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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이로운 Apr 26. 2017

이렇게도 사랑에 이르러



   한 달에 딱 한 번씩, 아니, 한 달도 너무 짧으니까, 두 달에 딱 한 번씩, 이메일 주고받자는 사람이 있었다. 직접 만나는 것도 아니고, 전화 통화 하는 것도 아니고, 문자 메시지 교환하는 것도 아니고, 이메일로 두 달에 한 번씩 마주하자는 사람이 있었다. 

   그 제안을, 나는 거절하고 싶었다. 그 자리에서 당장.

   벌써부터 애가 타서.    


   1년 정도 그렇게 지내 볼 생각 없냐고, 이메일이라는 실낱같은 연결만 유지한 채로, 자기랑 지내 볼 생각 없냐고, 그 사람이 내게 물어 왔을 때, 나는 그 사람을 좋아하고 있었다. 그 사람과 세 계절을 꼬박 보낸 상태였고, 그 사람이 다른 나라로 1년 간 출장 가 있을 거란 사실을 알게 된 상태였으며, 그럼에도 그 사람을 마음에 두겠다는 결심이 선 상태였다.

   내 느낌에, 그 사람도 나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근데 이메일만 나누자고? 그건 좀 너무하잖아!    





   솔직히, 나는 그 사람이 내게 청혼할 줄 알았다. 사귀면서 천천히 알아 갈 시간이 우리에겐 없었으니까. 서로,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으니까. 그 사람이 내게 선택권을 제공할 줄 알았다. 결혼하고 자기랑 같이 떠날지, 아니면 여기서 관계를 이만 정리할지.

   근데 이메일을 나누자고? 느닷없이? 청혼도, 고백도 아니고, 그냥 이메일을 나누자고? 그것도 두 달에 딱 한 번씩만? 뭐 이런 경우가 다 있어?    


   그 거짓말 같은 상황이 벌어진 뒤, 이틀 내내, 나는 공황 상태에 빠져 있었다. 멍해진 채로 걷다가, 집으로 올라오는 계단 턱에 발 걸려 넘어지기도 했다.

   그 어지러운 이틀이 지난 뒤에도, 나는 계속 혼란스러웠다. 그러는 동안, 그 사람 출국 날짜는 성큼성큼 다가왔다. 내 쪽에서 그 사람한테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긴 한데, 좀처럼 마음의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내가 먼저 청혼할 수도 있는 거였지만, 어째서인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사람과 관련된 모든 것들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그렇게 깊은 사이인 것도 아니었는데, 그런 상황에서 그 사람과 이메일만 주고받으며 지낼 자신이 없었다. 나는 실질적으로 내 곁에 있는, 내가 만질 수 있고, 생생하게 보고 들을 수 있는 사랑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런 사랑을 그 사람과 하고 싶었던 게 문제다. 그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과 그런 사랑을 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던 게 문제다.    





   결국 나는 그러자고 했다. 그 사람 출국하던 날, 공항에서 그 사람한테. 어처구니없을 만큼 펑펑 울면서. 그러자고. 그러자고. 이메일인지 뭔지, 그거 주고받자고. 망할 두 달 만에 한 번씩. 

   여권을 코트 안주머니에 집어넣은 그 사람이, 흥건한 내 눈물을 닦아 주며 물었다. 궁금해 하지 않길래, 왜 이메일이고, 왜 두 달인지 궁금해 하지 않길래, 자기는 자기 제안 거절당한 줄 알았다고. 이대로 우리가 끝일 줄 알았다고.

   울음을 추스르지 못한 나는, 왜 이메일인지, 왜 두 달인지 끝내 듣지 못하고, 그 사람을 보냈다.

   바보, 등신.    


   그 사람 출국 후 사흘이 지난 때, 그 사람으로부터 메일이 왔다. 엄청난 장문의 메일이었다. 메일을 띄워 놓은 인터넷 창의 스크롤바가 손톱만 했다. 

   말수가 많은 사람이 아니어서, 메일도 간략하게만 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서 의외였다. 입으로 말하는 기능이랑 글쓰기로 말하는 기능은 별개라더니, 그 말이 맞나 보았다.


   그 첫 메일의 첫 내용은, 첫 만남에 대한 이야기였다. 우리의 첫 만남. 메일 창 위쪽에는 사진도 몇 장 첨부돼 있었다. 그 사람이 쓰던 다이어리 내용을 찍은 사진들이었다. 그 사람 다이어리 안에, 내 얘기가 많았다. 

   약간 민망할 만큼, 많았다.    

   「내가 당신한테 첫눈에 반했다고 하면, 내 말 믿어 줄 거예요? 믿기 힘든가? 누가 나더러, 나한테 첫눈에 반했다고 하면, 난 좀 믿기 그럴 거 같은데. 근데 그 믿기 힘든 일이 나한테 벌어졌어요. 당신하고 나 사이에. 물론, 내가 일방적으로 당신한테 반해 버린 거긴 하지만. 아무튼, 이 말 믿기 어려워 할 거 같아서, 당신 관련 메모 몇 장 첨부했어요. 이 메모들, 내 다이어리 안에 있는 건데요. 이것들 말고도 수두룩해요. 당신에 대해 써 놓은 것들 말이에요. 아침에 일정 시작할 때나, 밤에 일정 마무리할 때나, 당신 생각밖에 안 나서, 다이어리를 다이어리답게 쓰질 못했어요. 계획을 써 넣어야 되는데, 내가 거기 써 넣은 건 죄다 감탄뿐이야. 조금의 걱정하고. 내 안에 들어찬 당신이 너무 빨리 커져 버려서, 나는 내내 당신을 앓았어요. 근데 좋더라고. 당신을 앓을 수 있어서. 예를 들면, 잠을 제대로 못 자서, 아침에 입술이 바싹 말라 있잖아요? 나는 그 상황에서 웃고 마는 거예요. 내 몸에 달라붙은 피로가 당신의 성질을 띠고 있어서. 이 말도, 믿기 힘들겠지?」

   「나는 부끄럼도 많고, 조심성도 많아서, 말을 툭툭 잘 내뱉지를 못해요. 그게 꼭 필요한 말이라 해도 그래요. 당신도 나랑 같이 지내 봐서 알겠지만, 나 답답할 만큼 과묵하잖아요. 당신한테 해 주고 싶은 얘기는 이래저래 많은데, 당신하고 같이 있을 때마다, 자꾸 머릿속에서 할 말들을 고치고, 또 고치고, 내가 대화하고 있는 사람이 당신이라 더 고치고, 그러다가 시간을 다 보내 버렸어요. 결국 당신한테 중요한 말들은 하나도 못하고. 그래서 매번 속상했어요. 나 스스로가 한심해 죽겠고. 당신 좋아하는 만큼 당신한테 표현 못해 주는 게, 계속 마음에 걸렸어요. 그러고 있는데 갑자기 출장 일정이 잡힌 거예요. 외국 부서로 1년씩이나. 처음에는 그 출장 문제가 재난 같았어요. 당신하고 떨어져 있어야 되니까. 공식적으로 시작도 안 했는데, 우리, 떨어져 있어야 되니까. 근데, 이번 기회에, 그동안 내가 당신한테 못해 준 표현들 다 해 주면 어떨까, 싶은 거예요. 전화 통화 말고, 문자 말고, 두 달에 한 번씩 이메일 나누자고 한 건, 당신 말대로, 망할 두 달에 한 번씩만 이메일 나누자고 한 건, 이메일 속에서 내가 제일 차분해질 수 있을 거 같아서였어요. 전화 통화하거나 문자 메시지 나눌 때는, 내가 얼른 반응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좀 있어서, 진짜 내 모습과 다른 모습들을 많이 보여주게 되거든요. 너무 내 생각만 하죠. 미안해요. 그 어떤 이유를 갖다 대도, 두 달은 너무 잔인하다는 거, 나도 알아요. 근데 나는 이 모든 게, 위기가 아니라 기회라고 생각했어요. 이런 과정 없이, 서로에 대해 침착하게 생각해 보는 과정, 내가 나를 세세하게 알려 주는 과정 없이 우리 관계가 발전되는 것보다는, 이런 과정 후에 우리 관계가 발전되는 게, 우리를 훨씬 단단하게 묶어 줄 거라고 생각했어요. 이렇게 출장 오지 않았더라면, 당신 가까이에서 나는 내내 말수 적은 사람으로만 지냈을 거예요. 당신하고 보낼 수 있는 시간이야 계속 주어졌겠지만, 당신한테 내 존재의 더 깊은 부분들을 알릴 수는 없었겠죠. 아, 두 달이 두 달인 이유는, 방금 얘기한 거처럼, 우리가 서로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보면 좋을 거 같아서였어요. 약간의 거리를, 시간적 거리를 두고, 서로를 새롭게 바라보면 좋을 거 같아서. 야속하게 들릴 거라는 거 알아요. 근데 이 두 달이요. 나를 생각하기만 하면서 살라는 두 달이 아니라요. 가까운 미래에 나랑 함께할 자리를, 마음속이나 일상 속의 자리를 만들라고 주는 두 달이에요. 나도 이 여섯 번의 두 달들을, 그런 식으로 보낼 거예요. 나, 당신하고 내 미래를 약속하고 싶어요. 내 앞으로의 날들을, 여생을, 당신하고 보내고 싶어요. 사귀니 마니, 그런 직접적인 얘기는 안 했어도, 우리, 그 비슷한 얘기는 충분히 나눴잖아요. 나 출국하던 날, 공항에서 흘린 당신 눈물이, 내 마음과 당신 마음에 대한 어떤 합의처럼 느껴졌는데, 나는. 분명한 말은 아니지만, 제일 분명한 감정을 나눴다고, 우리가 그랬다고 느껴졌는데, 나는. 지금 내 느낌들이 혹시 틀린 거라면, 나한테 말해 줘요.」    





   첫 메일의 모든 문장이 청혼처럼 느껴져서, 나는 컴퓨터 옆에 따라 둔 물을 한 모금도 마시지 못했다. 떠느라고. 모든 걸 다 읽고 난 뒤에도, 나는 한동안 떨었다. 손끝과, 허벅지 안쪽과, 윗입술과, 호흡은 노골적으로 떨렸다.

   메일을 다 읽은 지 10분쯤 지나서야, 나는 책상 뒤로 몸을 물렸다. ‘멀어지는 만큼 가까워지는 게 있고, 가까워지는 만큼 멀어지는 게 있다.’는 말이, 문득 떠올랐다.

   벌써 그와 결혼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대부분의 것들이, 여전히 무질서한 형태로 나를 휘저어대긴 했지만.  만약 이 상황을 타인의 사연으로 들었다면, 모든 게 미쳐 돌아간다고 할 것 같았지만. 뭔가가 딱 납득되어서, 어떤 순조로움이 나를 안정시켜서, 나는 당황스럽기도 하고 다행스럽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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