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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이로운 Apr 20. 2017

네 손길과 함께한 순간들



   갈대밭에서, 아니, 갈대 같이 생긴 수풀 속에서, 너는 오른팔을 뻗고 걸었다. 팔뚝 안쪽과 손날로 누런 풀들을 쓸며, 앞으로, 앞으로, 걸었다. 

   나는 그렇게 걷고 있는 네 앞모습을 보고 싶어서, 어쩌면 감고 있을 눈을 보고 싶어서, 네 쪽으로 빠르게 걸었다. 

   내 예상대로, 너는 눈을 감고 있었다. 우리 주위에는 걸려 넘어질 만한 게 아무것도 없었으므로, 너는 마음 편히 눈을 감고 걸었다. 그런 너를 바라보며, 너를 마주 보며, 나는 뒤로 걸었다. 

   그렇게 우리는 한참을 걸었다. 하늘에 진회색 먹구름이 끼어 있던, 어느 가을날이었다. 빗방울이 한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하던, 이른 오후였다.

   그곳에서 너를 안아 보았다. 처음으로.    





   그로부터 두어 달 지난 때였나. 우리는 어떤 카페에 갔다. 시골에 위치하고 있었지만, 도심 한가운데 있는 카페처럼, 말끔한 새 것들로 가득한 곳이었다. 

   그 카페 2층 절반은 테라스였는데, 테라스와 실내 사이에 놓인 문이 특이하게 생겼었다. 그 문은, 창문에 달린 블라인드를 90도로 꺾어 놓은 것 같았다. 그걸 펼쳐서 테라스 문을 닫고, 그걸 접으며 테라스 문을 여는 모양이었다. 

   우리가 2층으로 올라갔을 때, 테라스 문은 닫혀 있었다. 우리가 첫 손님인 듯했다. 테이크아웃 잔에 꽂힌 빨대를 깨물고 있던 너는, 잔을 내게 맡기고, 테라스 문 쪽으로 가볍게 뛰었다. 그런 뒤, 너를 처음 안아 보았던 그 날, 갈대밭에서처럼, 아니, 갈대처럼 생긴 수풀 속에서처럼, 너는 왼팔을 뻗었고, 손바닥으로 테라스 문을 쓸며 걸었다. 

   네 습관이었던 것 같다. 그거. 앞으로 주르르 펼쳐져 있는 걸 보면, 그것들을 만지며 걷고 싶어 하는 거. 결국 그렇게 하고 마는 거.

   그리고 나는, 그런 네 습관이 좋았다. 네가 그 습관에 따라 행동하고 있는 모습은, 아무 생각 없이, 너만 남아 있는 모습 같아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일은, 네 안의 가장 환한 순수와 마주하는 일 같았다. 

   아무도 없는 그 카페 2층 테라스에서, 부채 같은 테라스 문을 쓰다듬으며 걷는 네 뒷모습에 대고, 너에게, 사랑한다고 말했었다. 처음으로.    





   내가 첫 차를 샀던 날. 첫 손님으로 너를 태우고, 바다를 향해 운전해 갔던 날.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지나자마자, 너는 창문을 내리고, 오른팔을 뻗었다. 바람을 만져 보기 위해서였겠다. 

   나는 조수석 옆으로 차가 오는지 확인하려고 백미러를 힐끔대다가, 너를 힐끔대다가 하며, 바다 풍경이 내 생각보다 멋지기를 바랐다.

   그로부터 2시간 후 도착한 바다에서, 꽤 굵다란 자갈이 많이 섞인 모래사장 위에서, 네가 나와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다. 처음으로.

   세상 한편을 채우고 있는, 낯설거나 익숙한 모든 것들에 손을 뻗어, 그것들을 다정하게 어루만져 줄 줄 아는 너와 함께 살아가는 생활은 어떨까, 가만히 상상하며, 나는 네 손을 잡았다. 

   나도 너처럼, 세상의 것들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고, 내 손길과 온기를 받아 가장 행복해지는 게 너였으면 싶었다.     





   우리가 함께 살 첫 집의 공사가 끝난 날, 거실 바닥에 앉아 짜장면과 탕수육과 맥주를 먹다가, 너는 내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의아한 눈으로 너를 바라보던 내게, 너는 “꼭 잡아 줘, 내 손.” 하고 말했다. 

   내가 그 손을 잡자, 잠시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던 네가 “행복의 촉감.” 하고 중얼거렸다.

   내 손이 네 손에 닿아 생기는 마찰이, 그 일상적인 감촉이, 네게 행복으로 감각된다는 사실이 너무 얼떨떨해서, 네 손을 잡고 있던 내 손의 힘이 빠져나갔고, 그런 내 손을, 네 손이 힘껏 움켜쥐었다.    





   손 하나만 가지고도, 너와의 모든 기억을 불러내, 너와 나눈 모든 느낌을 되새길 수 있다.    

   지금 너는 내 옆에 곤히 잠들어 있다. 네 하얀 손이 침대 밖으로 빠져 나와 있고, 그 손이 이따금 엷게 흔들거린다.

   너는 꿈속에서 뭘 만지고 있는 걸까.

   허공에 떠 있는 그 손을 잡아 보려다가, 네 꿈속에서 네가 만지고 있는 그게 내 손일 것도 같아서, 나는 네 손을 가만히 내버려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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