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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이로운 Apr 18. 2017

그 이름은 네 이름일 뿐이다



   내가 가장 오래 한 거짓말은, 내가 좋아하는 가수에 관한 것이다.

   그 가수의 목소리가 좋아서, 그 가수가 부르는 노래들이 좋아서, 그 가수를 좋아한다고, 나는 오래도록 말해 왔다. 하지만, 방금 언급한 것처럼, 그건 거짓말이었다. 

   나는 그 가수의 목소리를 좋아한다기보다, 그 가수가 부른 노래들을 좋아한다기보다, 그 가수의 노래와 관련된 기억을 붙들고 싶어서, 그래서, 그 노래를 즐겨 들은 것뿐이었다.

   그 기억 속에 젖어들어 있는 기분이 좋아서, 나는 그 가수의 노래를 자주 들었고, 그 습관에 대한 이유로 “이 가수 좋아하잖아, 나.” 하고 둘러댔다.    


   누군가 내게, 노래를 불러 준 날이었다. 

   밀폐된 공간 특유의 퀴퀴한 냄새가 나는, 허름한 노래방. 사들이고 나서 단 한 번도 빨지 않은 것 같은, 약간 거칠거칠하던 빨간 소파. 수많은 모니터에서 뿜어져 나오던 희고 푸른 빛. 근거가 불분명하던 졸음. 손끝으로 그 사람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고 남은 촉감. 계속 메말라 가던 입속. 숨쉬기를 자꾸 잊어버리던 순간들.

   오직 나만을 위한 누군가의 노래를, 처음 들어 본 날이었다. 





   그 날, 내 귀와 가슴을 파고들던 그 노래가, 그 가수의 노래였다. 난데없이 머리만 무중력 상태가 된 것처럼, 머리가 둥둥 떠다니는 것 같다고 느끼며, 나는 그 노래를 들었다. 

   황홀, 했다. 그 단어가 내 삶의 경험으로 실현된, 첫 찰나였다.    


   그 가수를 알고 있었지만, 그 가수가 그 노래를 불렀다는 건, 그때 처음 알았다.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노래였다는 소리다. 

   그게, 나는 다행스러웠다. 난생 처음 들은 그 노래를, 그 가수가 아니라 그 사람 곡이라고 멋대로 받아들이며, 나는 그 노래 속 가사 몇 구절을 기억 깊이 새겼다. 집에 돌아가, 찾아 듣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시작되었다. 그 노래를 비롯한, 그 가수의 노래를 모조리 찾아 듣기 시작한 건.    


   그때, 나는 열여섯 살이었다.

   지금, 나는 스물여섯 살이다.

   첫사랑을 겪은 지, 딱 10년이 흘렀다.    





   첫사랑이라는 거, 되게 오묘하다. 첫사랑에 대한 의미 부여를 너무 많이 해서 그런가? 그 사람 이름이라든지, 그 사람이 쓰던 로션 냄새라든지, 그 사람의 자잘한 말버릇이나, 그 사람이 버릇처럼 내뱉던 추임새라든지, 그 사람 핸드폰 벨소리라든지, 그런 기억들이, 목 아래쪽에 혹처럼 맺히는 일이, 아직도 있다.

   그 혹 같은 회상의 무게가 나를 아프게 하지는 않는데,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아닌데, 그 무게가 느껴지고 한동안, 나는 잠시 멎어진다. 말 그대로, 멎어진다.

   그 사람 목소리는 더 이상 기억나지 않는데, 그 사람 얼굴의 정확한 이목구비도 더 이상 기억나지 않는데, 어쩌다 떠오른 어떤 장면들은, 방금 전에 나를 지나쳐 간 것처럼 또렷해, 내 모든 작동을 중단시켜 버리는 것이다.

   나를 기어이 멈춰 서도록 만드는 기억인 것이다. 그 사람은.    


   나를 가장 행복하게 만들어 준 연애는 그 연애가 아닌데도, 나는 그 연애를 돌아보다가, 문득문득, 숨을 멈추는 것이다.

   그 짧은 진공 상태로 인해, 묘한 기분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스릴러 영화처럼 박진감 넘치게 진행되었던 연애에 대한 기억보다, 그 밍밍한 첫 연애에 대한 기억이, 내 기분을 더 큰 폭으로 흔드는 것이다.    



   첫사랑이 의미 있는 이유의 태반은, ‘사랑’보다 ‘첫’에 있는 걸까.


   아까 집으로 올라오던 중에, 아랫집 현관 앞에 놓인 종이 박스 속에서, 그 사람 이름을 보았다.

   그 사람 이름 들여다보며 계단 턱에 잠깐 서 있다가, 나는, 그 사람 이름 앞에 여전히 휘청거릴 내 여든 살이나 아흔 살을 예감했다.    

   친척 동생 이름을 가물가물 까먹는 날은 있어도, 내가 네 이름을 헷갈려 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너랑 헤어지고 네 이름을 단 한 번도 불러 본 적 없지만, 너를 의식하지 않는 순간에도, 네 이름은 항상 내 언저리를 맴돌고 있다고.

   사는 동안 너랑 같은 이름 가진 사람을 꽤 자주 만나 왔고, 앞으로도 꽤 많이 만나겠지만, 그 이름은, 나한테 그 이름은, 오직 네 이름일 뿐이라고.    


   그리고 나는 문득 궁금해진다. 나도 누군가의, 그런 첫사랑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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