는 게 아니야. 내 말은, 서로 맞서야 할 일 있으면, 억누르지 않고 맞서자고. 최선을 고려한답시고, 서로 위한답시고, 마음 무겁게 지내지 말자고. 참지 말자고. 뭐 때문으로든.”

   “그동안 나한테 참은 게 많나 봐?”

   내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아, 너 진짜! 아니야, 그런 거.”

   “이제 감이 와요. 쉬워지는 게 어떤 건지.”

   “감이 와?”

   “네, 스스럼없어지자는, 뭐 그런 거 같은데.”

   “아, 응. 그런 거 맞아.”

   “새롭네.”

   “뭐가?”

   “기분이요. 싸울 일 생기면 싸워 버리자는 사람은 처음이거든요.”

   “그런 말하기는, 나도 처음이네요.”

   “나 좀 이상한가 봐.”

   “왜?”

   “사이좋게 지내자는 사람도 아니고, 싸우자는 사람한테, 마음이 기울어 버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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